1582번째
수요시위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일본군 ‘위안부’를 표기할 때 위안부에 작은 따옴표가 붙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위안부(慰安婦,
comfort woman)는 사전적 의미로 ‘주로 전쟁 때 남자들의 성욕 해결을 위하여 군대에 강제로 동원된 여자’라고 나와있다.1) 이 단어는 여자를 칭하지만
피해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작은 따옴표를 붙여 표기하는 이유는 전쟁당시 일본군이 실제 사용하던 ‘역사적’ 용어 때문이라고 한다. 이 작은따옴표를
통해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고 그 강제성과 부정적의미를 환기시킨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일본군‘위안부’
외에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 Victims), 일본군 (전시) 성폭력 피해자
(Japanese Military Sexual Violence Victims)로 쓰이기도 한다.
나는
일제강점기 강제징용과 전시 성폭력에 대해 배우며 분노했었고, 초등학교에서 역사를 배우고 역사만화를 읽은 나의 10대 동생도 그에 대해 분노의 언어로
이야기한적이 있었다. 이전에는 ‘화난다’로 끝이 났다면, 최근에는 분노를 느끼면서 사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느껴야 사회가 변하는데 동참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성폭력범죄, 피해자들의 트라우마, 2차 가해 등 사건사고 뉴스들을 보며 단지 안타까워하고 분노하는 것 말고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하며, 나는 이제 유심히 들여다보고 지켜보고, 인지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목소리를 보태기로 결심했다. ‘변화’를 위한 실천과 행동을 위해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자원활동을 시작했다.
이번에
참여한 수요시위는 1582차 수요시위였다.
‘수요시위’가
매주 수요일마다 열린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1992년 1월 8일 수요일에 처음 시작되었다는 건 부끄럽지만 몰랐었다. 언젠간 나도 참여해보겠다고
생각했지만 실천을 하지 않던 와중에 한국성폭력상담소 자원활동가로 참여하던 중에 처음 참여하게 되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목소리에 내
목소리를 보태는 일 밖에 없어서 슬펐다. 1582번의 수요일, 1582주, 31년의 시간동안 목소리를 내고 있는데도 변화는 왜 일어날 수 없었던걸까?
소녀상은
반일행동에서 지키고 있었고 소녀상을 철거하라며 수요시위 공간 옆을 지나가며 소리를 지르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길 맞은편에는 반일동상진상규명공대위에서
현수막을 설치하고 피켓을 들고 있었다. 이들은 매주 대치하고 도발하려고 한다고 한다.
일본군
성노예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1991년 8월 14일 : 김학순 할머니 일본 ‘위안부’ 피해자임을 증언하는 기자회견)2) 1992년 1월 수요집회가
처음 시작된 후 한국정부는 전국의 시, 구청에 피해자센터 설치와 피해 증언 및 신고접수를 시작했다. 그 당시 피해자들과 연대자들은 ‘국가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주는구나’라고 희망을 가지지 않았을까? 피해자들과 면담을 하고 걱정하지 말라며 피해자들을 대변해줄 것 같던 정부는 오히려 합의를 하지
않으면 다른 위안부 피해자들이 피해를 입는다는 식으로 말하며 어떠한 정보도 주지 않은 채 주가 되어야할 피해자들의 의견을 듣는 것이 아닌 ‘설득’을
했다고 한다. ’2015년 한일합의’ 에서 피해자들을 대변해주겠다는 정부는 일본군 성노예사건을 매듭짓기에 급급했다.
한국정부는
피해자들에게 ‘당신들의 간절한 목소리를 들었고 우리는 당신들을 도울 것입니다’라고 한 뒤, 가해자인 일본에게 ‘인정하고 사과하십시오’ 가 아닌,
‘인정하고 사과하시겠습니까?’ 라고 묻고 안 한다고 하니 ‘그래, 알았어 돈으로 받았으니 됐어’라고 답한 꼴이 되었다.
정부가
이렇게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에 대한 진상규명을 대충 매듭을 지으려고 했다. 사건은 매듭지어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피해자들에게는 가슴을
고통스럽고 답답하게 매듭지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한 번 뿐인 인생이라고 하지만 인간의 삶에서 사건과 피해들은 일회용이 아니다. 피해자가 죽어도
사건은 남는다. 피해자들은 더이상 자신과 같은 피해자들이 없기를 바라고 삶을 살아가기 위해 끝까지 싸우고 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돈이 아닌
인정과 사과이다. 먹고사는 것과 몸과 마음 치료비는 돈으로 해결할 수 있어도 고통을 간직한 채 괴롭게 살아온 시간들은 돈으로 바꿀 수 없다.
2015년
12월 28일 한일합의에서 일본군 ‘위안부’ 학술연구와 외교대응에서 기반이 된 기록들은 일본 정부 및 연구자들에 의해 발간된 일본 소장된 기록에만
의지하고 있었다. 이에 2016년부터 서울시와 서울대 정진성 연구팀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도모하고, 피해자의 명예회복 및 인권증진을
도모하고자 미국, 영국, 태국 등지의 ‘위안부’ 관계 기록들을 수집·관리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3) ‘서울기록원’ 홈페이지에
가면 서울대 정진성 연구팀이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수집한 일본군 ‘위안부’ 기록을 볼 수 있다. 이런 자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와 한국정부는
묵묵부답이다.
왜
한국정부와 일본은 귀를 막고 임시방편으로 덮어만 놓고 지나가려고 하는 걸까? 정치인들은 정권교체 시기가 되면 우리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한다. 여러분도
변화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대통령이 되어 변화를 이끌겠다고 한다. 새로운 나라를 국민들과 함께 만들 것이라고 한다. 이번 윤석열 정부도 ‘국민이
키운 윤석열, 내일을 바꾸는 대통령’4) 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면서
‘보다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변화를 이뤄내겠다는 윤 후보의 의지와 약속을 반영했다는 설명’이라고 이야기했다.
여기서
국민은 누구인 것이고 우리의 내일은 바뀌고 있는 걸까?
2월
8일, 수요시위에서는 ‘2023년 2월 7일, 법원은 베트남전 피해 생존자 응우옌티탄 씨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민간인 학살 인정 및 피해
배상에 대한 국가배상소송 1심에서 원고의 손을 들어주었다’5)는 소식도 함께 들었다.
1968년 퐁니·퐁넛 마을 학살이 발생한 지 55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군의 명백한 불법 행위가 있었다는 점을 확인하고 대한민국의 법적 책임을
인정한 판결이다. 가해국인 한국은 베트남전 피해 생존자들의 목소리를 외면해왔다. 이번 1심 판결에 대해, 우리의 가해국인 일본처럼 회피하고 끝까지
부인하지 않고 인정하고 배상하기로 결정했다는 점을 평화와 화해를 위한 한걸음으로 받아들여 기뻐했다. 한국정부도 역사적 진실과 책임을 마주하며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같기에 수요시위에서도 희망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열흘 후 2월 17일, 이종섭 국방장관은 ‘베트남전 당시 우리 장병들에 의해 민간인 학살된 것은 전혀 없기에 국방부는 1심 판결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6)
사람들은
미래를 위해, 나아가기 위해 과거는 지난 것이니 필요 없다고,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기억해야할 것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만드는 발판은 과거의 것들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와 진실을 기억하고 책임을 져야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국가가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가는 발판들을 아무리 반짝반짝 보기 좋게 만든다고 해서 과거에 책임지지 않은 일이 과연 사라질까?
그리고
언제나 누군가의 용기 있는 목소리가 변화의 시작이라는 것을 다시한번 느꼈다. ‘균열을 일으키는 용기, 일상에 스며드는 변화‘’나는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이 슬로건을 정말 좋아하고 마음에 품고 다닌다. 나의 작은 목소리가, 짧은 글이 그 균열에 보탬이 되길 바란다.
<이 글은 자원활동가 태현님이 작성하였습니다.>
3) 서울 기록원 https://archives.seoul.go.kr/contents/comfort-women
4) 김기윤 기자, “윤석열, ‘국민이 키운’ 슬로건 발표…“정권교체 당위 담았다”, 한겨례, 2022-02-03, https://m.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1029546.html
6) 경향신문,
국방장관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없었다”···법원 1심 판결 부정, 신짜오베트남, 2023-02-17 http://www.chaovietnam.co.kr/archives/614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