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인턴 연입니다. 2023년의 시작은 씨티-경희 NGO 인턴십을 통해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6주간 근무하며 힘차게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솔직하게 작성해 보자면 여성 분야보다는 국제 개발협력 분야를 기대하며 지원하였습니다. 상담소를 알지 못한 채로 배정받고 제가 자신 있는 분야는 아니었기에 괜히 해가 되는 것은 아닐지 걱정했던 게 기억나네요. 하지만 걱정이 무색해질 정도로 상담소에서의 6주는 제가 사회에 대한 시야를 확장할 수 있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오리엔테이션
출근 첫날 떨리는 마음으로 상담소를 향했습니다. 첫날은 오로지 오리엔테이션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상담소는 사무국, 여성주의상담팀, 성문화운동팀, 회원홍보팀, 마지막으로 성폭력 피해자 쉼터인 열림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팀의 활동가 한 분씩 들어오셔서 팀의 목표와 방향성, 주요 사업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단순한 나열식 설명이 아닌 어떤 점에서 문제의식을 느끼고 목표 설정 후 사업을 도출하게 되었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신 덕에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오리엔테이션 이후에 자유롭게 질문할 수 있는 분위기에서 긴장을 풀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름도 알지 못했었지만 오로지 성폭력 피해자들을 위해 체계적으로 꾸려진 상담소가 그야말로 든든했습니다.
정기총회
총회 안내문을 상담소 회원분들이 받으실 수 있도록 우편 업무를 도맡았습니다. 상담소 초창기 때부터 후원해 주신 분들이 다수였기 때문에 어떤 분들인지 얼른 뵙고 싶은 마음이 커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안내문을 패킹하고 라벨지를 붙여 우체국에 발송하는 단순한 업무였지만, “나는 한 가지라도 계속해서 나의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있나?”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습니다.
총회 자료집에 실릴 자료들을 정리하기도 했습니다. 극히 일부이긴 했지만 저는 ‘언론에 난 상담소’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뉴스 기사의 헤드라인만 봤을 뿐이지만 지난 1년 동안 발생했던 여성 이슈들의 흐름이 잡혔으며 상담소는 그 어디에도 항상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총회 pt를 제작하는 시간이 가장 길었기 때문에 많은 기억이 남습니다. 하나의 pt를 인턴 모자님과 나누어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조율할 점이 많았던 만큼 큰 의지가 되었던 거 같습니다. 흥미로웠던 것은 팀마다 가진 색깔이 달라 여러 면에서 박학다식하신 모자님 덕에 여러 수정 과정도 거뜬히 해낼 수 있었습니다.
총회 당일에는 상담소 회원분들을 뵐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 시기를 지나 몇 년 만에 재개된 오프라인 총회였던 만큼 서로 반기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저는 닻별 활동가님과 돌아다니며 어떤 계기로 정회원이 되었는지, 관심 있는 사업은 무엇인지 인터뷰를 짤막하게 진행했습니다.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상담소에 후원하지만, 생존자의 일상 회복과 성평등한 사회를 바란다는 마음 하나는 같다고 느껴졌습니다. 매 차례마다 활동가분들이 발표로 애써주셨는데 서로 응원해 주시는 모습에 저까지도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수요시위
1월 초부터 수요시위를 준비해왔습니다. 부끄럽지만 저는 수요시위에 대해 알지 못했었고, 시위에 참여해 본 적이 없었기에 작은 두려움이 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시위의 콘셉트를 정하기 위해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에 다녀왔습니다. 피해자가 처음으로 목소리 낸 시기부터 그것을 이어받아 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는 현재까지 발걸음을 옮기면서 눈과 귀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수차례의 시위가 이어져왔지만 변화하지 못하는 사회에 대해 목소리 낼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수요시위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에 바로 수요시위에 참여하였습니다. 다양한 연령층이 참여하고 있으며 수요일이 돌아오면 언제나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저는 감사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몇 차례의 회의를 거쳐서 직접 포스터를 제작하고 연대 발언문을 작성했습니다. 특히 연대 발언문은 처음 작성해 보는 탓에 여러모로 가장 소모되는 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지는 부담감만큼 전시 성폭력에 대한 자료와 현 정부의 백래시 동향을 더 세밀하게 찾아보는 계기가 되어 유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수요시위 전 날 밤부터 긴장이 됐는데 막상 무대에 올라가니 추운 것 외에는 떨리는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아마 앞에 계신 활동가분들을 비롯한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의 마음이 같다는 게 느껴져서겠죠. 여는 노래 ‘바위처럼’부터 인턴 모자님의 마무리 멘트까지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무사히 마무리되었습니다. 비록 시위 중 혐오 세력의 방해가 있었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더 연대하고자 하는 마음에 집중하였습니다.
가장 오랫동안 생각해오고 준비해 온 정기 수요시위가 마무리되니 인턴 기간의 끝자락이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그동안 열심히 해왔다는 뿌듯함이 같이 느껴졌습니다. 상담소와 함께 주관한 1582차 정기 수요시위는 끝이 났지만, 절대 잊지 않는 마음으로 연대할 것이라 스스로 다짐하였습니다.
공판 참관
산 활동가님과 이야기하던 중 우연히 공판에 대한 관심을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실제로 공판에 참관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언론계 첫 미투사건이었습니다. 밧줄에 묶여 지나가는 사람과 많은 언론사 기자들, 그야말로 드라마에서만 보았던 광경이라 다소 경직된 분위기였습니다.
공판이 진행되는 동안 피해자의 세세하고 일관된 진술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젓거나 답답한 표정을 짓는 등 자신의 가해 사실을 부정하는 피의자의 태도에 분노했습니다. 동시에 5년 넘게 싸워오신 피해자분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그분의 안녕을 진심으로 바라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강간, 성폭력, 성추행 사건들을 우리가 접하게 되었을 때, 가해자 중심의 시선이 아닌 피해자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장연 전국 결의대회 및 지하철 행동
전장연 결의대회 및 지하철 행동에도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전날에는 서울시와 서울교통공사에 하고 싶은 말을 직접 피켓에 담아보기도 했습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전장연 시위에 대해 사회적으로 과열된 분위기이기 때문에 혹시 몸싸움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가기 전까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런 걱정이 무색하게 느껴졌을 만큼 막상 현장에 가보니 많은 시민단체와 개인들이 모여 뜨거운 연대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혐오 세력의 목소리가 연대 외침에 자꾸만 묻히는 걸 보며 시민들의 행동이 가진 힘을 다시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단체가 아닌 개인으로서 참여할 수 있겠다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약자가 당연한 권리를 보장받는 방법은 언제나 그들 스스로 소리 내는 것이었고 이 점에 대해 그동안 무심했던 저를 돌아보았습니다. 사회가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는 것의 시작점은 ‘시민의 인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시작점이 다르더라도 모두가 동등하게 살아가는 사회를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활동보고회
활동보고회를 끝으로 6주간의 활동을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상담소는 그 누구보다 대한민국의 성평등 사회를 위해 발 빠르게 활동하고 있는 곳입니다. 학벌, 연애 및 결혼 상태 등 사회에서 편견의 잣대로 쉽게 악용되는 요소를 배제한 분위기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계획된 업무 외의 활동에도 참여하여 견문을 확장할 수 있었던 부분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매일 오전 11시에 있는 아침 나눔 시간에는 팀별 이슈나 상담소 내 모든 활동가가 알아야 할 사항들을 같이 공유할 수 있어 소속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점심시간에는 다 같이 비건식을 먹어 저에게는 다소 생소했지만, 비건식으로도 내가 평소에 즐기는 메뉴를 먹을 수 있다는 행복을 배웠습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여성의제나 이슈에 더 많은 관심이 생겨났고,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며 여성주의 시각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성폭력 사건을 가해자 중심에서 바라보았던 것을 반성하며 이제는 피해자/생존자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려고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6주간의 인턴 활동은 제가 가진 편견을 깨부수고 제 안에 있던 또 다른 모습들을 스스로 관찰할 수 있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제가 성인이 되고 난 후 가장 큰 성장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챙겨주신 상담소 내 모든 활동가분들, 그리고 힘 있는 열정을 가지신 인턴 모자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인턴 기간은 끝이 났지만 연대하는 마음으로 항상 함께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