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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젠더 강간죄 유죄 판결을 환영하며 - ‘성적 존엄성’의 침해로 강간죄 재구성되길
  • 2009-02-20
  • 3809
트랜스젠더를 대상으로 한 강간죄를 인정하는 첫 판결이 나왔다.
 
부산지법 제5형사부(재판장 고종주 부장판사)는 18일 트렌스젠더인 김 아무개(58·부산시 부산진구)씨를 흉기로 위협해 성폭행한 혐의(주거침입 강간 등)로 기소된 신 아무개(28)씨에 대한 선고공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 사회봉사 120시간을 선고했다.
 
 
이는 1996년 트랜스젠더에 대한 강간죄를 인정하지 않은 대법원 판례를 뒤집은 것으로서 법원 해석의 큰 변화를 보여준다.
 
왜 강간죄는 성추행보다 중하게 처벌될까?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간음한 자라는 강간죄의 구성요건(형법 32조)은, 강간이 여성의 ‘질’안에 남성의 ‘페니스’가 강제로 삽입되는 것으로 이해하게 한다. 다른 성폭력 범죄보다 그 형량이 훨씬 높아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는 강간죄는, 우리 법체계에서 성추행에 비해 훨씬 죄질이 나쁘다고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성폭력 피해자들은 자신의 피해를 형법상 성폭력의 위계 (강간이 성추행보다 끔찍한 범죄다)대로 경험하지는 않는다. 피해자들의 경험은 아주 다양한 반면, 왜 우리 법체계는 강간죄를 성폭력에서 가장 무거운 범죄로 판단하고 있을까? 여성의 질이 아니라, 여성이나 남성의 구강이나 항문에 삽입이 된다면, 혹은 남성의 페니스가 아니라 다른 이물질을 삽입한 것이라면, 왜 그것은 ‘여성의 질에 남성의 페니스 삽입’보다 죄질이 낮다고 판단될까?

 
강간죄는 여성의 정조를 침해한 죄?
 
다른 이물질이 아니라 남성의 페니스가, 항문이나 구강이 아니라 여성의 질이 강간죄를 성립하게 하는 조건이 되어왔던 이유는, 여전히 성폭력이 ‘정조에 관한 죄’로 해석되어 왔기 때문이다. 95년 형법이 개정될 때, 성폭력에 관한 형법 제 32조의 제목이 ‘정조에 관한 죄’에서 ‘강간과 추행의 죄’로 개정되었지만, 실제 법해석은 그 변화를 따라오지 않았다. ‘정조’는 여성의 생식능력(임신 가능성)과 관련된다. 혼인 이후 여성은 자신이 속한 남성 가문의 아이를 낳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그 여성의 질에 ‘남편 이외의 남성의 페니스’가 삽입된다면, 그 여성이 출산하게 될 아이는 어느 남성에 속하게 될 것인지의 혼란을 야기한다. 이와 같이 강간범을 국가가 처벌하는 이유가 ‘다른 남성의 가문에 속한 여성을 건드렸기’ 때문이라면, 생식능력이 없는 MTF 트랜스젠더 여성은 강간죄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아내에 대한 남편의 강간 역시 강간죄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한 남성에게 속한 여성의 성은 더 이상 침해될 ‘정조’가 없으며, 정조가 있다 해도 그 정조는 남편에게 속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강간죄 구성 요건의 변화 필요
 
오랫동안 여성인권단체, 성소수자인권단체에서는 성폭력과 관련된 형법 개정을 주장해왔다. 강간죄의 보호법익은 ‘성적자기결정권’의 침해여야 하며, 그에 따라 강간이라는 범죄 역시 ‘여성의 몸이 속한 남성 가문’에 대한 범죄가 아니라 ‘개인의 성적 자존감’의 침해로 변화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강간죄 구성에 있어 피해자는 부녀에서 ‘사람’으로 변화해야하며, 피해 구성 요건도 ‘여성의 질’이 뿐만 아니라 구강이나 항문, 남성의 페니스 뿐만 아니라 다른 이물질의 삽입도 강간죄 성립의 조건으로 포함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비교법적으로 보아도, 성적 자존감에 대한 침해를 만들어내는 기준은 대체로 “신체 삽입”에 기준을 두고 있다[이호중(2007) 성폭력 형법 개정안의 주요 내용과 쟁점, 「성폭력관련 형법개정안 공청회」,여성인권법연대] 독일 형법은 “성행위”를 성폭력의 기본적인 행위개념으로 설정하면서, “성교 또는 신체삽입과 연관된 유사성교행위”에 대하여 가중처벌하는 규정체계를 두고 있다. 프랑스형법은 강간을 “사람에 대한 성적 삽입행위”라고 규정하고 있으며(제 222-23조) 미국의 주법도 대체로 "sexual intercouse"를 구강성교와 항문성교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고, 뉴저지주 형법의 “sexual penetration"이라는 개념은 독일의 신체삽입행위와 거의 같다.
 
강간죄 구성요건은 피해자들의 경험을 통해 다시 구성되어야
 
법적으로 강제 추행이 강간보다 처벌의 정도가 약하다면, 그 이유는 ‘여성의 질에 남성 성기가 강제 삽입된 것이 (다른 어떤 행위보다) 끔찍하기 때문’이라는 ‘사회통념’ 때문이 아니라, 신체 삽입이 이루어진 성적 침해가 신체 삽입이 배제된 성적 침해에 비해 개인의 성적 자존감을 더 중대하게 침해한다는 피해자들의 경험적 근거에서 판단되어야 한다. 이는 국가가 ‘강간’죄를 처벌해야하는 이유, 강간죄의 보호 법익이 무엇인지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주장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폭력상담소에서 활동을 하면서 만나는 피해자들은 성폭력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고통과 분노를 호소한다. 피해의 내용은 그야말로 피해자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하다. 피해 상황, 가해자와의 관계, 피해 전후 주변인의 반응, 피해 이전부터 ‘성(sexuality)'에 대해 갖고 있었던 생각, 자라온 환경 등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자신의 성폭력 피해에 대해 상담하고, 법적 절차를 밟기 시작하는 피해자들은 자신이 처한 부당한 상황을 상담소라는 여성인권단체로부터, 그리고 국가 기관으로부터 넓게는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기 원한다. 국가 기관에게 자신의 피해를 호소함으로써, 가해자의 가해 내용에 걸 맞는 처벌을 해주기를 기대한다. 이 때 문제가 생기는 순간은, 개인의 피해 내용이 사회적 통념이나, 기존의 법체계에 수렴되지 못 하는 순간이다. 법이 개인 경험을 배제하는 이유가 이 사회의 성차별적인 편견이라고 한다면, 법 자체는 ‘보편적 정의’의 차원에서 다시 질문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트랜스젠더 강간죄 유죄 판결은 ‘부녀’로 강간의 객체를 한정하고 있는 ‘법’의 기존의 해석보다, ‘여성’으로 자신의 성별 정체성을 갖는 사람의 경험에 귀 기울고 있다는 점에서 기쁜 판결이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강간이라는 범죄는 ‘여성의 정조’ 침해가 아니라 ‘개인의 성적 존엄성에 대한 침해’임을 사회적으로 환기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 ‘여성의 정조’를 대체할만한 강간죄의 보호법익으로서 ‘개인의 성적 존엄성’ 침해의 내용, 성적 자기결정권의 내용을 가시화하려는 사회적 관심과 노력, 연구 작업 역시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성폭력 문제가 성별 질서와 가부장제도에서 비가시화된 개인들의 경험을 공적 영역으로 끌어오는 계기가 되고, 그것은 바로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할 공동체의 문제임을 모두 상기하게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