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 명 서 ○
故장자연씨 죽음에 대한 성역 없는 수사를
촉구한다.
故 장자연씨의 죽음에 얽힌 원인을 수사하고 있는 분당경찰서는 어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분석한 문건의 필적이 고인의 필적과 동일할 확률이 크다는 감정 결과를 밝혔다고 전했다. 또 한번의 여배우의 자살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던 사람들은 하나씩 더해지고 있는 새로운 정황들에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동시에, 새로운 뉴스를 접할수록 과연 이 사건이 명명백백히 수사될 수 있을까, 불안하고 답답한 심정이 되고 있다.
연예계의 여자 연예인 성상납 관행에 대한 의혹은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하지만 매번 제대로 수사가 진행되지 않고, ‘카더라’ 통신으로만 남아왔던 이유는 무엇인가. 개인 연예인은 거대한 연예계 먹이사슬에서 마음만 먹으면 쉽게 매장될 수 있는 소모품 지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자연예인이 자신이 겪은 일을 고발하고 드러내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어떤 방법을 이용할 수 있을까? 경찰이나 검찰, 언론, 동료연예인, 소속기획사? 그 어디라도 권력사슬의 관계자가 아닌 존재를 찾기란 쉽지 않다. 권력사슬의 절대성을 보장하고 있는 정치계, 재계 인사들은 오래된 구조 속에서 상납받아 온 만큼 적은 힘을 행사하여 손쉽게 문제제기를 무마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그렇게 넘어갈 수는 없다.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벌써 많은 여자연예인들이 이러한 배경에서 희생되었다는 여론이 인터넷을 통해 일파만파 퍼지고 있다. 고 장자연씨가 소속되어있던 연예기획사 대표의 실명과 회사 연혁, 지난 2002년 성상납 이슈와의 연관에 대해 유력한 의혹들이 널리 드러나고 있다. 지난 2002년에는 관련된 광고주, 기획사 대표, 정치권 인사 등이 거론되었지만 정치권의 암묵적 합의로 무마되었다는 내용이 드러났다.
모두가 알고 있는, ‘상식’이 되어버린 폭력에 대해 묵인하지 않겠다는 분노가 표출되고 있다. 권력사슬의 ‘관련 당사자’들이 사건을 제대로 파헤치고 드러내지 못할 것이라는 불신이 수많은 일개 ‘시청자’ ‘소비자’였던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움직이게 하고 있다. 죽음 말고는 억울한 사연을 꺼내 말할 수 없게 한 세상에서 또 다른 죽음을 만들지 않으려면, 수사당국은 이 사건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연예산업은 연예인들과 그들의 재능을 상품으로 포장하여 판매하고 있고, 이것이 거대한 산업으로 움직이고 유통되는 가운데 그 개인들은 드러나지 못한 수많은 고통을 겪고 있을 것이다. 연예인들의 자살은 일반적인 사회현상을 반증하기도 하지만, 연예계라는 직업군이 발생시키는 극심한 고통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이 중, 여자연예인들이 겪게 되는 문제는 이중 삼중의 고통이다. 여자연예인의 재능과 능력, 존재감 자체가 성적인 어필을 배제하고서는 구성되지 않으며, 연예계 종사자와 여자에 대한 이중적인 차별의 시선은 이들이 주변인, 동료, 일반 대중 사이에서도 매우 취약한 협박과 폭력의 대상이 되게 한다. 유명 여자연예인의 사생활 비디오 유출 사건, 다이어트 비디오와 관련된 퇴출사건, 전 애인에 의한 스토킹 폭행과 이로 인한 연예계 활동 중단 사건 등등등. 기획사 권력, 성‘상납’과 관련되지 않아도 이들이 겪는 차별적인 시선과 폭력은 너무 다양하게, 너무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재능을 발휘하고 싶어도 성상납 제의를 받으며 번번이 좌절하고, 그 관문을 어렵게 통과한다 해도 그것이 족쇄가 되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뇌관처럼 여자연예인으로서의 수명을 위협하고, 끊임없이 몸을 고쳐 외모지상주의에 부합해도 그것이 도리어 비난의 화살이 되고, 소신껏 행동하고 일상생활을 자신의 신념대로 살아간다해도 어떤 여론에 휩싸일지 몰라 점차 고립되는 여자연예인들. 이것이 이번 고 장자연 씨의 죽음과 관련해서 수사당국이 놓지 말아야 할 실체적 진실이다.
여론으로부터 문제의 핵심으로 추궁당하고 있는 소속 기획사 대표는 “2009년에 성상납이 웬 말이냐?” “BMW를 타고 다니던 사람이 무엇이 부족해 그랬겠느냐?” 라고 말해 빈축을 사고 있다. 당신은 무엇이 부족하여 노예계약을 하고, 손해배상소송을 일삼는가? ‘다른 이해관계가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음모’, ‘두 소속사 간에 얽힌 문제’ 등은 성폭력 사건에서 항상 듣던 말이라 익숙하다. 왜 두 소속사가 얽히게 되었는지, 소송에 휘말린 연예인들은 왜 기존 소속사로부터 그토록 나오고 싶어했는지만 더 물어봐도 위의 말은 함량미달의 변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사당국은 여자 연예인을 성상납하고 죽게 해왔던 그 동안의 관행과 권력사슬을 명확하게 파악해서 차근차근 하나씩 끝까지 수사해나가야 한다. 과정에서 밝혀지는 사실들은 낱낱이 공개하라. 용의자들은 증거인멸과 도주의 우려가 있으니 구속수사도 반드시 해야 한다. 이와 함께, 앞으로 여성연예인이 기획사와 공정한 계약을 할 수 있는 제도적 보완, 성폭력이나 스토킹 피해에 대한 구제 방식에 대한 사회적 논의와 대책 마련이 필요할 것이다.
이 사건을 지켜보고 있는 많은 ‘관련인’들은 오랫동안 가슴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던 그 ‘사실’들을 공개적으로, 비공개적으로 밝히고 제보하고 편지로 보내주었으면 좋겠다. 성상납의 사슬에 얽혀있는 당사자들을 알고 있는 주변인들은 그들에게 재차 따져 묻고 탄원했으면 좋겠다. 고통을 겪었던 사람들의 주변인들은 그들의 경험을 위로하고, 그들로 하여금 용기 있는 연대를 할 수 있도록 도왔으면 좋겠다.
이 기회를 모두의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2009년 3월 18일
문화미래이프, 서울여성노동자회, 언니네트워크,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