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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비틀어진 언어_8월 공판 모니터링을 다녀와서
  • 2023-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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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엎지른 물은 다시 그릇에 주워 담을 수 없다’는 속담은 어느 교과서이건, 학습 만화이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듯하다. 이 속담과 관련하여 떠오르는 기억은 두 가지이다. 어릴 적 ‘속담’이라는 것을 가장 먼저 접하게 된 기억은, 페이지마다 속담과 관련된 익살스러운 만화 그림을 그려 넣고 속담을 설명해 주는 어린이용 속담 사전이었다. 또 누구나 알 법한 학습 만화 ‘Why’ 책을 읽던 중(과학에 관한 에피소드였다) 주인공이 물을 엎지르자, 그의 선생님 되시는 분이 물을 걸레로 닦아 증발시키고서 다시 물을 컵에 담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직도 기억난다.

   이때 ‘물’은 사람의 ‘말’에 빗대어진다. 한번 엎질러진 물을 원래의 모습처럼 그릇에 다시 담기 어려운 것처럼, 사람의 말 또한 발화된 이후에 그것을 되돌리기 어렵다는 의미이다. 물은 다시 증발하여 원래의 형태로 돌아갈 수 있을까 싶지만, 사람의 말은 어떠한가. 한 번 뱉어낸 말이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졌을 때, 그것을 되돌릴 수 있을까.

   말과 언어는 이따금 폭력적이다. 언어가 먼저인지 사람의 생각이 먼저인지 다투는 철학적 논쟁이 수두룩하지만, 현재에 와서는 언어가 사람들의 생각을 가두고 있음이 확실해 보인다. 자신이 알고 있는 언어에 맞춰서 생각하고, 타인을 평가하거나 특정 범주로 분류하며, 차별의 언어를 내뱉기도 한다. 혐오의 말이 가해진 쪽에서 어떠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될 줄도 모르고서, 언어의 폭력은 계속된다.

    사람의 뇌는 무언가를 인지했을 때, 그것을 분류하여 자신이 이해하기 쉬운 상태로 만들고는 한다. 그 직관적인 판단은 그 사람이 살아오면서 경험한 사건과 학습한 언어로 이뤄진다. 경험과 학습의 과정에서는 사회에 만연한 편견, 고정관념이 뒤따른다. 누군가를 판단할 때, 어떤 존재를 재단할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마음속 자리한 차별적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니 항상 노력해야 함을 생각해야 한다. 타인을 함부로 어떤 범주에 밀어 넣고, 그 범주가 가진다고 생각되어지는 고정관념에 맞춰 생각하지 않도록. 길을 걷다가 옆을 지나간 사람이 짧은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을 때 우리의 경험과 편견은 그 사람이 ‘남성’이겠거니 판단해 버릴 수 있지만, 타인의 외양을 보고 그를 어떠한 범주에 맞춰 생각한다는 게 무례함을 반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판단한다는 것에 어떤 책임이 따를까.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가진 생각에 의해, 어쩌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사고 과정 아래에서 타인을 훑어보고, 평가하고, 판단한다. 그 시선 끝에 매달려 달랑거리는 편견이 무례한 줄도 모르고. 편견으로 타인을 규정하는 것이 차별과 혐오로 이어져, 타인에게 끔찍한 폭력으로 돌아가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혐오의 언어로 남을 규정하면서, 그 결과 깊은 상처를 얻는 이들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그렇게 차별은 공고해졌을까.


   판단이라는 것이 유독 무거워지는 자리가 있다. 많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먼저 떠오르는 것 중 하나는 ‘재판’이다. 사람이 지은 죄를 다투고,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를 규정하며, 어떤 분쟁과 싸움에 대한 결과를 확인한다. 그리고 누군가 받게 될 죗값이 있다면 그것을 선고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재판의 모든 과정은 언어를 통해 이뤄진다. 사실관계부터 판결까지 모든 과정이 하나하나 언어로 빼곡히 채워진다.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도, 그들 사이에 있었던 사건도, 사건에 연루된 이들도, 그 과정에서 발생한 폭력과 혐오도,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재판관의 견해도 언어로써 쓰여진다. 

   한 사람의 마음과 행동을 ‘언어’라는 틀로 완벽히 표현할 수 있을까. 일상에서 일기를 쓸 때도 나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모르겠기에 낱말을 뒤척이는데, 많은 감정과 기억이 얽혀 재판장에서 다뤄야겠다고 판단한 사건을 어떻게 언어로 규정할 수 있나. 애초에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값을 우리는 판단하려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진실을 좇아 잘못을 가리고, 그 죗값을 판단하는 자리는 무거운 책임이 따라야 마땅할 것이다.


   지난 8월 말 ‘강간죄’ 선고 공판에 참여했다. 함께 간 활동가분과 방청석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재판관 3명이 들어왔다. 그 뒤로 피고인이 한 명씩 들어와 자리에 서면, 중앙에 앉은 재판관이 사실관계부터 어떠한 이유에서 선고 결정이 났는지를 줄줄 읊었다. 그 말 한마디 한마디는 피고인이 저지른 잘못을 헤집는 것이자, 그 잘못을 잘근잘근 씹어 어떤 죗값을 받아야 하는지 판단하는 것이기도 했다. 

   강간죄 선고 이전에는 세 개의 피고인이 있었다. 첫 번째 피고는 미성년자 의제 강간, 유사강간 죄로 징역을 선고받았다. 두 번째 피고는 유사강간, 치상 죄로 징역을 선고받았다. 세 번째 피고는 마약 및 공연음란 죄로 징역을 선고받았다. 사실관계를 듣는 내내 이를 악물고 있었지만, 그들이 선고받은 징역은 터무니없이 낮았다. 두 번째 피고는 재판관에게 선처를 부탁하기도 했다. 피해자의 삶의 어딘가에 지울 수 없는 기억을 남긴 것은 생각도 나지 않는다는 듯이.

   그래도 앞선 피고인이 모두 유죄를 선고받았기 때문에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지원한 강간죄 역시 유죄 선고를 받을 것이라 마음을 놓고 있던 터였다. 피고인이 재판장에 들어오고, 재판관이 사실관계와 판결요지를 말하고, 무죄를 선고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5분 채 되지 않았을 것이다. ‘무죄를 선고한다’는 재판관의 말을 듣자마자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강간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폭행 또는 협박이 요구되고, 이에 따라 피해자가 범행 당시 항거 불능상태에 있어야 한다. 해당 사건에서는 피해자의 진술이 주요한 증거가 되었는데, 사건 진행 과정에서의 진술이 일부 일관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증거의 신빙성이 없었다는 판단이 나온 것이다.  피해자는 112신고 후 누군가에게 조력도 받지 못한 채 고소, 불송치 결정, 재수자요청 및 보완수사요구에 의한 재수사, 검찰 보완수사 등의 비교적 긴 수사과정을 거쳐왔다. 이에 어쩔 수 없이 피해자에 대한 진술조서나 서면조사가 수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세세한 부분에 대한 피해자의 일부 진술이 일관되지 않는 부분들이 발생할수 밖에 없었으나, 피해내용의 주요 부분에 관한 진술은 매우 일관되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 과정에서 진술에 대해 첨언 정도가 아닌 ‘번복’으로 판단한 것이다. 또한 가해자가 힘으로 피해자를 억압한 상태였지만 피해자가 신체 일부를 움직일 수 있었다는 이유로 항거불능상태 역시 협소하게 판단하며 인정하지 않았다. 법은 피해자의 상황을 충분히 고려했다고 할 수 있을까.  

   강간이라는 범행이 발생했던 순간을 어떤 언어로 설명할 수 있을까. 피해자가 받은 상처와 고통의 크기를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가해자의 잘못은 어떤 단어를 빌려 용서를 빈다 한들 소용이 있을까. 피해자의 편에 서야 할 법은 정말이지 공정한 언어를 택하고 있는 것이 맞나. 말에 찔려도 상처가 남는다. 그 상처를 지울 수는 없어도, 다시 아물 수 있게끔 우리는 연대해야 한다. 불완전하고 한 순간에 비틀려 버리기도 하는 언어이지만, 사람이 다치지 않는 말을 고르고 골라 따뜻하게 전해야 하지 않을까.



<이 글은 한국성폭력상담소 자원활동가 기자단 틈의 은결 님이 작성해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