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제공: 차별금지법제정연대)
10월 26일 정오, 군 관련 성소수자 인권침해·차별 신고 및 지원을 위한 네트워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HIV/AIDS 인권활동가네트워크 등 단체들은 헌법재판소(헌재) 앞에서 “군형법 추행죄, 전파매개행위죄는 위헌이다”를 제목으로 한 기자회견을 진행했습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활동가 동은, 자원활동가 가을, 너굴이 현장에 함께 참여했습니다.
이종걸(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활동가의 사회로 기자회견이 진행됐고, 오소리(군 관련 성소수자 인권침해·차별 신고 및 지원을 위한 네트워크,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소리(HIV/AIDS인권활동가네트워크, 한국청소년청년감염인커뮤니티 알), 정성조(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다양성을향한지속가능한움직임다움), 박한희(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소수자인권위원장, 당해 사건 대리인단) 활동가들이 발언했습니다. 연대 발언으로 장예정(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 천주교인권위원회), 신민정(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이사장) 활동가들이 함께했습니다.
“군형법 추행죄, 전파매개행위죄는 위헌이다”
군형법 제92조의6은 대한민국 군인에 대하여 ‘항문성교나 그 밖의 추행을 한 사람은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군형법 추행죄’는 군대 내에서 합의 하에 이뤄진 동성 간의 성관계도 처벌하는 조항으로, 성소수자에 대한 낙인을 찍는 대표적인 성소수자 처벌법입니다. 국가인권위원회, 유엔 국가별정례인권검토(UPR), 사회권위원회, 자유권위원회 등 국제사회에서도 군형법 제92조의6 폐지를 꾸준히 권고한 바 있습니다. 지난해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해당 조항으로 기소된 사례에 대해 ‘사적 공간에서 자발적 합의로 이뤄진 성행위 전반에 걸쳐 군형법 추행죄를 적용할 수 없다’는 취지의 무죄판결을 내리기도 했습니다(2019도3047).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 제19조는 ‘감염인은 혈액 또는 체액을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전파매개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규제의 대상인 HIV 감염인들은 질병관리청에 등록돼 치료받습니다. 약물 치료를 받으면 바이러스가 검출되지 않고, 검출되지 않으면 바이러스의 전파력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전파매개행위죄가 규정되어 있어 HIV 감염인들을 차별하고 있고, 이는 HIV 감염인이 치료받는 것을 오히려 가로막고 있습니다.
활동가들은 일제히 군형법 추행죄, 전파매개행위죄가 위헌이라고 외쳤습니다. 오소리 활동가는 군형법 제92조의6은 국내 유일 동성애 처벌법이라며 “오랜 시간 군대 내 동성애자를 검열하고 처벌해 온 악법”이라 말했습니다. 2017년 육군 중앙수사단이 군 내 동성애자 군인을 색출해 형사 처벌하라는 육군참모총장의 지시 하에 수십 명에 달하는 군인들을 수사하고, 모욕적인 심문을 자행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수사의 근거로 악용됐던 해당 조항이 인권 침해적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오소리 활동가는 헌재의 정의로운 판단을 촉구했습니다. 다음으로 소리 활동가는 HIV 감염인들이 꾸준한 치료를 받아 미검출에 도달하면 전파의 주체가 될 수 없는데, 그럼에도 전파매개행위죄로 인해 범죄자로 처벌받는 현실을 지적했습니다. 전파매개행위죄는 공중 보건을 실제로 실현하기보다 특정 집단을 차별하고 있고, 범죄화 조항은 HIV 예방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짚었습니다. 정성조 활동가는 “군형법 추행죄가 몇 차례 개정을 거쳤으나, 성소수자 군인을 차별적으로 대우한다는 본질이 변하지 않았다”고 언급하며 “성소수자들이 겪는 차별과 폭력을 국가가 정당화하며 집행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정성조 활동가는 전파매개행위죄 또한 낡은 법임을 지적했고, “감염인의 인권 보장이 HIV 예방 정책의 첫걸음”이며 “감염인의 인권 보장을 위해서는 실질적인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박한희 활동가는 군형법 추행죄와 전파매개행위죄 조항이 혐오와 차별에 기반해 있고, 달성 목적과 수단이 불일치한다는 점을 꼬집었습니다. 동시에 해당 조항들이 단순히 군인, HIV 감염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는 법이라며 “이 법이 있음으로써 한국은 언제까지나 성소수자 처벌 국가라는 오명을 벗을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연대 발언도 이어졌습니다. 장예정 위원장은 “군형법 추행죄는 성소수자 군인을 색출하고 재판에 넘기는 데 악용”됐고, “전파매개행위죄는 의학적 근거가 정당성을 잃은 지 오래지만 여전히 HIV 감염인들에게 사회적 낙인을 찍고 있다”고 표명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선동을 일삼는 것의 공적인 근거”로 작용하고 있기에, 이러한 법 제도의 편견과 혐오가 잘못됐음을 인정하고 평등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신민정 이사장은 “군형법 제92조의6 폐지는 한국 정부에 대한 국제사회의 요구”이고,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 제19조는 광범위한 내용의 법률로 감염인 개인의 행동 자유권을 제한하는 내용”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활동가들은 성소수자 차별을 공고하게 만드는 조항들이 명백하게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유효한 현실을 규탄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헌법수호기관으로서의 책무를 잊지 말고 평등에 합류하라”
이날 헌법재판소는 군형법 제92조의6(추행죄)에 대한 위헌법률심판 사건에서 재판관 5대 4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렸습니다. 지난 2002년, 2011년, 2016년의 결정에 이어 이번에도 해당 조항이 합헌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특히 헌재는 다수의견으로 “다수의 군 병력은 남성”이고, “혈기왕성한 젊은 남성 의무복무자들은 생활관이나 샤워실 등 생활공간까지 모두 공유하면서 장기간의 폐쇄적인 단체생활”을 한다는 점에서 “일반 사회와 비교하여 동성 군인 사이에 성적 행위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습니다. 나아가 “동성 군인 간의 성적 교섭행위를 방치”한다면 군대의 위계질서가 흔들려 “궁극적으로 군의 전투력 보존에 직접적인 위해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며 해당 조항이 평등원칙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군인들로 하여금 “다른 동료 군인의 성적 행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부담”하게 한다면 군대 전체의 사기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적었습니다. 이번 결정문에서 헌재는 성적 지향에 대한 편견을 가감 없이 드러냈습니다.
김기영·문형배·이미선·정정미 재판관은 해당 조항에 대해 위헌의견을 냈는데, 이들은 조항에 적힌 행위 주체 및 객체가 불명확하다는 점, “동성 군인 간 자발적 의사합치가 있었다면 비록 사적 공간이 아닌 곳에서 이루어진 성적 행위라 하더라도 이는 더 이상 추행에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해석도 가능하다”는 점, ‘군기’라는 추상적이고도 막연한 개념은 해석의 불명확성을 가중한다는 점을 짚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의사의 합치에 따라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성적 행위가 사적 공간 이외의 장소에서 행하여진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군이라는 공동사회의 건전한 생활과 군기를 침해한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다”고 명시했습니다. 만에 하나 군인 간의 성적 행위가 군기를 침해할 우려가 있어 제재할 필요성이 인정되더라도, 위헌의견은 타인의 법익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자발적 의사 합치에 따른 군인 간의 성적 행위에 대한 “형벌권의 행사는 최대한 유보”돼야 한다고 짚었습니다. 나아가 위헌의견은 사회적 다수인 이성애자들과 달리 “동성 간의 성적 행위는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가 입법 및 법률해석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라며 그 헌법적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한편 헌재는 전파매개행위죄 또한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결정했습니다. 합헌의견은 대상 조항을 제한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음을 전제했습니다. “의학적 치료를 받아 HIV 전파 가능성이 현저히 낮은 감염인이 상대방에게 자신이 감염인임을 알리고 한 행위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다만 “감염인의 제한 없는 방식의 성행위 등과 같은 사생활의 자유 및 일반적 행동자유권이 제약되는 것에 비해 국민의 건강 보호라는 공익을 달성하는 것은 더욱 중대하다”고 덧붙였습니다. 헌재 스스로도 의학적 감염 가능성이 없는 경우까지 포괄해 처벌하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라고 봤음에도, HIV 감염인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찍는 조항의 위헌성은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일부 위헌의견은 대상 조항이 “의료인의 처방에 따른 치료법을 성실히 이행하는 감염인의 전파매개행위까지도 예외 없이 전부 금지 및 처벌 대상으로 포함하고 있다”고 해석했고, “이들의 사생활의 자유 및 일반적인 행동자유권을 감내하기 어려운 정도로 제한하고 있다”고 명시했습니다.
군형법상 추행죄와 전파매개행위죄가 사실상 성소수자를 차별하고 옥죄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음에도 헌재가 두 조항 모두에 대한 합헌의견을 낸 것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가는 이런 개인의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보장할 의무가 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헌법의 이념과 가치를 실현하는 기관이지만, 벌써 네 번이나 성소수자 군인의 기본권 침해를 외면했습니다. HIV 감염인에 대한 사회적 낙인도 모른 체했습니다. ‘좁게 해석하면 된다’는 식의 태도는 무책임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결정문에 명시된 위헌의견에 주목합니다. 성소수자/HIV 감염인에 대한 낙인을 손쉽게 찍는 사회가 잘못됐음을, 그들의 인권이 현저히 침해되고 있는 현실이 문제임을 짚은 위헌의견을 통해 가능성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또다시 차별과 혐오로 얼룩진 법의 폐지를 위해 투쟁할 것입니다. 평등을 향한 투쟁에 함께합시다.
<이 글은 자원활동가 너굴 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