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UN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에 제출하는 국가인권위원회 독립보고서에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이 삭제된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의 진상규명과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 및 배상을 촉구하는 항목, 형법의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폭행 또는 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개정하는 항목, 이주가사노동자의 권리가 명시된 항목 등의 문구가 초안에서 더 추상적으로 수정이 되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대한민국은 여성에 대한 모든 차별을 철폐해야한다는 내용이 담긴 UN여성차별철폐협약에 서명한 국가로서 정기적으로 협약의 이행 상황을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2024년 올해가 제9차 정기 심의가 있는 시기입니다. 지난 해 정부는 UN에 보고서를 제출했고, 그 다음으로 시민단체와 국가인권위원회가 추가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제출해야 합니다. UN이 한국의 인권 상황을 다양한 시각에서 살펴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죠. 이에 상담소는 2월 26일, UN CEDAW 국가인권위원회 독립보고서 제출 안건이 상정된 전원위원회에 방청 신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날 독립보고서 안건은 논의조차 되지 못했습니다. 회의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위원들 간 막말과 고성이 오고 갔기 때문입니다. 현재 인권위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기사에서 봤지만, “인권위 파행”을 눈앞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임명된 김용원, 이충상 등 일부 위원들의 도를 넘는 막말과 혐오 발언, 직무유기는 이전부터 계속 문제가 되고 있었습니다. 가령, 김용원 위원은 침해1소위원회 위원장으로서 3개월 간 소위원회를 개최하지 않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 ‘직무유기’로 고발(각주1)되었고, 이충상 위원과 함께 혐오·비하 발언 등으로 국민권익위원회에 품위유지 의무와 인권옹호 책무를 위반한 혐의로도 고발(각주2)되었습니다. 인권위 회의장은 어느덧 “무식하다”, “건방지다”, “오만방자하다” 등의 막말이 오가는 곳이 되었고, 그 현장을 직접 보게 된 것입니다.
UN CEDAW 보고서 안건은 다음 전원위원회 회의인 3월 11일로 연기되었습니다. 이날도 안건과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로 회의가 지연되다가 회의가 시작한 지 2시간이 넘어서야 안건이 논의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날 방청한 회의는 더욱 놀라웠습니다. 김용원, 이충상 등의 위원이 국가인권위원회 보고서의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일본군 성노예제 진상규명” 등 개별 항목에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입니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자꾸 꺼내서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인권위가 인권단체도 아닌데(?) 사회적 합의가 되지 않은(?) 차별금지법을 포함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등 사안에 대해 인권적인 관점으로 전혀 고민해보지 않은 듯한 주장들이 이어졌습니다. 심지어 성소수자, 이주민 혐오발언이 정제되지 않고 발설되기도 했습니다. 두 위원은 이 내용을 독립보고서에서 삭제하지 않으면 안건을 통과시킬 수 없다고 우겼고 결국, 이번에도 CEDAW 보고서 안건은 통과되지 못하고 다음 회의로 연기되었습니다.
3월 25일 세 번째 전원위원회가 시작하기 전, 인권위 회의를 방청해온 여성단체는 ‘경로이탈 국가인권위원회 바로잡기 공동행동’과 함께 국가인권위원회 CEDAW 독립보고서 조속 통과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이번에는 반드시 독립 보고서가 통과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회의도 역시 의견 대립으로 회의가 길어졌습니다. 지난 회의처럼 일부 위원이 특정 항목을 삭제하지 않으면 통과를 못 시키겠다, 반대 의견을 보고서에 포함시켜달라고 계속 주장한 것이죠. 결국,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논쟁이 되는 개별 항목마다 통과시킬지 여부를 위원별로 거수 투표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항목에서는 인권위원 중 4명이 찬성하고 3명이 반대, 3명이 기권했습니다. 이렇게 보고서에 차별금지법 관련 내용은 빠지게 되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두 위원이 눈에 띄게 문제적인 발언을 했지만, 새로 임명된 신임위원 두 사람을 포함한 다른 위원들도 기권 의사를 표시함으로써 인권위 보고서에 차별금지법이 빠지는 것을 방관하고 묵인한 셈입니다. 또한, 강간죄 개정 항목도 ‘형법을 개정’하라는 문구가 삭제된 채 통과되는 등 국가인권위원회 보고서는 누더기가 되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미 2020년, 국회에 평등법 제정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과 형법 강간죄를 동의 여부로 개정하는 것은 많은 UN 기구들이 수차례 권고해온 사항입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스스로의 주장도 뒤집고 국제사회의 흐름도 거슬러 부끄러운 결과물을 내놓았습니다. 독립된 기구로서 한국의 인권 이행 상황을 명확히 분석하고 판단해야 할 국가인권위원회가 ‘다수결’이라는 최악의 방식으로 인권을 논하고, 그 결과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인권 조항이 삭제되고 대폭 축소된 것이죠. 5월, 스위스에서 UN CEDAW 본심의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상담소는 국제사회에 국가인권위원회의 이러한 만행을 알리는 방법을 고민할 예정입니다. 이번 국가인권위원회 독립 보고서는 부끄러운 역사자료로 기록될 것입니다.
이 글은 성문화운동팀 활동가 유랑이 작성했습니다.
(각기 다른 활동가들이 방청한 세 번의 전원위원회를 재구성하여 후기를 작성하였습니다.)
각주1) 경향신문, 인권위 침몰엔 두 상임위원의 ‘활약’이 있었다, 2023.11.05., https://m.khan.co.kr/politics/politics-general/article/202311050830011#c2b
각주2) 경향신문, 시민단체 “인권위 정치 기구로 전락시켜” 김용원·이충상 상임위원 권익위에 고발, 2024.02.07., https://m.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402072111015/am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