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 추모의날(TDoR) 후기
(사진 : TRANS PRIDE라고 적힌 피켓을 한 사람이 들고 있다 / 출처 : 2024 트랜스젠더 추모의날 행사 기회단. 촬영 강조새)
11월 16일 토요일 오후 3시, 이태원에서는 트랜스젠더 추모의날을 기리며 집회와 행진이 있었습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도 공동주최로 함께하였어요.
매년 11월 20일은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입니다. 혐오와 차별로 인해 세상을 먼저 떠난 트랜스젠더 동료를 추모하고, 앞으로 살아갈 트랜스젠더와 지지자들이 함께 서로에게 안부를 묻는 날입니다. 2018년부터 이태원에서 트랜스젠더 추모의날 집회와 행진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당일 오후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집회와 행진 때는 제법 많은 비가 쏟아졌습니다. 그럼에도 500명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트랜스젠더가 존엄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사회임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집회에서는 성별정체성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포괄하는 차별금지법이 필요한 이유, 억압적인 수술강요 막기 위한 성별인정법 제정, 트랜스젠더의 의료접근권과 의료보험 보장, 가족을 구성할 권리 보장하기 위한 혼인평등을 요구하며 발언들이 이어졌습니다. 소수자연대풍물패 장풍의 신명하는 노랫가락, 허리케인 김치와 스펜스-허 드랙아티스트들의 무섭고 아름답고 구슬픈 공연, 투쟁펑크듀오 소수윗의 앙큼상큼 노래들은 떠난이들을 기억하고 남은이들을 위로하는 퀴어한 추모의 한방식 같았습니다.
(사진 : 많은 사람들이 이태원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비를 맞은 무지갯빛 깃발들이 휘날리고 있다. / 출처 : 2024 트랜스젠더 추모의날 행사 기획단. 촬영 강조새)
곧이어 행진이 시작되었어요. 주말 사람이 붐비는 시간 이태원 일대를 걸으며 “트랜스젠더 여기있다 당신곁에 여기있다” “수술강요 웬말이냐 내 성별은 내가 안다” “핑계는 이제그만 차별금지법 제정하라” 구호들을 목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길지 않은 행진을 하며 이태원 도로를 걸으면서 여러 생각들이 들었습니다. 이태원은 퀴어 커뮤니티의 중요한 삶의 터전이자 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은 재난의 공간이기도 하기에 “평등해야 안전하다”라는 참사 당시의 구호가 떠오르기도 하였습니다.
(사진 : 마무리 집회 발언자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집회 참여자들이 모여있다. / 출처 : 2024 트랜스젠더 추모의날 행사 기회단. 촬영 강조새)
행진을 마치고 돌아와서 마무리 발언이 있었습니다. 한사성 효린님이 최근 세상을 떠난 동료를 기리며 발언 하였습니다. 효린님의 발언문 전문을 공유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에서 활동하는 이효린이라고 합니다. 한사성은 온라인 공간의 젠더폭력과 성산업 플랫폼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여성단체입니다. 지난 9월, 함께 동고동락하던 트랜스젠더 동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바로 그저께 퇴근하며 잘 가라고 인사했는데, 너무나 갑작스러운 소식이었습니다. 그녀는 작년 7월 한사성의 후원회원이 되었고 12월부터 상근활동가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상근활동가 지원서를 냈을 때 이이와 함께 활동하는 것을 기대하며 두근두근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녀와 함께 활동하며 우리의 페미니즘이 더 벼려지기를, 정치가 선명해지기를, 진지함과 뜨거움이 환류되기를, 공명하고 확장되기를 기대하며 동지로 맞이했습니다. 2024년을 여는 날에 그녀는 무려 81가지의 만다라트 신년계획을 발표했는데, 올 해의 목표는 ‘성장과 기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단체 활동 안에서도 성장하고 기여하려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비가 무지막지하게 내리던 어느 날, 전국 여성폭력 활동가 워크숍으로 다 같이 전북에 가게 되었는데, 그녀가 운전을 자처했습니다. 그녀 빼고는 아무도 운전을 할 줄 몰라서 무척 고마웠습니다. 근데 그녀가 그렇게까지 초보운전인 줄은 몰랐어요. 고속도로의 모든 차가 우리를 앞질러 갔습니다. 3시간 정도의 거리를 6시간 넘게 걸려 도착했을 때 우리는 모두 녹초가 되어있었어요. 그녀가 회장에 들어와서 제게 귓속말로 “나 이렇게 여자 많은데 처음 와봐”라고 할 때 저는 그 설렘을 충분히 받아주지 못했습니다. 2시간을 지각해서 심기가 불편했거든요. 기부금영수증 발행이 그녀의 첫 업무였습니다. 한사성은 처음으로 기부금영수증 발행 단체가 되어 실무 프로세스가 마련되어있지 않았고, 그녀는 맨땅에 헤딩하듯 수많은 문의 건들을 처리해야 했습니다. 신입 활동가에겐 버거웠을 거예요. 그러다 후원금 관리 프로그램에 자꾸 오류가 나서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계속 수정하고 고쳐보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는데, 그때 그녀가 갑자기 모니터 앞에서 두손을 모으고 눈을 꼭 감은채로 “제발제발제발제발제발”을 주문 외우듯 읊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엽고 재밌어서 엄청 크게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서툴고 미숙하더라도 열심을 다 하던 것, 잘 못 하는 일이라도 선뜻 나서서 맡는 것, 그녀가 이 활동에 기여하고자 얼마나 노력했는지, 여성단체 활동가로서 성장하고자 얼마나 진심을 다 했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솔직히 활력이 넘치는 사람도 아니었는데 온갖 대외활동을 어찌나 많이 하던지 세상을 바꾸고 싶은 열망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던 그녀가 떠난 뒤 계속 질문했습니다. 왜? 왜일까?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았을까? 우리가 무엇을 했어야 하는 것일까? 세상의 변화에 절박할수록 더 열심이고, 열심일수록 더 절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는데, 그 절박함에 심호흡할 수 있는 순간을, 조금은 천천히 갈 수 있는 여유를 같이 만들었다면 좋았겠단 생각이 이제야 듭니다. 그녀는 너무하게도 제 생일에 떠났고, 오늘은 그녀가 간 지 49일째 되는 날입니다. 생일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들은 것이 부고 소식이었던 탓에 태어나 가장 혼비백산한 생일을 보냈고요, 그날은 아무도 저한테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어요. 저는 떠난 그녀의 생일에 동료들과 같이 해외직구까지해서 오타쿠인 그녀의 최애 캐릭터 한정판 키보드를 선물로 주었는데요, ‘어쩜 너는 내게 이럴거니?’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이내 그냥 그녀가 버텨낼 수 있었던 날이 오늘까지였나 보구나 싶었습니다. 이제 매년 생일에 저는 조금 울적해지고 그녀가 보고싶기도 하고 어쩌면 원망스러울 것도 같습니다. 피해지원 현장에서 피해지원 활동가의 역할은 ‘피해를 겪은 자 곁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저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괴로움과 고통에 고꾸라질 때도, 씩씩하게 꿈같은 미래를 상상할 때도 같이 맞장구를 치고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곁에 있는 것이지요. 소외되고 배제되는 자, ‘정상’의 규범에서 탈락되는 자, ‘이상한’ 존재들과 함께 따뜻한 양지를 걷고자 하는 것이 페미니즘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계속 실천하는 이를 페미니스트라고 한다면, 저는 그녀의 죽음의 이유들을 계속 포착하고 고민하면서 그녀가 남긴 과제를 풀기 위해 그녀처럼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사이버성폭력 피해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특성 때문에 종결을 말하기 어렵습니다. 피해경험자는 언제까지 유포될지 모르는 절망과 불안을 느끼게 됩니다. ‘끝’이 보이지 않아 지독하게 절망하는 사람에게 희망의 말을 건네는 건 부질없단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해 불안과 함께 살아가는 자의 ‘괜찮음’을 상상해야 합니다. 먼지같은 차별을 온몸의 통각으로 느끼는 사람과 함께 ‘잘 먹고 잘 사는’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성별이분법에 따라 자신의 성별을 ‘증명’해야만 하는 구조와 ‘정상’이데올로기를 해체해야 합니다. 트랜스젠더 혐오가 정치적 힘을 얻지 못하도록 저항하고 맞서야 합니다. 참담하다가 그립고, 울다가 그냥 낄낄거리기도 하면서 동지들과 애도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녀가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밤늦도록 그녀 몫까지 사업 마감을 치며 ‘이놈의 기지배 어디갔냐’며 하늘에 대고 불평도 합니다. 우리는 각자 그녀의 삶과 죽음에 기여했던 것들을 기억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녀처럼 진지하고 뜨겁게, 또 유쾌하고 재밌게, 여러분 같이 살아갑시다. 힘들 땐 좀 쉬다가 지치면 등도 밀어주고, 농담도 하면서요, 그래도 되잖아요? 여러분, 우리 모두의 존엄과 자유와 평등을 위해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싸워나갑시다. 그렇게 그녀가 만들고 싶어했던 세상이 비로소 올 때까지 계속 같이 살아갑시다. 그녀가 떠나기 전 상근활동가 단톡방에 남긴 마지막 말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파이팅! |
출처 :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인스타그램
마지막으로 공동선언문을 낭독하며 집회 마무리되었습니다. 우리가 외친 ‘트랜스 프라이드’에는 “우리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에 저항하는 것, 그리고 누군가의 권리가 침해받는 순간에 그 옆에 서는 것이 포함된다”는 문장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그날의 자리가 많이 슬펐지만 침잠하게 되는 마음을 공개적으로 애도할 수 있는 공간만으로 큰 저항일 수 있겠다고 다시금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후기는 성문화운동팀 동은 활동가가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