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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사안대응

공론화가 진행 중인 개별사례의 구체적인 쟁점을 알리고 정의로운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활동을 소개합니다.
[성명/논평] 임신중지 비범죄화 7년, 제도공백의 결과 “미필적 고의의 책임은 보건복지부에 있다" -후기 임신중지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은 권○○ 씨 사건 판결에 부쳐 -
  • 2026-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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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임신중지 비범죄화 7년, 제도공백의 결과 “미필적 고의의 책임은 보건복지부에 있다"
-후기 임신중지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은 권○○ 씨 사건 판결에 부쳐 -

3월 4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33부 재판부는 후기 임신중지로 인해 살인죄로 기소되었던 권ㅇㅇ 씨에 대해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의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국가가 임신 출산 육아에 대한 사회적·경제적 조건을 개선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면, 충분히 다른 결과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라 판단한다”면서도, 권씨가 임신중지 방법과 사산 조치 여부 등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미필적 고의가 있는 공동정범의 행위로 보았다.
재판부는 특히 권씨가 임신중지 과정에서 사산 조치 여부나 방법 등에 대해 충분히 질문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미필적 고의를 인정했다. 그러나 이는 책임의 방향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판단이다. 의료행위의 방법과 위험, 절차에 대해 설명할 책임은 환자가 아니라 의료진에게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권씨는 수술 당시 마취 상태에서 수술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자신의 시술을 집도한 의사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한 상태였다. 평범한 시민인 환자가 모든 의학적 과정을 이해하고 질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살인의 의도를 추정하는 것은 이 사건을 유죄로 구성하기 위한 재판부의 무리한 해석에 불과하다.
재판부가 판결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판단의 근거도 서로 모순된다. 권ㅇㅇ씨가 “약물을 주입하는 등의 방법으로 태아를 모체 안에서 사산시키는 것이 의학적으로 가능한 것을 알고 있었다고 볼 자료가 없다”라고 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유도분만의 경우에는 태아를 모체에서 사산시키지만, 자신이 받게 될 제왕절개술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판부의 이와 같은 언급이나 이전의 재판 과정을 보면, 재판부를 포함한 그 누구도 사산 처리의 방법과 임신중지 방법에 따른 차이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도분만과 제왕절개술은 단지 태아를 만출하는 방법의 차이이며, 사산 유도(사산처리) 여부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사산 유도를 한 경우에도 임산부의 상태에 따라 유도분만 및 자궁절개술(Hysterotomy)을 할 수 있고, 태아의 생존을 목표로 하는 일반적인 분만의 경우에도 유도분만 및 제왕절개술은 방법적으로 선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개인이 아니라 제도에 있다. 세계보건기구를 비롯한 국제 의학계에서는 태아의 생존 가능성이 있는 시기의 임신중지에서 자궁 내 태아의 심정지를 사전에 유도하는 방식을 권고하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이러한 지침에 대한 공식적인 논의와 교육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후기 임신중지와 관련한 의료적 절차와 기준에 대한 명확한 임상 가이드라인이 여전히 부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부는 이러한 구조적 공백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렸다. 사산 처리 방식과 의료 절차를 충분히 질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살인의 고의를 인정한다면, 임신중지 비범죄화 이후 7년이 지나도록 관련 의료 가이드를 마련하지 않은 정부야말로 이 사건을 초래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미필적 고의를 묻는다면, 그 책임은 오히려 국가에 있다.
재판부도 언급했듯이 이 사건은 ‘낙태죄’의 판단 대상이 아니다. ‘낙태죄’가 존재했을 때에도 일단 살아서 출산을 한 이후에는 ‘낙태죄’가 아닌 살인죄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판결에서와 같이 임신중지 과정에서 제도의 미비로 인해 발생한 일을 임신 당사자의 살인의 의도를 묻는 의심의 틀 안에서 해석한다면, 이는 사실상 임신중지를 다시 범죄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는 국제사회가 지속적으로 강조해 온 임신중지의 비범죄화 원칙에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우리는 이번 판결에 대한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후 항소 재판이 진행된다면 계속해서 권씨의 무죄 판결을 위해 함께 싸울 것이다. 또한 보건복지부를 비롯한 정부와 국회에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 과거에는 임신중지가 ‘낙태죄’의 처벌 대상이었기 때문에, 일정 시기 이후의 임신중지 시에는 사전 사산 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나 사산 처리 방식에 대해 의료 현장에서도 명확한 가이드가 존재하지 않았고, 의료인들도 그 방법을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의료 기관에서는 무작정 상황을 회피하거나, 이번 사건에서와 같이 브로커와 연계해 무허가 시설을 운영하는 의료인에 의해 후기 임신중지 시술이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비범죄화 이후는 달라야 한다. 후기 임신중지는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실제로 행해지고 있는 일이며, 의료의 도움이 어느 경우보다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태아나 산모의 건강상의 문제나 다양한 사회경제적 여건으로 인해 더욱 취약한 여건에 있는 이들일수록 임신 후기에 임신중지를 하게 되는 상황을 겪게 되기에, 환자와 의료진의 신체적, 정신적 손상을 줄일 수 있는 가장 과학적인 방법에 대한 논의와 연구를 필요로 하는 영역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고민을 전혀 하지 않은 채, 도리어 절박한 상황에서 임신중지를 하고자 했던 한 개인에게 살인죄의 책임을 묻게 만든 보건복지부를 강력히 규탄한다. 보건복지부는 즉각 임신 전 기간에 걸쳐 임신한 사람과 의료진이 안심하고 보다 안전하게 임신중지에 관한 의료 행위를 할 수 있는 임상가이드를 마련하고, 이를 실행할 수 있는 보건의료 체계를 마련하라.
• 재판부는 권씨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언급하면서도 결국 ‘자기결정’이라는 이름으로 그 책임을 개인에게 돌렸다. 그러나 임신과 출산, 임신중지에 관한 정보와 의료 접근성은 개인의 능력에 의해 동일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연령, 경제적 상황, 지역, 교육 수준, 이주 조건 등 다양한 요인에 따라 접근 가능한 선택지는 크게 달라진다. 재판부도 언급했듯이 이번 사건의 피고인인 권씨 또한 사회경제적으로 매우 취약하고 고립된 상태에 처해 있었다. 국가가 시민의 존엄을 보장한다는 것은 이러한 조건을 외면한 채 개인의 선택만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가 실제로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취약한 소수에게 생존과 관련된 불이익을 떠넘기게 될 뿐이다. 현재는 재판부가 언급한 보호출산제와 위기임신상담센터 또한 익명 출산을 유도할 뿐 제대로 된 임신중지 상담과 지원 연계는 하지 않고 있다. 임신중지를 여전히 제약과 처벌의 대상으로 보고 권리 보장 체계를 구축하지 않는 정부는 사실상 후기 임신중지를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와 국회는 이 사건의 의미를 국가의 책임을 통감하는 계기로 삼고 임신중지 접근성을 가로막는 장벽들을 모두 없애고 모두가 제 때에 임신중지와 출산, 양육에 대한 정보와 상담, 연계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라.


2026년 3월 5일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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