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인권·국제 연대
기후정의행진을 준비하기 위해 행진 전 2주 동안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분들, 자원활동을 같이 하는 세민님, 그리고 똑딱수선클럽과 함께 천피켓을 만들었습니다. 각자 집에 있는 안 쓰는 에코백, 자투리 천들을 조금씩 가져와 자르고 바느질해서 글자를 완성해나갔습니다. 몇 년간 옷장 한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에코백은 글자를 천에 단단히 붙어 있도록 돕는 배경천이 되었습니다. 이번 활동이 아니었다면 무심히 버려졌을 에코백이 정성이 느껴져 정감 가는 천피켓으로 재탄생하는 과정, 이 과정을 만들어 가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아무것도 새로 사지 않고 집에 있는 재료만을 사용해서 피켓을 만들고, 또 아주 오랜만에 손바느질로 한 글자 한 글자 기워냈던 시간들이 의미 있는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문장이 “성평등 없이 기후정의 없다!”입니다.

기후정의행진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
9월 19일 토요일, 기후정의행진 날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날 반올림 부스에서 3대 메가 프로젝트의 문제점을 다룬 전단지를 나눠주는 자원활동을 했었는데요, 햇볕이 쨍쨍한 아스팔트 도로 위에서 환히 웃으면서 ‘강동심(강간죄 밭 갈고 동의 심기)’ 부채를 나눠주시던 활동가분들을 보니 너무 반가웠습니다. 강동심 부채 덕분에 9월이지만 너무 더웠던 날을 조금 더 시원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동의 여부’를 기준으로 하는 강간죄 개정을 위한 작은 실천들을 설명해주던 부채 문구도 기억에 남습니다. 현재 강간죄의 문제점과 이의 개정을 위해 할 수 있는 행동들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세심한 노력이 느껴졌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어 기후정의행진 사전부스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부스에서 기억에 남는 건 환경을 생각한 작은 선물들을 나눠주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었습니다. 감자와 양파, 고추를 신문지로 만든 바구니에 담아서 주셨던 부스가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고체형 설거지 바를 나눠주던 부스, 대나무 칫솔을 나눠주던 부스도 있었습니다. 대학생들이 운영팀으로 참여한 부스에서는 올바른 재활용품 분리배출 방법에 대한 퀴즈를 푸는 활동을 했습니다. 열정적으로 설명해주시는 부스 운영진분들의 목소리가 은은한 잔상으로 남았습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많이 봤던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학교에서 단체로 온 학생들이 여러 부스를 방문하는 모습을 보며 기후정의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다음 세대에도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희망이 느껴졌습니다.
성평등 없이 기후정의 없다?
약 2주에 걸쳐 손바느질로 완성한 천피켓의 문구, “성평등 없이 기후정의 없다!” 바느질을 하면서 이 문구를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습니다. 기후정의행진을 마친 지금, 천피켓의 이 문구를 다시 고민해봅니다. 기후정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성평등이 필요하다는 말인데요. ‘성평등이 있어야지 기후정의에도 다가갈 수 있다’는 이 도식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제가 이해하고 있는 성평등의 실천은 사회적 약자의 존재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입니다. 나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가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이를 통해 모든 존재의 해방을 이루어나가는 것이 ‘평등’의 본질인 것 같습니다. 또 내가 가진 힘을 인식하는 것, 이것이 다른 존재에게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는지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과정도 평등을 만들어가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평등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기후정의에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저만 해도 그렇습니다. 아빠가 환경부에서 일했기 때문에 환경부에서 추진 중인 여러 가지 정책들, 각종 환경 문제에 대한 정부의 대응을 아주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렇지만 기후 위기에 대해 스스로 조금이나마 고민을 시작한 건 ‘성평등’이라는 의제를 만나고 나서부터였습니다. ‘성평등’을 주제로 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찾아간 자리에서 여성환경연대 이안소영 대표님의 강의를 들었고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자원활동을 하면서 기후정의행진이 시민사회계에서 얼마나 큰 연례행사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또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 노동인권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그렇게 노동인권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에서 기후정의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을 만났습니다. 동물권을 생각해서, 기후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채식을 하는 사람도 모두 페미니즘을 접하면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기후정의에 다가가기 위한 첫걸음을 성평등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 성평등과 기후정의의 관계에 대한 나름의 설명을 생각해 봅니다.
한편 여성환경연대의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페미니스트 기후정의 선언문(2023)’에서는 성평등과 기후정의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후위기는 지구 생명체에 대한 끊임없는 착취의 결과인데 이러한 무분별한 착취를 가능하게 한 것은 ‘가부장제적 자본주의’ 즉 남성중심의 경제 시스템이고 이 ‘가부장제적 자본주의’는 주류남성에 포함되지 않는 여성과 ‘노동’할 수 없는 몸을 가진 존재, 비인간종을 배제하고 소외시키면서 불평등한 사회를 만들어왔다고요. 가부장제적 자본주의가 무분별한 착취로, 불평등한 사회로 이어지고 그 끝에 기후위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평등이 기후위기를 만들고 심화시키는 구조와 맞물려 있다고 설명할 수 있겠지요. 이러한 맥락에서도 ‘성평등 없이 기후정의 없다’는 말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부끄러운 얘기지만 기후정의행진에 대해서 잘 몰랐습니다. 어디선가 어렴풋이 들어봤던 것 같은 느낌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2019년 9월 21일에 한국에서 있었던 기후위기 비상행동 집회를 시작으로 2022년부터 매년 기후정의행진이 진행되었다는 것도 이번에야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기후정의행진을 알게 된 이후로 보물찾기를 하는 것처럼 기후정의행진 포스터가 주변 곳곳에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학교에 가기 위해 타는 지하철역 청사에 붙어 있는 포스터를 발견했고, 학교 수업을 듣는 57-1동 건물 바로 앞에 기후정의행진 참여를 독려하는 포스터가 붙어 있는 것도 보았습니다. 한국에서 첫 기후정의행진이 시작된 이후 매년 이맘때쯤이면 기후정의행진 포스터는 이곳저곳에 붙어있었을 텐데, 분명 이전에도 주변에 있었을 포스터를 올해에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처음 참여해보는 행진이라 기대되면서도 조금은 걱정되는 마음을 안고 참여했는데 막상 가보니 반가운 얼굴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대학생 때 활동했던 동아리의 선배를 거의 5년 만에 만났고 1학기 때 수업을 들었던 교수님을 마주쳤습니다. 다른 단체에서 함께하는 지인들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건 참여 이후에 찾아보다가 알게 된 것인데 두 달 전 학교 동문 모임에서 처음 뵙고 인사드렸던 교지편집부 선배도 이번 행진에서 발언하셨다고 합니다. 조금은 새롭게 느껴졌던 기후정의행진이라는 행사가 알고 보니 내가 알던 여러 사람들과 이어져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동시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기후정의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도 새삼 느꼈습니다.
올해 내내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이들이 만들어온 그래도 괜찮은 세상에 내가 기대서 살아왔구나. 내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지내던 시간에도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어가기 위해 싸워온 사람들이 있었구나.’ 조별 과제할 때 그렇게나 싫어했던 무임승차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듭니다. 하지만 이 마음을 미안함으로만 남기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번 행진에서 만난 사람들과, 기후정의행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함께 만든 천 피켓을 기억하며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무엇을 더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보려 합니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기후정의행진으로 함께하고 싶습니다.
- 이 후기는 자원활동가 하연님이 작성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