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소 공간의 기억
최영애 | 본 상담소 초대 소장, 여성인권을지원하는사람들 대표
드디어 상담소가 12년간 어깨 부딪히며 정들었던 ‘합정동 둥지’를 허물고 새 공간을 만들기 위한 작업을 시작하려고 한다. 이번에 만들어질 공간은 한국성폭력상담소 23년 역사에서 여섯 번째 새둥지인 셈이다. 90년 상담소 개소 준비를 하던 청운동 집까지 포함하면, 총 7번째 변신이다. 되돌아보니, 이삿짐보따리를 참 많이 싸고 풀었다. 그리고 상담소 이사는 상담소의 성장과 활동 확장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해왔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각 시기마다 숱한 에피소드가 넘쳐나고 참으로 많은 여성들의 자매애가 싹텄으며 반성폭력 역사의 새 장을 하나씩 열어갔다.
91년, 처음 상담소 활동을 시작했던 교대역 사거리에 위치한 13평 오피스텔(실평수 7평)을 계약하면서 초기 멤버들은 감격하고 또 감격했다. 책상 달랑 3개 그리고 벽에 붙여 놓은 세 명 정도 앉을 수 있는 소파, 3대의 전화기로 시작한 단촐한 살림이었지만, 당시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뿌듯! 그 자체였다. 옆 사무실에서 안 쓰는 컴퓨터를 불하받고 복사기, 팩스기를 장만할 때마다 소리 지르며 환호했다. 그러다 쏟아지는 전화와 내담자 방문을 감당할 수 없어 거의 비슷한 위치의 30평 오피스텔인 두 번째 장소로 옮기게 됐는데 넓어진 공간만큼 연대활동의 폭도 커지고 내담자 방문상담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이 시기는 성폭력특별법 제정운동과 상담, 교육, 출판활동이 주축을 이룬 이른바 ‘초창기’ 시기다.
두 번째 시기는 93년, 세 번째 이사로 시작된 ‘교육개발원 사거리’ 시기다. 성폭력특별법에 의거한 ‘상담소’로 등록, 허가받기 위해서는 일정규모의 상담부스와 공간을 확보해야 했다. 그리고 떡본김에 제사 지낸다고 넓어진 공간을 활용하여 24시간 운영되는 위기센터를 개설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성폭력피해자 쉼터인 ‘열림터’를 개설하여 명실공이 성폭력전문상담기관으로서의 위상과 역할을 다져나가던 시기였다. 또 ‘서울대조교성희롱사건’으로 촉발된 직장내 성폭력 문제를 사회적으로 크게 이슈화시키는 동시에 데이트성폭력 방지법 제정을 위한 작업도 펼쳐나간 시기이다. 또한 이 시기는 아마도 상담소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함께 활동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대학생 자원활동가들이 상,하반기 치열한 면접과정을 거쳐 60~70명씩 지킴이로 활동하고 사무실 자원활동가인 나눔이들이 20여명, 상담원 30여 명으로 공간이 늘 왁자지껄 활기가 넘쳤다. 그러나 열림터와 위기센터 운영은 만만치 않은 도전이었고 열림터와 상담소가 근접한 거리에 있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네 번째 둥지를 찾게 되고, 이른바 ‘양재동시기’ 로 접어들게 되었다.
95년, ‘양재동 시기’엔 상근자도 십여 명으로 늘고 옆방엔 큰 교육장도 갖추게 되면서 더 다양한 영역의 성폭력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 장애아동성폭력 교재편찬을 위해 장애인학교 교사들과 특별위원회를 만들고 성매매현장의 청소녀들을 위한 워크숍을 개최한 것 역시 그러한 노력이었다. 성폭력특별법을 시작으로 청소년 성매매방지법 등의 활동으로 특수영역의 전문성이 크게 확장되어가는 시기였다.
그리고 2001년, 그간의 모든 활동가와 후원자들의 헌신적 수고와 열정의 열매로 합정동에 번듯한 2층 주택을 마련하여 다섯 번째 이사를 단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12년 세월을 이곳 합정동에서 보내고 이제 보다 역동적인 활동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기존의 터를 허물고 새 터를 마련하기 위한 일곱 번째 이삿짐을 싸게 된 것이다.
단언컨대,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온 삶을 회상할 때 흔히 그 당시 거주했던 집, 친구, 사람들이 한 새끼줄에 묶여있는 굴비 한 두릅처럼 줄줄이 한 뭉텅이로 되살려지는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상담소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에게 ‘상담소 공간’은 단순한 활동공간의 개념을 뛰어넘는, 어린시절 동무들과 해맑게 뛰놀던 고향 같은 곳이며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달콤한 꿈을 꾸던 사랑방이다. 상담소에서 만난 우리의 인연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신의 축복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일곱 번째 새로 만드는 공간에서 더 열정적인 반성폭력 역사의 장을 써내려갈 것이라고 믿는다. 파이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