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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울림의 미국 출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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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돋보기

연구소 울림의 미국 출장기

추지현 | 본 상담소 부설 울림 프로젝트연구원

연구소 ‘울림’의 미국 선택

9월이면 부설연구소 울림이 출발한지도 1년이 됩니다. 울림은 ‘씻을 수 없는 상처’로 성폭력피해의 치명성을 강조하고 피해생존자를 병리화하는 담론을 변화시키고자 다양한 연구들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성폭력피해의 부정적 효과를 강조하는 담론은 한국사회에서 성폭력을 ‘4대 사회악’의 하나로 등극시킬 정도로 강력한 사회적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이것에 부합하는 무기력한 피해자의 모습을 진정한 ‘피해자다움’으로 요구하면서 새로운 폭력이 되기도 하지요. 그 이면에는 피해자를 ‘버려진 몸’으로 바라보며 동정하는 감정들도 존재하구요. 즉, 성폭력피해의 의미에 대한 공감능력이 사회적으로 확장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 우리 연구의 출발입니다. 성폭력피해에 대한 진정한 ‘공감’, ‘극복’이 과연 무엇일지도 고민이구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해외 현장 방문이 기획되었는데요. 그 관찰 대상 국가는 미국이었습니다. 미국은 반성폭력운동의 성과가 법제화를 중심으로 발흥하고 가시화된 곳이기도 하거니와, 성폭력피해의 치명성과 가해자에 대한 사회적 배제를 핵심으로 하는 엄벌주의적 형사정책을 생산해내고 있는 대표적인 국가이기도 합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정부는 미국의 성폭력 정책의 많은 부분을 ‘선진적’이라며 수입해왔기에, 우리가 현재 맞닥뜨린 고민을 앞서 했을 미국의 반성폭력운동 활동가들을 만나 이야기해보고자 했습니다.

활동가들과 면담 중인 모습

독립기념일을 전후한 미국 최대의 휴가기간인 7월 초, 맨하탄을 거점으로 뉴욕시의 5군데 성폭력·가정폭력 피해 지원기관과 콜롬비아 대학 내 성폭력센터를 방문해 많은 활동가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운 좋게도 퀸즈에서 20여 년째 가정폭력·성폭력 사건의 변호를 맡아오신 이찬우 변호사님을 만나게 되었고, 이분을 통해 이 분야의 전담 판사로 오랜 기간 일해오신 퀸즈의 판사분과 면담할 수 있는 기회도 가졌습니다. 글을 쓰는 지금도 당시 만난 활동가들의 넘치는 에너지, 상호간에 공유되었던 신뢰와 환대가 다시 생각납니다.

상존하는 성폭력 통념과 서비스 중심의 개입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미국의 성폭력 담론 역시 한국의 그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보였습니다. 미국은 부부강간이나 동성간성폭력, 데이트성폭력 등 성폭력의 외연이 우리보다 사회적으로 많이 확장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폭력피해자에 대한 비난 담론 역시 여전히 강고함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태도에 대하여 콜롬비아 대학의 한 활동가는 ‘피해자에게 문제를 찾는 순간 자신의 불안함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비난은 인간의 생존본능에 가까운 것’이라 진단하기도 했습니다. ‘아시아여성센터’의 한 활동가는 미국 사회도 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보수적이고, 사람들이 자신의 몸과 섹스에 대해 자유롭게 말하거나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한국에 열림터와 같은 성폭력생존자쉼터가 있다는 것에 놀라워하기도 했습니다. 성폭력생존자만을 위한 쉼터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스티그마(Stigma, 낙인)가 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인 것이지요. 성폭력피해에 대한 강고한 통념과 낙인 때문에, 이들은 담론의 변화나 성폭력 예방을 위한 근본적 문제제기보다는 성폭력피해자를 보호하고 피해 사실을 법적,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을 우선해서 다룰 수밖에 없는 듯 보였습니다.

물론 가해자 처벌과 피해자 보호만을 강조하는 최근의 경향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굳 셰퍼드’라는 가정폭력 피해자 지원기관에서는 범죄 프레임 중심의 성폭력 개입이 갖는 한계를 지적했는데요. 해답은 더 많은 경찰서, 더 강한 수사권, 많은 검사가 아니라, 커뮤니티 내에 취약한 어린이, 여성들에게 다가가는 것이라 보고 있었습니다. 아시아계 이주여성들에 대한 성폭력, 가정폭력, 성매매 피해를 지원하고 정책 이슈를 발굴하는 단체인 ‘아시아여성센터’ 역시 반성폭력 운동단체가 서비스 제공 중심으로 확대되고 있지만 지역사회의 통념을 바꾸어 나가는 것 역시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미국은 피해자에 대한 심리적 치유와 법적 보호 지원을 넓은 의미의 건강 이슈로 삼고 서비스 제공 중심의 개입을 확장해나가고 있는데요. ‘뉴욕시 반성폭력연합’ 역시 반성폭력 운동단체의 역할이 서비스 제공만으로 축소된다면 성폭력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가 어렵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관에서는 이와 같은 ‘공공보건’이라는 사회적으로 호소력 있는 패러다임을 활용하는 것이 반성폭력운동의 입지를 확보하고 펀딩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관련해서 한 가지 부러웠던 것은, 이 기관이 초동조치와 법적 조치를 함께 할 수 있는 법의간호사들을 트레이닝 시키고 그들에게 자격증을 부여하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전문직들을 훈련시키고 교육하는 전문 영역을 우리가 확보할 수 있다면 우리의 목소리를 사회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여지가 좀 더 확보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근 한국도 성폭력을 정의하는 권력이 심리학자, 정신의학자, 법률전문가 등에게 이양되고 있고 이러한 현상에 대한 비판이 많은데, 이러한 지점에 대한 고민이 지속적으로 필요한 것 같습니다.

반성폭력운동의 최근 이슈들

우리가 방문한 기관의 운영 방식과 각론은 조금씩 달랐지만, 이들이 진단하고 있는 문제나 미국 사회의 현재 분위기에 대한 논의들 속에서 몇 가지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이슈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 상대적으로 비가시화된 성폭력피해자의 목소리를 드러내기 위한 작업들이 생각보다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미국은 2011년 4월부터 정부(교육부)가 대대적 가이드라인 내놓으면서 대학 내 성폭력 해결을 위한 대학들의 강력한 대응을 지시하며 반성폭력운동의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관련해 백악관에서 테스크포스(TF)팀이 꾸려지기도 했다네요. 대학 내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한 대학생들의 전국적인 연대가 최근 마련되기도 했답니다. 또한, 젊은 세대들을 중심으로 지하철, 길거리의 성희롱 등 그간 간과되어온 일상적 성폭력에 대응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었습니다. 사건을 공유하고 가해자의 사진을 찍어 웹에 올리는 할러백(Holla back) 운동이 그 중 하나인데요. 사람들의 불안과 집단적 울분이 특정 가해자에 대한 비난으로 집중되는 것은 문제적일 수 있겠지만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젠더폭력의 실상을 특히 젊은 세대들이 공유하고 문제시하고 있다는 것은 신선해 보였습니다.

둘째, 다문화와 커뮤니티의 가치를 강조하는 미국의 특징과 관련된 것입니다. 교환학생, 외국인학생 혹은 아시안 등 소수인종의 집단거주지역 거주민에 대한 맞춤형 개입 방안이 활발히 강구되고 있었습니다. 집단주의적이고 폐쇄적인 커뮤니티의 특성으로 인해 피해자에 대한 더욱 강력한 스티그마(Stigma, 낙인)가 가동되거나 낮은 신고율을 보이는 것으로 설명되어온 이들 집단에 개입하기 위해, 해당 지역사회의 언론을 활용하거나 그곳의 학교, 대학과 연계를 맺거나, 지역 성폭력전담반과 소통하는 등 지역사회 기반의 개입 정책과 프로그램을 고안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자기 의사를 활발히 드러내지 않는 남아시아 그리고 중국계 한국여성들이 계급적, 언어적, 문화적 문제로 인해 더 주변화, 소외되고 있다고 보고 이들의 자존감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셋째, 성폭력을 젠더폭력의 일환으로 가시화시키려는 노력인데요. 가정폭력, 성폭력, 성희롱 등이 분리되면서 탈젠더화된 이슈로 다뤄지는 경향에 맞서, 가정폭력, 길거리 성희롱, 인종차별에 기반한 혐오범죄 등을 같이 다루는 젠더 저스티스(Gender Justice) 테스크포스(TF)팀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뉴욕시의 새로운 시장이 선출되면서 도입된 것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굳 셰퍼드’의 프로그램이 적극 인용되었고, 이 기관은 다른 운동단체들과 연대하여 구체적 대안 마련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범죄피해자 보호지원서비스를 제공해온 ‘세이프 호라이즌’은 그동안 형사절차, 상담, 사건지원 등을 원스톱으로 처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제안해왔는데 이것이 이번 시장이 선출된 직후 가정법원센터(Family Justice System)의 설립을 주도하는 성과로 이어졌다고 하네요. 검찰청을 방문했을 때 반성폭력 운동단체를 비롯한 민간단체 수십 곳이 일종의 리셉션 센터를 구축하고 있는 진기한 풍경을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가정법원센터였습니다. ‘세이프 호라이즌’의 관계자는 피해자들이 ‘모든 상황에서 접근 가능한 기관’이 되는 것을 이 센터 구축의 모토로 하였다고 했는데 성폭력뿐만 아니라 이와 연계된 일련의 폭력들에 대한 보호지원을 기대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성폭력, 성희롱은 가정폭력, 아동학대, 노동이나 인종 차별 등의 문제와 엄밀히 분리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잖아요? 이러한 문제들을 경험하고 있는 피해자들은 이곳을 방문해 자신에게 필요한 상담에서부터 신고수사절차를 바로 안내받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한계이자 기회?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성폭력이 사회적 이슈가 되는 방식 안에는 성폭력에 대한 두려움을 강조하고 보수적인 성 담론을 재생산하는 것과 같이 성폭력피해 극복을 오히려 가로막는 여러 가지 한계들도 존재합니다. 미국은 여론에 민감한 선출직 시장제도나 사법제도가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는 것이 지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조건이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의 강력한 반성폭력 의제 선정과 펀딩 확대에 기회가 된 측면도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현재의 상황을 ‘기회’로 활용하는 방식과 균형 잡기의 노력이겠지요. 국가로부터 지원받는 펀딩에 의존하여 서비스 제공기관으로 축소되지 않기 위해 새로운 성폭력 의제를 알리고 정책입안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노력, 전문 영역 확보를 위한 노력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성폭력이 떠들썩한 사회적 이슈로 소비되는 상황이 결코 ‘기회’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폭력에 대한 관심을 피해의 의미를 이해하고 피해를 극복하는데 유용한 기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담론을 흔들고, 어떻게 개입해야 할까요? ‘울림’이 해야 할 연구는 여기에 구체적인 밑천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어야 할 것이고,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없다면 어떤 연구도 힘을 얻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