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치는 몸, 운동하는 몸, 싸우는 몸
케이 |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난뛴다’ 참여자
“너는 운동은 안 돼.” 몇 달 간 열심히 수영을 배우다가 추운 겨울을 맞아 수영을 대체할 다른 운동을 고민하던 나에게 아빠가 확신에 차서 말했다. 스포츠 클라이밍을 시작해볼까 한다는, 나름 결의에 찬 진지한 얼굴 앞에서 아빠는 굳이 초등학교 3학년 때의 기억을 소환해냈다. 아빠와 내가 처음으로 축구공을 들고 잔디구장으로 놀러 나갔던 날 나는 아빠의 기대만큼 공을 ‘제대로’ 차지 못했다. 계속되는 헛발질에 실망한 아빠는 그 이후 나를 ‘운동신경 없는 애’로 규정지었고, 이후 나에게는 그 때의 평가를 만회할 기회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공을 가지고 놀아본 적 없는 아이가 축구장이라는 낯선 공간에서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능숙하게 공을 뻥 차는 것이 더 이상한 스토리 아닌가 싶지만. 아무튼 ‘운동신경 없는 애’라는 아빠의 평가는 유년기의 나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학교의 체육수업은 개개인의 흥미나 능력은 고려하지 않았고, 획일적이고 집단주의적 성격에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전에 ‘나는 운동신경이 없으니까 안할래.’, ‘나는 해도 안 되는데 뭐.’라는 패배의식이 앞섰다.
20대가 되어 여성주의자들을 만난 후에는 ‘운동하는 여자들’에 대한 선망이 생겼다. 어디에 가면 여자들끼리 축구하는 모임이 있다, 어느 캠프에 가면 여자들끼리 운동회를 한다, 이런 말들을 주워듣고는 나도 그런 곳에 섞여서 같이 땀을 흘리는 상상을 하곤 했다. 고백건대 나는 활동적인 성격이 아닌데다가 몸을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편도 아니지만, 여자들끼리 하는 운동회라니 그런 건 확실히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운동장을 지키고 서서 A부터 D까지 구르기 점수를 매기는 체육교사도, 사소한 교칙 위반에 대한 벌로 운동장 뺑뺑이를 시키는 학생주임도, 여자 반의 체육 시간이면 어떤 시선을 가지고 창문을 내다보던 남자애들도 없는! 그리고 언니네트워크 페미니즘 캠프에서 ‘그녀들의 땀 냄새’라는 이름의 운동회를 만났다. 타고난 운동신경에 대한 걱정, 타인의 시선에 의한 움츠림 없이 몸을 움직이는 경험이 얼마나 자유로운 느낌을 주는지 그때 나는 깨달았다.
이처럼 대단한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운동하는 삶을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운동에 대한 얕은 열망과 약간의 의무감은 ‘저질체력’이라는,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자기인식 앞에서 막혀버리기 일쑤였고, 운동을 하기 위해 시간을 내야 한다는 생각은 ‘잘 시간도 부족한데.’ 라는 말 앞에서 무력해졌다. 그렇게 하루하루 특별한 운동 않는 일상을 살며 어쩌면 내 삶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몸을 움직이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는, 사이비 의사 같은 진단을 스스로 내렸을 때쯤 대찬 호랑이 사진이 박힌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웹자보가 내 눈에 들어왔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과 동시에 수영강습에 등록하며 나는 ‘삶의 변화’를 이루어보고자 하는 거대한 포부를 품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은 삶의 반경을, 행복의 가능성을 넓히는 일임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던 걸까.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을 시작하며, 나는 3개월의 훈련을 통해 몸을 움직이는 것에 좀 더 편안함을 느끼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몸이 지나간 흔적을 남기지 않을 것을, 특정한 공간 안에서 최소의 지분만을 가질 것을 교육 받으면서 어느덧 내 몸 안에 각인되고만 규칙들을 느슨하게 풀어둘 수 있는 시간이 된다면 좋을 것 같았다. 몸·소리 워크숍, 체력훈련, 기술배우기 프로그램을 통해 내가 경험한 것은 주먹을 세게 쥐고 집중하는 순간의 낯선 긴장감, 학창시절에는 연습보다는 포기를 선택하곤 했던 그 ‘뒤구르기’를 성공한 순간의 환희, 한여름 땡볕에 달궈진 본격 유도도장에서 줄넘기, 태권도, 맨몸운동들을 연습하며 겪은, 움직이는 내 몸에 대한 느낌들이다. 내가 어떻게 구르든 몇 번을 실패하든 잘했다고, 다시 한 번 해보자고 말해주신 강사님과, 서로 북돋우며 같이 운동하던 동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경험이었다. 나에 대한 재발견과 더불어 같이 운동하는 재미에 빠져들 때쯤 프로그램은 끝이 났다. 함께 마니산에 올라 정상에서 도란도란 도시락을 꺼내먹었던 기억도, 후기발표회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날렵민첩상’, ‘조용한존재감상’, ‘포토제닉상’ 등의 상장을 수여받던 기억도 벌써 새록새록하다.
소식지에 후기를 써보지 않겠냐는 전화를 받고 ‘저 요즘 운동을 못하고 있어요.’ 라는 말을 변명하듯 꺼냈다. 후기발표회에서 ‘운동을 하면 인생이 바뀐다’는 사기성 풍기는 멘트를 던지고, 자신감이 뚝뚝 묻어나는 말투로 ‘이제는 어떤 운동도 시도해볼 수 있을 것 같다’는 다짐을 했던 것과는 달리, 추운 날씨와 떨어지지 않는 감기를 핑계거리로 삼으며 새로운 운동을 아직 시작하지 못한 지금의 상태가 조금 민망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에는 전혀 내 것이 아니었던 ‘운동’이라는 키워드가 점점 익숙해져가고 ‘부족한 운동신경’과 ‘저질체력’을 넘어 새로운 시도들을 해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로서는 굉장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괜스레 겁먹거나 움츠러드는 것 대신, 부당한 상황에서 할 말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이불을 걷어차는 것 대신, 일상의 공간 속에서 내 목소리를 좀 더 크게 내고 불가피한 갈등과 싸움은 감당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내게는 주먹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 케이_수영이 좋아서 수영선수가 되고 싶은 페미니스트 사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