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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 폭력은 정말 나의 문제가 아닐까?
  • Albina (본 상담소 회원)
성문화읽기 ①

데이트폭력은 정말 나의 문제가 아닐까?

Albina (본 상담소 회원)

나는 25살 이후부터 비연애주의자이기로 다짐했다. 과거 파트너의 성차별적 언행에 실망하고 상처받았던 경험이 있었지만, 그 이후로 나는 데이트를 한 적이 없었다. 세상에는 데이트 외에도 훨씬 재미있는 일이 많았고, 삶의 방식이 연애와는 무관한 궤도를 그렸다. 그래서 정말 솔직한 심정으로는 ‘데이트 상황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에 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데이트, 연애, 섹스, 사랑 등의 문제와 나 사이엔 꽤 큰 벽이 있었다. 나름대로 오랫동안 페미니즘을 공부했고 성폭력에 관한 다양한 담론과 쟁점들을 접했지만 결국은 나의 이슈가 아니라고 생각해 왔고 ‘나’의 문제가 아닌 쟁점에 깊게 관심을 가지거나 공감하기 어려웠다. 나는 1960년대~1980년대 미국 대학과 사회 전반의 친밀한 관계에서의 성폭력(Acquaintance Rape)를 다룬 로빈 월쇼의 보고서를 보면서 피해자와 자신은 무관하다며 의식적으로 방어 태세를 취하는 여성 배심원의 입장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처음 데이트폭력에 관한 글쓰기를 시작했을 때 어디부터 운을 떼야 할 지 몰랐다.

하지만 곰곰이 떠올리다 보니 성폭력 치유 담론들이 개인의 사생활에 관한 분석이 아닌 사회의 통념에 도전하는 공동의 해결 과제로서의 역할을 맡아 왔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비연애주의자이기 때문에, 내가 연애를 하지 않기 때문에 데이트폭력이 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큰 착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언제 내 주변의 사람들이 비슷한 문제를 겪게 될 지 알 수 없으며, 주변인들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그건 내가 잘 모르기 때문에 도와줄 수 없어’라고 외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젠더사이드와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이 노골적으로 만연하고 여성 살인과 혐오가 일상적 사건에서 ‘사회 문제’로 격상(?)된 시대에 오히려 어떤 식으로든 모든 종류의 위기 상황에 일정 수준의 지식을 갖추고 대처하는 연습을 하는 것은 나의 사적인 데이트 여부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솔직한 심정으로 내 문제가 아닌 것을 ‘나’의 문제로 직접 인식하기까지는 많은 연습과 생각의 깊이가 필요하지만, 어쨌든 내가 데이트폭력에 관한 문제를 떠올리기 위해서는 ‘그게 정말 내 문제가 아닐까?’ 라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책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표지

로빈 월쇼의 보고서에는 현재의 데이트폭력 문제에 적용할 수 있는 조언도 있었고 그럴 수 없는 조언도 있었다. 책을 읽으며 1970년대에 비해 아는 사람에 의한 성폭력의 양상들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받았고, 한편으로는 주마다 법률이 달라 다양한 판례를 남기며 입법자들과 시민들이 공동체 의식을 갖고 개선되어 나갈 여지라도 있는 미국의 사법체계가 한국과는 많이 다르다는 생각도 했다. 또한 항상 동일한 법률 속에서 엇비슷한 해석을 적용해야 하는 한국 상황 속에서 입법자와 시민의 공동체 의식을 통한 개선은 너무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또한 제 3자의 대처 방법에 관해서도 피해자에게 어떤 도움을 주려고 노력한다는 조언보다는 일단 ‘성폭력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성폭력에 관한 어떤 통념들을 갖고 있었는지’ 사람들이 알게 하는 게 우선이라고 보였다.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그렇다. (판례 속에서 ‘희생양’이 되어 간 여성들도 숱하게 많았다는 점이 아이러니다)

예를 들면 이 책에는 끊임없이 거구의 가해자와 작은 체구의 피해자 사례가 등장하지만 피해자를 위한 매뉴얼에는 공격을 하라거나 도움을 청하라는 말이 있었다. 그에 반해 제 3자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의료적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돕거나 피해자가 자신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제3자들은 위로의 시간을 갖는 사이에 가해자가 증거를 인멸하거나 고소한 피해자를 역으로 공격할 상황을 시뮬레이션으로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피해자에겐 더 큰 고통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도 항상 열어두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피해자가 먼저 도움을 청하지 않는 이상 정황상 갑자기 나서서 도움을 주기 어려울 수도 있다. 더불어 상담가들은 누구보다도 그런 여성들이 가해자를 공격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 결국 제 3자가 맨 처음 해야 할 일은 의료 체계, 법 체계, 성폭력 고소의 행정 절차에 관해 평소 자세하게 숙지해 놓고 실제 상황이 일어났을 때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중하다는 것은 사례에 따라 얼른 피해자가 병원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일 수 있고, 피해자가 자신의 상황을 말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혹은 피해자의 옆에서 같이 울어주는 게 신중한 방법일 수 있다. 피해 문제를 ‘내 문제’로 인식한다면 도움을 준다는 생각보다는 조금 더 생각을 하고 행동에 옮기려 하는 태도가 우선이어야 할 것이다. 무엇이 신중한 태도인지는 잘라서 정의할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피해의 문제를 피해자의 앞에서 조금 더 ‘생각’해 주는 것이다.

책에 실린 사례들을 보면 여성들은 이 상황에서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가해자가 ‘일을 끝낼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담가가 피해자에게 할 수 있는 말 중 하나는 항상 ‘공격할 수 있는 자신’을 만들라는 것은 아이러니다. 데이트 폭력은 가장 무방비한 상태에서, 생각지 못한 상황에서 번번이 이루어진다. 사례는 복잡하지만 항상 대처 방법에 대한 결론은 단순하다. 상냥하고, 남의 말을 잘 들어주고, 쉽사리 거절할 수 없도록 키워지는 수많은 소녀들에게 좀 더 강하고 분명한 의사를 전달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가장 ‘나은 조언’일 수 있다. 또한 여자 아이들을 더욱 나약하고 도움이 필요한 존재로 키워내는 사회 분위기 전반을 바꾸어 나가기 위한 비판담론의 초석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가장 ‘나은 조언’이 과연 위기에서 벗어나게 만들어줄 수 있을까? 제 3자들은 가장 나은 방법이 뭔지 안다고 해도 현실적으로는 피해자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생각으로 노력하기보다는 피해자가 현실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면서 ‘조심’할 수밖에 없다. 책을 읽으며 나는 제 3자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피해자에게 섣불리 도움을 주려고 접근하거나 피해자 처지에 있다는 이유로 쉽게 동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여겼다. 대신 피해자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어떤 도움을 청하려 하는지 귀를 기울이고 경청해 주는 것이 피해자를 바라보는, 그리고 성폭력 피해자를 바라보는 가장 현실적인 시선이리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