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무고를 두려워해야 하는가”
<성폭력 가해자의 역고소에 대한 피해자의 반격>
정화_나눔터 기자단 Meka 1기
올 초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성평등한 사회를 위한 성폭력 판례뒤집기’(이하 판례뒤집기) 기획단을 모집한다는 메일 한 통을 받았습니다. 저는 바로 기획단에 참여하겠다고 답장을 했고, 이 선택은 올 한 해 동안 제가 가장 잘한 일 중 하나입니다.
‘성평등한 사회를 위한 성폭력 판례뒤집기’는 매년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진행하는 큰 행사 중 하나입니다. 상반기에는 모의법정을 하반기에는 토론회를 진행합니다. ‘모의법정’은 현재 성폭력 판례에 대한 비판과 이상적인 법정의 모습, 판결문을 보여주는 취지로 만들어집니다.
올해 2월 27일 판례뒤집기 기획단은 처음 만났습니다. 서로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활동가 앎을 중심으로 총 6명의 기획단은 수줍은 첫 회의를 마쳤습니다. 모의법정의 주제를 잡는 것부터 배역을 섭외하는 일까지 모든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기획단은 저마다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판례와 기사의 목록은 많아졌고 기획단의 토론은 뜨거워졌습니다. 주제를 잡기 위해 성폭력 관련 판례와 기사를 읽으며 분노하기도 했고, 서로의 경험을 나누며 공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정해진 주제는 무고죄와 대학 내 성폭력. 기획단의 대부분이 대학 내 성폭력 주제에 특히 공감했습니다. 또한, 한창 뜨거운 주제인 무고죄도 꼭 다뤄야겠다는 욕심에 모의법정에 대한 열의는 커졌습니다.
매주 1회씩 하던 회의가 2회로 늘어나면서 모의법정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느낌에 초조하기도 했습니다. 각각 모의법정의 배역을 맡고 대본 초안을 작성하고 판결문을 쓰며, 우리는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고 싶었습니다. 기획단은 ‘과연 모의법정을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함에 마음이 조마조마했고, 담당자인 앎은 모의법정을 망치는 악몽을 꾸기도 했다고 합니다.
판례뒤집기 당일, 모의법정은 이화여대에서 열렸습니다. 법원의 모습이 재현된 곳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활동가와 기획단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벅찼습니다. 시간이 임박할수록 방청석이 채워지고 제 머리는 하얘졌습니다. 몇날 며칠을 달달 외운 대사가 생각나지 않고 대본의 글씨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오프닝 영상과 함께 영화처럼 재판이 열리고 검사와 변호인의 공방이 펼쳐지면서 저도 방청객이 된 듯 재판에 몰입했습니다.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피고인을 째려보기도 하고 피해자의 증언에 가슴이 울컥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증인인 제 차례가 다가왔을 때, 저는 눈앞이 깜깜했습니다. 제가 의지할 곳은 미리 만들어 놓은 컨닝페이퍼용 대본 한 장밖에 없었습니다. 머릿속에는 어떻게 티 나지 않게 컨닝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막상 증인석에 앉자 정말 검사와 변호인처럼 연기를 해주는 주미와 민지 덕분에 저도 피해자의 친구가 된 것처럼 대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재판이 막바지에 달하면서 방청객의 열기는 더 뜨거워졌습니다. 검사와 변호인의 최후변론, 피해자 변호사의 최후변론, 그리고 피고인과 피해자의 최후변론까지. 피고인은 최후변론에서 자신의 잘못은 “남자로서 성욕을 참지 못한 것”이라는 발언을 함으로써 방청객을 웃게 만들었고, 피해자는 최후변론에서 자신의 고통을 호소함으로써 방청객을 울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성황리에 막을 내린 모의법정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아직도 많은 성폭력 사건들이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성폭력 생존자들이 소송하기까지 어려움도 따르고, 소송 중에 오히려 무고죄로 역고소를 당해 더욱 힘든 상황에 빠지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법원에서 가해자의 편을 들어주는 판결은 성폭력 생존자를 더욱 움츠리게 합니다. 이번 모의법정을 통해 사회에서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그 해결을 위해 힘쓰길 바랍니다.
판례뒤집기 기획단에 참여하게 된 것은 제게 큰 행운이었으며 제 삶에 한 지표가 되었습니다. 항상 성폭력 문제와 싸우는 한국성폭력상담소에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모의법정을 함께 한 기획단 예은, 민지, 주미, 채린과 앎 활동가에게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