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기 성폭력전문상담원교육
함께 한 100시간을 돌아보며
세린_나눔터 기자단 Meka 2기
지난 29기 성폭력전문상담원기본교육을 돌아봅니다. 당시 저는 청년젠더활동가라는 이름으로 잠시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상담소의 활동가인 선민, 신아님과 함께 교육을 준비하고 또 이수할 수 있었습니다. 교육을 준비하면서 자료집을 편집하고, 강의실에 걸어둘 현수막을 뽑고, 주변 식당 목록을 만드는 일 등을 했는데, 이런 일을 하는 동안 교육과정에 대한 기대가 점점 커졌습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35명의 수강생들이 이안젤라홀에 모였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성폭력 관련 교육을 100시간이나 받으러 찾아오는 걸까 궁금했습니다. 평일을 꼬박 투자하려면 꽤 큰 각오가 필요하니까요. 오리엔테이션 때 자기소개를 했는데, 모인 분들이 참 다양했습니다. 상담사로 일하는 사람도 있었고, 퀴어 운동에 참여하는 활동가, 대학 내 성폭력 사건 해결에 관심을 가진 대학생, 이제 막 변호사로 일하기 시작한 분도 있었습니다. 저마다 다른 동기를 가진 사람들과 서로 잘 어울리며 교육을 마칠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수강생들 사이에 어색함을 감출 수 없었던 순간도 있었고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걱정은 점차 사라졌습니다. 조별 모임 수업이 있는 날이면 늘 평가서에 "시간이 너무 모자랐어요!"라는 말이 가득했습니다.
다른 성폭력 관련 교육이 모두 여성주의 관점을 잘 반영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은 교육을 수료한 뒤에 알았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우리 상담소에서의 상담원 교육은 여성주의를 참 많이 강조했던 것 같습니다. 교육 초기에는 여성주의의 역사, 한국 남성의 남성성, 젠더 감수성 등 여성주의 전반에 대한 강의가 많았습니다. 강의실을 카리스마로 휘어잡았던 변혜정 선생님의 강의가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성폭력, 피해자, 가해자, 공동체 같은 말들의 뜻을 깊이 알기 위해서는 이런 기본기가 필요했을 겁니다. 우리 상담소 부설 연구소 울림의 김보화 책임연구원은 강의에서 흔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성폭력 관련 개념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교육에서는 성폭력 '상담원'이라는 이름보다는 '지원자'라는 말을 썼습니다. 기본교육인 만큼 교육을 받더라도 바로 상담원으로 일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되는 '지원자'가 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러려면 성폭력과 관련한 법과 제도를 알아야하고, 전국 각지의 성폭력상담소, 응급 진료를 받을 수 있는 해바라기센터, 임시 보호시설과 같은 지원 체계를 알아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칫 단순한 정보로만 늘어놓을 수 있는 내용인데,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김미순 상임대표가 각 기관의 실질적인 운영이나 지원 체계의 변화 과정까지 자세히 설명해 주셔서 좋았습니다.
이번 교육에서 가장 크게 얻은 것은 제가 가지고 있었던 성폭력과 피해자에 대한 통념을 발견하고 그것을 깨뜨린 일입니다.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성폭력은 실제 발생하는 모습과는 다릅니다. 그 속에서 마주치는 피해자의 모습 또한 다릅니다. 아동 성폭력, 학내 성폭력, 성소수자에 대한 성폭력, 가정폭력, 성매매 과정에서의 성폭력, 장애인에 대한 성폭력, 친족 성폭력, 직장 내 성폭력, 공동체 내 성폭력, 그리고 최근 큰 이슈가 되고 있는 사이버성폭력까지 다양한 성폭력의 유형을 이해하는 것은 사회 곳곳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답답한 현실을 마주하는 것은 힘든 일이라 때로는 강의실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자기방어훈련이나 댄스 테라피, 여성주의 상담을 함께 하는 동안 서로를 다독이는 것이 얼마나 든든한지 알았고, 생존자의 숨은 힘을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순간마다 수강생 간의 유대도 더욱 깊어졌습니다.
교육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꼽으라면, 수강생들과 재판을 보러 법원에 갔던 때를 뽑고 싶습니다. 여성 청소년에 대한 성구매로 기소된 피고인에 대한 재판이었습니다. 작은 법정의 방청석이 수강생들로 가득 찼습니다. 검사가 기소 근거로 제시한 범행 수법에 수강생들은 함께 분노했습니다. 교육에서 수사·재판 절차에 대해 배운 것들을 되짚어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폭행·협박이 동반되었을 때에야 법이 성폭력으로 인정해 주는 한계나 2차 피해, 역고소의 위험은 수업을 마무리하는 날까지 함께 답답해했습니다.
교육과정이 마무리되고 시간이 꽤 흐른 지금, 29기 수강생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이번 기수에서는 강의 시간 말고는 수강생들끼리 따로 모임을 갖거나 하지 못해 못내 아쉬움이 남습니다. 몇몇 분들과는 강의 이후에도 여성폭력과 관련한 행사나 시위에서 우연히 만나 반가워하기도 했습니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자기의 역할을 하다가 필요한 곳에서 다시 만나는 순간을 기대해봅니다. 교육과정 이후에 더 깊어진 고민과 질문을 잊지 않으면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