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를 잡은 사람들
노경현, 홍수진_2017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 기획단
올해로 15년째를 맞은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이하 ‘말하기대회’)는 이 시대의 ‘생존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음악, 언어 등으로 다양하게 청중들과 공유하고 연대와 지지의 시간을 갖는 행사였습니다. 이번 행사에서는 < , 마이크를 잡다>라는 이름처럼 행사에 참여한 사람이면 누구나 마이크를 잡고 말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대부분 생존자라는 뜻을 담은 것입니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을 나눴던 지난 행사와는 다르게, ‘열린 말하기’ 시간을 두어 말할 준비를 미리 한 ‘이끔이’들뿐만 아니라 청중들도 마이크를 잡고 말할 수 있도록 하여 많은 분들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만약 한 여성이 자신의 삶에 대해 진실을 털어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세상은 터져버릴 것이다.”1
- 미국의 여성 시인 뮤리엘 루카이저 (Muriel Rukeyser)
말하기대회는 여느 행사보다 세심하게 정성을 기울인 행사입니다. 경험을 ‘말하지 못함’을 겪은 사람들이 ‘말을 할 수 있음’은 매우 큰 변화입니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 변화를 겪으며, 함께 하나의 유리장벽을 뚫고 나가는 듯한 심리적 충격을 얻을 수 있습니다. 좀더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여러 차례 회의를 열고 기획을 이모저모 따져보았습니다. 행사를 기획하고 준비하는 동안 개인적인 경험이 알고 보면 억눌린 사회의 단면이라는 사실은 제게도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저희는 어떤 행사의 기획단을 하든지 행사 날짜가 다가올수록 불안에 떨곤 합니다. 이유는 그때마다 비슷하지만 다르기도 합니다. 이번엔 두 가지의 가능성이 저희를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첫 번째로는 “열린 말하기” 시간에 ‘부적절한’ 발언을 막지 못해 행사에 참여한 생존자들이 분노하거나 상처를 받게 될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걱정이 되어 ‘말하기 전에 생각했나요?’ 라는 팻말을 미리 준비해둘까 하는 고민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참여자들이 행사장에 들어가기 전에 설문지에 답을 하도록 하여 사상 검증(?)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말하기대회의 분위기가 참여자들에게 안전하다는 느낌을 주지 못해서 어느 누구도 말하려 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불길한 예감은 왜 항상 틀리지 않는 건지, 열린 말하기 시간에 한 참여자가 “피해자였던 사람이 자신을 떠났는데 내가 뭐가 문제였는지”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이어진 이끔이들의 말하기에서 그 참여자의 눈물이 자기연민에 불과하다는 의견을 나누며 저희는 굉장히 분노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말하기’를 준비한 것이 아니었는데 어쩌면 그렇게 자기 생각만 하고 행동하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불편해 하고 분노를 느꼈을 겁니다. 앞으로의 말하기대회에서는 미리 어떠한 취지들의 발언은 삼가달라고 공지했으면 합니다.
앞의 일을 제외한다면, 말하기대회는 성공적으로 진행됐습니다. 준비했던 다과는 순식간에 동이 났고, 참여자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듣기에 집중했습니다. 이끔이들의 말하기는 담담하면서도 폭발적이었습니다. 조용히 천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 공간을 모조리 휘어잡고는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참여자들의 머리 위로 반짝이며 쏟아져 내리는 듯한, 말 그대로 불꽃같은 말하기였습니다. 조명이 어두운 앞자리에는 다양한 표정의 참여자들이 보였습니다. 이끔이들이 용기를 내어 하는 아픈 말에 우는 사람, 재미있는 표현에 웃는 사람, 두 손을 꼭 모은 채 눈을 감은 사람... 저희가 준비한 말하기대회의 무게감을 강렬하게 느꼈고, 저희 역시 오랫동안 눌러왔던 상처를 위로받는 듯하여 울컥해지기도 했습니다. 정말이지 모두가 말하고 싶어 했고, 듣고 싶어 했던 날이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살아 있다”2
한 이끔이가 마이크를 잡고 했던 이 말이 저희를 안아주는 것 같았습니다. 살면서 언어의 힘, 말하기의 힘에 대해서는 수도 없이 들어왔지만, 이렇게 강렬하게 다가온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감정과 경험이 언어가 되어 단단해지고, 입 밖으로 나와 사람들을 움직이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좀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기의 힘을 느껴봤으면 좋겠습니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저희처럼 함께 분노하고 함께 슬퍼하며, 힘과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고 연대하고 손을 잡아준다면 지치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말하기는 계속될 것이고, 어느 누구도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 덕분인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전혀 춥지 않았습니다. 핫핫!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