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울림의 연말정산
역고소와 사이버성폭력 사이에서
신아 | 본 상담소 부설 연구소 울림 연구원
2017년에 연구소는 가해자 교육과 관련된 연구 세미나를 진행하거나 반성폭력 이슈리포트를 펴내는 등 여러 활동을 했지만, 이번 연말정산에서는 굵직한 두 개의 프로젝트 - 사이버성폭력 피해자 지원을 위한 안내서와 성폭력 역고소 피해자 지원을 위한 안내서 제작 - 를 되돌아보려 합니다.
2015년 이후 온라인은 성폭력과 페미니즘 담론, 여성들의 말하기로 뜨거웠습니다. 아울러 사이버성폭력에 관심을 갖고 대응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많아졌고, 저희 연구소도 서울시,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와 함께 『사이버성폭력 피해자 지원을 위한 안내서』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사이버성폭력은 촬영/(재)유포/성적합성/사이버불링을 포함하여 온라인 공간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을 통틀어 일컫는 말입니다. 물리적인 성폭력, 성매매, 협박갈취 등으로 이어지거나 중복피해가 생겨나기도 합니다. 여성, 성소수자, 청소년들은 더 쉽게 성폭력의 대상이 되며, 온라인 공간에 친숙하고 사용이 잦을수록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사회적으로 문제의식이 높아지면서 정부차원에서 대응책을 만들고는 있다지만, 피해자들을 만나보면 아직은 문제해결과정에서 피해자가 스스로 감당해야할 몫이 너무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떤 피해자는 SNS에서 사진 유포피해를 입어 신고하면서 담당 경찰에게 SNS 사용법부터 알려주어야 했다고 합니다. 경찰이 사이버성폭력 수사에 무능한 것이지요. 어떤 피해자는 삭제지원단체를 몰라서 며칠 밤에 걸쳐 스스로 영상물 키워드를 찾아내어 신고해야 했다고 합니다. 사이버성폭력 피해자 지원 단체는 다른 단체와 달리 '삭제지원'을 가장 큰 일로 삼고 있습니다. 피해자 혼자 영상을 찾거나 비용을 들여 지우는 일이 매우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이버성폭력을 통해 이윤을 챙기려드는 장사꾼들과 소비자들이 여성의 몸에 대한 착취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현실에 분노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긴 여정을 함께한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활동가들과 서로 배우고 연대하는 시간을 가져서 좋았습니다.
한국여성의전화와 함께 여성가족부 공동협력사업으로 『성폭력 역고소 피해자 지원은 위한 안내서』를 제작하며 기억에 남았던 몇 가지가 있습니다. 연구진의 문제의식은 처음부터 뚜렷했습니다. 성폭력 수사 지침대로 수사하지 않는 사법기관, 수사관의 통념, 가해자의 위협과 협박, 왜곡된 언론보도와 같은 문제들이었습니다. 성폭력 역고소 사건에서는 피해자에 대한 수많은 의심과 그릇된 통념이 '혐의'를 밝힌다거나 '수사'라는 이름 아래 마구 드러납니다. 더 이상 언론, 수사기관이 피해자가 '진실'을 말하는가에 초점을 맞춘 채 마음대로 의심하지 못하게 하고, 역고소 사건의 진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11월의 어느 회의에서는 가해자들의 마구잡이 역고소가 이제 '보편적'인 행동이 되었고, 성폭력 피해자는 도리어 피의자/피고인이 되어 전혀 다른 세팅에서 싸움을 시작하게 된다는 사실을 두고 토론했습니다. 성폭력 역고소는 거대한 백래쉬의 일부이며, 지금의 사법시스템은 성폭력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고,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피의자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가해자들은 '법'을 이용해 거리낌 없이 보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복잡한 역고소 재판에서 피해자가 최소한으로 방어하고 최대한 이기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제도와 권리를 조사하여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피해자임을 부정당하더라도 당당하게 피해자임을 잊지 말자고 말하고 싶었고요.
성폭력 역고소 피해자 지원 매뉴얼은 200명이 넘는 시민들이 신청해주셨는데요, '하고 싶은 말'과 '신청이유'에 많은 사연들을 써주셨습니다. "성폭력 고소 중인데, 역고소 위협을 받고 있다/대비하고 싶다", "가해자의 역고소 위협으로 신고를 하지 못했다", "가까운 친구가 역고소 당했을 때 아는 게 없어 도와주지 못했는데 또 비슷한 일이 생긴다면 그때와 달리 대응하고 싶다", "공부하고 싶다", "더 잘 지원/상담 하고 싶다".. 등 여러 사연을 보면서 이 안내서가 어떤 분들에게 가닿았는지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한 해 동안 조금은 새로운 지도를 그려봤기 때문에 연구소 활동가들도 많이 성장한 것 같습니다. 내년에도 새로운 질문으로 과제를 만들고 연구해나가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