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임신중단권을 위해 싸우는 우리에게
세린 _ 나눔터 기자단 Meka 2기
낙태죄를 폐지하라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나날이 뜨거워지는 요즘이다. 12월 2일에는 여성의 임신중단권을 주장하는 검은 시위가 1주년을 맞아 다시 열렸고, 낙태죄 폐지와 미프진 합법화를 요구하는 국민청원에 23만명의 청원이 모였으며 이 청원 운동에 청와대가 직접 응답하기도 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도 여성단체들과 함께 낙태죄 폐지 운동에 힘쓰고 있다. 이번 공동체 상영도 이런 뜻에서 기획되었다. <파도 위의 여성들>에는 낙태에 관해 몰랐던 많은 지식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싸우는 과정에서의 상상력과 용기를 잘 드러낸 영화이기도 했다. 지금 낙태죄 폐지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과 함께 이 영화를 나누고 싶다.
우리는 흔히 낙태 시술을 생각할 때 자궁 내벽을 긁어내는 '소파술'을 떠올린다. 하지만 임신 중단의 방법은 이밖에도 다양하다. 임신 초기에는 미프진과 같은 약으로도 임신중단을 할 수 있다. 편리하고 부담이 덜한 방식이고, 낙태가 불법이 아닌 국가에서는 이미 널리 이용되고 있다. 하지만 낙태가 불법인 곳에서는 의사가 여성에게 미프진을 처방할 수 없다. 낙태 시술도 합법적으로 할 수 없다. 이런 곳에 사는 여성은 비싸고 안전하지 못한 불법 시술을 받아야 한다. 심지어 옷걸이나 나뭇가지 따위를 사용하거나 배를 때리기도 한다.
<파도 위의 여성들>은 이런 현실 속에서 낙태하려는 여성들을 지원하는 단체인 'Women on Waves'가 해온 싸움을 담아낸 다큐멘터리이다. 이들은 낙태 불법 국가의 여성들에게 미프진을 제공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이들은 배를 이용했다. 낙태가 합법화된 네덜란드의 배에 낙태 불법 국가의 여성을 태워 공해(公海)로 갔다. 어떤 국가의 소속도 아닌 바다에서 임신한 여성에게 미프진을 제공했다. 이 처방은 낙태 합법 국가의 배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국제법상 합법이다. 이들은 인터넷도 이용하고 있다. Women on Web (www.womenonweb.org)이라는 사이트를 열어 낙태 불법 국가의 여성들에게 미프진을 보내준다. (우리나라에서도 신청할 수 있다!) 자기가 먹으려고 소량의 약을 갖는 것은 많은 국가에서 합법이기 때문이다. 한편 각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미소프로스톨만으로도 80% 확률로 낙태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낙태 불법 국가의 여성들에게 알리기도 한다.
이들의 싸움이 쉬울 리 없다. 하지만 답답한 현실만이 영화에 가득하지는 않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세상에 맞설 때 느낄 수 있는 유쾌함, 엉뚱한 상상을 현실로 만들었을 때의 쾌감을 상영하는 내내 함께 느낄 수 있다.
이 영화에서는 세계 각국의 여성이 놓인 현실을 볼 수 있다. 임신중단권이 보장되지 않은 국가는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좀더 선진적일 것 같은 유럽 국가들도 그렇다. 영화 속 아일랜드, 폴란드, 스페인과 같은 나라들은 가톨릭의 영향으로 낙태가 더욱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Women on Waves는 국경을 넘어 싸워왔다. 낙태죄 폐지를 위해 싸우다 지치고 고립되었다고 느꼈을 때, 같은 어려움을 겪고 또 이겨냈을 이들을 생각하며 힘을 냈으면 한다.
영화 속 활동가들의 의연한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Women on Waves의 활동은 예상대로 많은 저항에 부딪혔다. 영화에서는 조직적으로 낙태 반대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여러 차례 나온다. Women on Waves의 배가 항구에 들어서자 한 목소리로 "잘 왔다, 나치들아!"를 외치는 남성들은 너무나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활동가들은 오히려 대담하게 얼굴을 드러내고 생방송에 나가 미소프로스톨을 이용한 낙태 방법을 말해버린다. 유명 관광지의 성모상을 점거하고 낙태 상담 전화번호를 적은 현수막을 걸기도 한다. "반발에 대한 두려움은 자기검열의 다른 이름이다"라는 이들의 말은 우리에게도 용기가 된다.
영화에 나오는 언론의 모습도 한국만큼이나 답답했다. 어처구니없게도 기자들은 활동가들의 낙태 여부를 궁금해 했다. 프로젝트를 접어야 했을 때 "당신들이 얼마나 많은 여성들을 실망시킨 지 압니까?"라는 말 같잖은 질문을 하기도 했다. 이런 질문들이 어떻게 고통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활동가들은 무릎 꿇지 않고 서로에게 직접 그런 질문을 던져보면서 언론 대응을 연습했다. 답답한 현실에 맞서는 스스로의 힘을 기르는 모습이 마치 자기방어훈련을 할 때 같았다. 한편, 위협적인 순간에도 함께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도 언론에 흔들리지 않는 방법인 것 같다. 이를테면, 낙태 반대 세력이 Women on Waves의 배에 오르는 여성의 사진을 찍어 폭로하겠다고 했던 위협적인 순간에 그 사람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께 배에 오르겠다고 자원한 여성들이 있었음을 기억한다거나.
공동체 상영에서 이유림님과 윤정원님이 다 같이 말한 내용이 있다. 낙태죄는 낙태가 윤리적으로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몸에 대해 여성 자신이 아닌 국가가 판단하고 심판할 권한을 가져도 되는가를 문제 삼는다는 것. 또 임신중절은 '선택할 권리'이기에 앞서 여성의 건강권과 알 권리의 문제라는 것이다. 당연한 권리를 위해 싸우는 우리가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때로는 검은 옷을 입고 거리에 나서고, 때로는 페미당당의 '미프진 자판기'가 곳곳에 설치된 미래를 상상하면서, 또 임신중절을 둘러싼 사연은 저마다 달라도 알고보면 우리 모두 함께 이어져 있음을 알아가는 시간. 그 시간의 끝에 낙태죄 폐지를 기뻐하는 날이 기다리고 있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