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 중심적 양형기준 판단에 맞서는
감경후원 대응기
닻별 | 사무국 활동가
"한국성폭력상담소를 후원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요, 혹시 성폭력 관련 수사/재판을 받고 계신가요?"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후원회원분들 중, 비교적 최근에 후원을 시작하신 분들은 이런 전화 한 번쯤은 받아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많은 후원회원분들을 당황하게 한 이 멘트, 듣는 사람도 당황스럽고 하는 사람도 어려운 말입니다. 성폭력이 이 세상에서 뿌리뽑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혹은 성폭력 피해생존자를 조금 더 지원할 수 있도록 시작한 '선의의 후원'을 의심하는 말이니까요.
나눔터 84호에 실린 '불편한 후원'에도 살짝 언급되었지만, 후원 업무를 맡게 된 지 1년이 지난 지금도 저에게 가장 어려운 업무는 '후원목적 확인차 전화하기'입니다. 우리 사회가 더 좋은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매번 의심해야 하는 상황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적응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상담소처럼 회원들의 후원금으로 운영되는, 정부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해 재정 독립성을 일정 수준 이상 꾸준히 유지하고자 하는 시민단체의 경우에는 더욱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현재 상담소의 상황을 들어보시면 왜 이런 부담스러운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지 이해하실 거예요.
한국성폭력상담소는 포털사이트에 '성폭력'을 검색했을 때 가장 먼저 나오는 피해자 지원기관입니다. 그 덕분에 '성폭력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한국성폭력상담소의 목소리에 동참해주시는 분들도 많이 만났지만, 성폭력 가해자의 감경 목적 후원도 가장 많이 들어옵니다. 2019년에만 23명, 2020년 2월까지만 13명의 가해자 및 가해추정인이 상담소로 후원을 시도했다가 적발되었습니다. 가해자 본인이 후원하는 경우도 있지만, 가해자의 가족이나 가해자를 변호하는 로펌에서 후원을 요청하는 경우도 꽤 적발되고 있습니다. N번방 사건이 본격적으로 기사화된 올해 3월부터는 감경 목적의 후원도 일반 후원자만큼이나 늘었습니다.
상담소에서 모든 가해자의 후원을 거절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수사/재판 과정이 끝났거나, 피해자와 합의 조건으로 후원하는 경우에는 피해자의 확인을 거친 후 후원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가해자는 감형을 목적으로 후원을 시작했다가 재판이 끝나면 후원을 중단하시더라고요. "재판을 받던 게 있었는데, 끝나서 후원 해지한다."라는 가해자의 말을 들었을 때는 분노를 넘어 말문이 막히곤 합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는 2020년 2월,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가해자 중심적 양형기준 판단'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이후 성폭력 가해자들이 반성문을 제출하여 감형받고 있다는 소식이 기사화되면서 인터뷰 요청도 많이 들어왔는데요,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한국성폭력상담소' 내지는 '성폭력상담소'가 언급된 감경사유가 2018년 판결문에서도 등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해자들은 왜 한국성폭력상담소를 비롯한 피해자 지원기관에 후원할까요? 가장 큰 이유는 '피해자와의 합의가 결렬되어서'인 것 같습니다. 양형기준을 살펴보면 유죄 판결 시 형을 결정할 때 가장 크게 감형되는 이유가 '피해자와의 합의 여부'입니다. 피해자와 합의한 경우, '피해회복을 위해 노력했다'며 법원에서 기소를 유예해 주거나 벌금형으로 처벌 수위를 낮춰주는 경우가 많거든요. 감형을 위해 가해자들이 피해자에게 굉장히 집요하게 합의를 종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합의에 실패하는 경우 두 번째로 선택하는 게 공탁금을 거는 것, 공탁금을 걸 수 없을 경우에 선택하는 게 '피해자 지원기관에 후원하기'입니다. 피해자에게 금전적으로 보상할 수는 없지만, 피해자 지원기관을 통해 다른 피해자의 피해구제를 위해 '노력'했다고 노고를 인정해 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후원 내역'을 진지한 반성의 결과물로 인정해주기도 합니다. N번방 사건 가해자들이 재판부에 매일같이 반성문을 제출하고 있다는 점이 공분을 사고 있는데, 상담소 기부내역은 '반성문'과 비슷한 맥락으로 가해자의 반성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쓰입니다. 포트폴리오처럼 차곡차곡 모인 자료들로 재판부가 '진지한 반성' 여부를 판단합니다. 가해자의 반성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적어도 지금처럼 돈으로 산 '반성문 포트폴리오'로는 확인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의 목소리를 재판부가 직접 들을 기회가 무척 적습니다. 가해자는 피고인으로서 재판에 여러 차례 출석하지만, 검사가 사건 해결의 주체로서 피고인의 맞은편에 서 있는 현재의 구도에서 피해자의 목소리는 증인신문 이외에는 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N번방 사건을 기소할 때에도 '2차 피해 방지'를 이유로 피해자 추가진술 요청을 하지 않아 텔레그램성착취공동대책위원회에서 피해자 관점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했었습니다.
가해자의 목소리가 피해자의 목소리보다 더욱 선명하게 전달되는 환경 때문인지, 재판부가 성폭력 사건의 양형을 결정할 때 가해자의 시선에 가까운 양형 이유를 서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폭력 사실은 인정하지 않지만 "(가해자가) 진지하게 반성하고 있다는 취지의 자료를 낸 점"*, 친족 성폭력 사건의 판결문에서 "(친권자인 가해자가) 나름대로 수년간 피해자를 부양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는 점"** 등의 감형 이유가 많은 사람들의 공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등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성폭력 재판의 정의로운 판결을 위해서, 재판부가 가해자의 목소리에 이입하지 않도록 끊임없는 감시와 비판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도 피해자 관점에서 성폭력 재판이 진행될 수 있도록 함께 목소리를 내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