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리한" 증언자와 "영리하게" 연대하기*
희음 | 시 쓰고 공부하고 움직이는 사람
책을 읽는 동안 나를 압도한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윤지오 씨 말은 100% 진실일까요?"라는 김수민의 포스팅이 있었던 2019년 4월 16일 이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윤지오의 증언, 즉 그의 '메시지'를 끝까지 따라가는 일을 포기한 채 윤지오라는 '메신저' 쪽으로 시선을 틀어버렸다.** 윤지오라는 사람의 인격은 어떠한가 하는 물음에 지배당해버린 것이다.
'메신저' 문제에 집중한 나머지, 나는 사실 윤지오 증언이 어떤 계기로 우리에게 처음 와닿게 된 것인지조차 한동안 잊고 있었다. 그것은 국민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먼저 "미투-위드유 봉기가 다중의 섭정 정치 형태로 표현된" 국민청원인, 장자연 사건 진상규명 청와대 국민청원(2018년 2월)이 있었다. 청원은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같은 해 4월 2일에 검찰 과거사위원회의 사전 조사대상으로 선정되었고, 5월에는 재조사 권고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 흐름에 용기를 얻은 윤지오는 2018년 여름, <PD수첩>의 "고 장자연" 인터뷰에 응하게 됐고, 진상조사단의 조사 요청에도 응하기로 결심했다. 정식 조사에 앞서 윤지오는 사건 당시 <조선일보> 기자였던 조*천의 성추행 현장에 대해 증언했고, 이 증언을 기해 조*천은 기소됐다. 이를 계기로 윤지오의 증언은 드디어 2019년, 장자연 리스트의 일부 내용을 증언하는 것으로도 이어졌다.
이 '리스트'에 대한 윤지오의 증언이 바로, 김수민으로 하여금 윤지오라는 '오염된(즉 "영리하"고 "거짓말하는") 메신저'를 생산하게 하고, 윤지오라는 사람에 대한 의심을 촉발시킨 결정적인 매개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김수민은 애초 윤지오가 리스트를 본 적이 없으며 윤지오가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야 그 비슷한 것을 보았을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윤지오는 2009년부터 일관되게 리스트를 보았다고 말해왔다. 장자연에게 문건과 리스트를 쓰도록 도왔던 것이 유장호인데, 그와 윤지오와의 2009년 통화 내용에서 그 리스트가 언급되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으며, 가족(장자연 친오빠)의 요구로 봉은사에서 리스트가 불태워질 당시에도 그 리스트의 존재를 보았다는 진술을 윤지오는 2009년과 2019년 모두 동일하게 해왔던 것이다.
윤지오라는 메신저를 통칭하게 된 (부정적 의미의) "영리"함 역시, 책 『13번째 증인』 출판을 통해 윤지오가 "영리하게" 무언가를 해보겠다고 다짐한 것에 대한 왜곡의 효과로서 창출된 개념에 불과하다. 김수민과 박훈은 윤지오의 영리함을 "영악"과 "가식"과 "사기"로 몰아갔고, 거기에 가로세로연구소(김용호)와 김대오까지 가세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윤지오의 증언 행보 전체를 의심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부정적 영리함의 중심에는 윤지오의 '후원금 모금'이 있다. '돈'이라는 세속적 매개물이 섞여든 것만으로 윤지오는 "사기꾼"의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후원금 모금의 배경은 '죽임당할 위협'이었다. 김수민을 비롯한 '탈진실 공모자'들은 이에 대해서도 그 위협감과 공포가 실재하지 않으며 공포에 대한 근거가 없으므로, 그 또한 거짓이며 사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장자연의 죽음을 떠올려보자. 그가 기록하고 남긴 건 성착취 카르텔을 구성하는 숱한 이름들(리스트)과 성폭력에 관한 사실들의 나열(문건)이었다. 유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리스트는 불태워졌지만, 2009년에 남겨진 관련 증언과 증거들이 그것이 유서가 아님을 말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을 지켜봤던 윤지오가, 이번엔 그 죽음의 차례가 자신에게 왔음을 직감하지 않을 수 있는가. 굳이 윤지오가 아니더라도, 실재하지 않고 입증되지도 않는 공포가 여성들의 일상 안에 산재해 있음을 우리는 모두 안다. 말했거나 말할 수 있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죽임당했다(고 믿는다)면, 말을 품은 채 남겨진 한 사람을 압도하는 감정이 무엇일지 우리 모두가 안다. 그 무형의 감정은 실재하는 유형의 일상을 제대로 이어나갈 수 없을 만큼 지나치게 실재한다.
결국 3월 18일에, 윤지오의 신한은행 통장으로 15시간 5분 동안 1억 1천 7백만 원이라는 후원금이 입금되는 "사건"이 기록된다. 여기에는 익명 혹은 격려 문구로써 입금인 란을 대신한 이가 실명 후원자 못지않게 많다. 무조건적 증여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 후원금 '운동'이, 국가가 해주지 않는 윤지오의 신변보호를 시민이 대신하겠다는 의지의 반영이라 할 때, 이는 "증인의 신체와 생명을 보호"하려는 범사회적 "연대"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모집행위에 의하지 않은 자발적 기부***는 기부금품법의 적용대상이 아니다. 그런데도 변호사인 박훈, 최나리는 후원금 증여자들을 "피기망자"로 규정하면서 윤지오를 불법행위자로 몰아가기에 이른다. 후원자 중 누구도 스스로를 피기망자로 여기지 않은 때였는데도 말이다. 심지어 최나리가 진행하는 무료 반환청구 소송에 함께하자고 주체 격으로 이를 촉구하며 이 일에 앞장선 것은 후원자조차 아니었던 김수민이었다. 그 집요하고도 오랜 주문과 부추김 끝에 겨우 439명이 움직였다. 5,745명의 신한은행 후원자 중 단 439명이 김수민에게 이끌리다시피 하여 "김나리의 소송에 '동의' 서명"을 한 셈이다.
이 외에도 윤지오라는 사람의 인격에 대한 음해와 모략들이 실로 난무했는데, 김수민의 저 "윤지오 씨 말은 100% 진실일까요?"라는 첫 포스팅이 있은 지 일주일 만에 이 모든 논의들은 박훈 변호사의 고소·고발(김수민 작가 대리의 명예훼손 고발, 모금 빌미 사기 혐의 고발)에 의해 사법 영역으로 휩쓸리듯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시민들의 사회적 토론의 장은 일거에 말소당했고, "다중들은 그 결과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구경꾼의 위치로 밀려"나게 되었다. 가슴 아픈 일은 윤지오가 '마녀사냥'당해 결국 이 나라에서 추방된 것뿐만이 아니라, '누가, 왜 장자연을 죽게 만들었는가?'라는 그 절실했던 사회적 물음이, '윤지오는 사기범죄자인가?'라는 사법적 물음으로 추락해버린 일이다.
윤지오는 장자연 사건에 대해 유일하게 증언할 수 있는 자로서, 시민의 바람과 요청을 디딤돌 삼아 메시지를 전하러 이곳까지 왔다. 그는 메시지의 순수증여 행위를 했다. 그런데 이후 그가 시민 연대자들로부터 모금이라는 이름의 순수증여를 받자마자, 그라는 '메신저'가 주목받게 됐고 윤지오는 그 즉시 영리한 사기꾼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증언자에서 잠재적 범죄자 신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증언할 자격을 갖추고 또 유지하기 위해서는 순수증여로서의 연대에 응답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자살당할' 위험과 위협감 속에 있다 해도 순수한 증언자로서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도움도 받아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이 말은 곧 증언하려는 '살아남은 자'는 죽음을 각오해야 할 뿐 아니라, 이미 언제나 죽음 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결국 살아서 '증언'할 수 있는 모든 존재는 순수라는 자격에서 원천적으로 탈락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죽은 장자연을 위해서는 윤지오를 죽여야 한다"는 박훈·김대오·김수민 트리오의 "리트로넬로"에 저자가 치를 떠는 것도, 그들의 언술에서 이와 비슷한 맥락을 읽었기 때문인 게 아닐까.
그러나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더 이상 증언할 수 없다. 증언할 의지가 있었고, 또 더 이상은 고통받지 않고 살기 위해 고발 문서의 형식으로써 증언했음에도, 그 모든 증언 문서가 '유서'로 치환되고, 증언 직후의 알 수 없는 죽음이 '자살'로써 과거사(史)화되고 만 사건의 당사자가 이미 죽은 자라면, 그는 혼자서는 무엇도 밝혀낼 수 없다. 살아있는 자의 "영리한" 증언과 실천만이 사건을 빛 쪽으로 다시 끄집어낼 수 있다. 그 사건 뒤에 숨은 모든 추악한 남성 권력 카르텔과 여성에 대한 학대, 착취, 제노사이드를 폭로할 수 있다. 파편적으로 존재하는 증언만으로 이 일을 완수해내기에는 역부족일지 모른다. 장자연이라는 증언자의 증언을 윤지오가 이어받고, <탈진실 시대의 진실연대자들>이 그것을 빠짐없이 팔로업하고, 조정환이 이를 기록하고 출판하는 식의 "영리한" '증언릴레이'가 더 먼 곳까지 뻗어나가야 할 것이다. 더 많은 "영리한" 이들이 "생명의 눈"을 부릅뜨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며 시선을 주고받을 때 "증언혐오"라는 흐리멍덩한 눈은 비탈 아래로 쓸려 내려가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