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경 | 한국성폭력상담소 전 소장, 이사
거의 모든 성폭력은 권력관계를 이용한 성적 침해이다. 그 중에서 특히 선출직 지방자치단체장에 의한 성폭력 사건은 단체장이 갖는 위력의 넓이와 깊이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2018년 3월 5일, 한 방송사 인터뷰 #미투로 세상에 알려진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수행비서 성폭력 사건, 2020년 4월 23일, 사퇴선언과 함께 드러난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공무원 성폭력 사건, 2020년 7월 8일 피해자가 고소한 다음 날, 실종소식과 함께 사망으로 충격을 준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비서실 공무원 성폭력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세 사건 모두 제왕적 권력을 누리는 지방자치단체장에 의한 성폭력이라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완성은 성평등이다"라는 사실을 우리 사회에 아프게 일깨워주고 있다.
우리 상담소는 위 세 사건의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에서 활동하고 있다. 충남도지사와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의 경우,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기 전부터 피해자 지원을 시작해 공대위를 꾸리고 공동사무국으로서 대책회의 및 공판모니터링, 의견서와 탄원서 조직, 언론대응, 전문가 간담회 및 토론회 개최, 대규모 집회 등을 진행해왔다.
부산시장 건은 공대위 단체의 일원으로 대책회의, 기자회견, 연대성명서, 관련 토론회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상담소는 엄청난 위력에 맞서 싸우는 피해자 곁에서 연대하고, 나아가 피해자들이 한결같이 외치는 '더 이상 다른 피해자가 없도록' 하기 위해 이 문제의 근본 요인을 파헤치고, 사회에 알리고,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의 활동에 대한 반응은 다양하다. 한 예로 지난 7월 13일,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에 관한 1차 기자회견 이후에는 상담소에 항의전화가 쇄도했다. "아직 발인도 안 끝났는데 꼭 오늘 기자회견을 해야 했느냐",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하는 훌륭한 분인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증거가 있느냐, 구체적인 증거를 내놔라", "피해자의 신상을 대라" 등등... 전화로만 항의하는 것을 넘어, 10년 넘게 함께 해오신 분들 중 몇 분은 후원을 중단 및 탈퇴했다. 각종 기사에 달린 악성 댓글은 물론이고 민주화운동을 해온 원로나 시민사회단체 인사들마저 우리 공대위에 불편한 내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응원과 지지가 이어지고 있음은 우리 사회가 갖는 희망의 증거이다. 특히 2030 세대의 반응은 아주 특별한 감동과 힘이 있다. 어떤 분은 "내가 만약 이와 비슷한 피해를 입는다면 누군가는 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내 옆에 단체들이 함께해 줄 것이라는 생각에 든든하다"라며 신입사원의 빠듯한 월급을 쪼개어 후원회원으로 가입해주셨다. 바로 이 점이 우리 상담소가 위력 성폭력 사건 피해자를 지원하고, 잘못된 권력의 영향력에 분연히 맞서는 이유이다. 어떤 위력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가해자는 반드시 처벌받고 피해자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여성인권단체로서 당연한 활동이다. 이러한 변화를 시작하게 하고, 또 가능케 만든 것은 피해자들의 용기이다. 피해자들의 아주 특별한 목소리는 우리 사회에 울림을 주고, 성찰과 변화를 요구한다.
"화형대에 올려져 불길 속 마녀로 살아야 했던 고통스런 지난 시간과의 작별입니다…. 말하였으나 외면당했던, 어디에도 말하지 못하고 저의 재판을 지켜보았던 성폭력 피해자들께 미약하지만 연대의 마음을 전합니다!" — 전 충남도지사 성폭력 피해자, 항소심 유죄선고 이후 입장문(2019.2.1)
"범죄자는 마땅한 처벌을 받고, 저는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살고 싶습니다. 더 바라도 된다면, 지난 2달여간 지켜본 블랙코미디 같은 일들이 이 사회에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고, 저 같은 피해자가 더 이상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부산시장 성폭력 피해자, 가해자 엄벌촉구 기자회견(2020.6.9)
"저는 기다리겠습니다. 그 어떠한 편견도 없이 적법하고 합리적인 절차에 따라 밝혀지는 과정을." — 서울시장위력성폭력 피해자, 2차 기자회견(2020.7.22)
우리 사회가 위력 성폭력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진상규명 작업과 함께 시급하게 바뀌어야 할 것은 피해자들에게 가해지는 2차 피해를 당장 멈추는 일이다.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피해자의 경우 정부 여당은 "피해 호소인"이라는 용어를 쓰는가 하면 서울시는 서울시장(葬)을 반대하는 596,410명의 국민청원에도 불구하고 장례식을 강행했다. 모 방송사에서는 신입 취재기자 입사시험 문제에서 "피해자로 부를 것인가, 아니면 피해호소인으로 부를 것인가를 논하라"라는 문제를 냈다. 피해자를 의심하고 비난하는 것은 물론, 지원단체와 피해자 지원 변호사에 대한 모욕과 비난도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피해자들은 "가해를 멈추라"는 준엄한 말하기를, 그리고 더 이상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서로에게 힘과 용기가 되는 말하기를 지속하고 있다. 사회는 절대 저절로 변화하지 않는다. 피해자와 연대하여 문제제기하고, 실천할 때 변화를 만들어 갈 수 있으며, 이미 우리는 그 과정에 있다. 우리는 철저한 진상규명, 성폭력을 조장하는 직장 내 성차별적 구조 문화 변혁, 성평등한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쳐갈 것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노력들이 #미투에 대한 응답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