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당신의 권리를 위한 싸움
신홍누리 |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참가자
추억은 커녕 온전한 일상을 살아내기에도 어려운 올 한 해였지만, 같은 이유로 지난 여름 참여했던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일상 대응 연습> 프로그램은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일상 대응 연습>은 일상 속에서의 다양한 상황대응을 몸으로 익히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 더욱 의미가 있었던 것은 서로가 서로의 동료이자 지지자로서 안부를 묻고, 일상을 나누며 전에 없었던 연대감을 느끼게 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코와 입을 단단히 막느라 더운 숨을 토해내기도 버거웠던 그 여름에 함께 땀 흘리면서 몸을 움직였던 자기방어훈련 동료분들은 이 코로나 시기에 어떻게 지내시는지.
나는 딸을 무술 감독으로 키우고 싶었던 어머니의 바람으로 초등학교 2학년부터 7년 간 태권도와 합기도를 배웠고, 남들보다 큰 키와 몸, 쉬이 주눅들지 않는 성격 덕에 누군가가 나를 함부로 위협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왔다. 지방 출신이자 1인 여성가구로서의 삶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믿음 때문이리라. 그러나 성폭력상담소 활동가로 근무하던 초기에는 재판을 다녀오기만 하면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문단속을 수 차례 반복하는 습관이 생기기도 했고, 지하철 출퇴근길에서의 성추행이 일상이 되자, 매번 이런 일에 감정을 소비하는 것에 지쳐가기만 했다. 그러던 중 내가 당시 찾았던 해답은, 나에게 이런 불안을 느끼고 자기방어가 필요하게 만드는 사회를 바꾸는 것에 더 주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불안을 감추고, 숨기는 일이 익숙해질 쯤 나는 활동가에서 프리랜서로 활동의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어색하고 불안했던 그 길을 걸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공지를 보게 되었다. 해야 하는 이유보다도 '해보고 싶다!'는 의지가 강력하게 일었고, 그렇게 나의 일상을 살아가는 방법과 태도는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주변의 시선이 부끄러워 운동을 그만두고 난 이후, 내 몸이 이렇게나 격렬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20여 년이 걸렸다.
서로의 컨디션을 묻고, 스트레칭 하고, 이야기 나누고, 소리 지르고, 몸을 움직이는 시간. 배운 것을 실습해보고, 그 느낌을 나누는 경험.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함께 한다는 것이 나 스스로를 더 이상 불안을 감추는 약자적 위치에 두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조력할 수 있는 사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얻은 '일상 속의 수많은 상황들을 대응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이 때로는 더 많은 에너지를 쓰게 만들기도 했다. 과거에는 무심히 지나갔던 주변의 상황들을 예민하게 바라보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의 예민해진 감각들이 곧 누군가와 연대할 수 있는 힘이고,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해낼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더 큰 충전재가 된다는 것도 오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자기방어훈련을 들으며 자기효능감이 점점 충전되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어머니 배웅을 하러 서울역 대합실로 향하던 중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몰카범이에요!!! 잡아주세요!!" 그 소리가 들린 방향을 쳐다보자 내 방향으로 어떤 남성이 엄청난 속도로 뛰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순식간에 내 머릿속은 수능날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쫒아가면 잡을 수 있을까? 난 발목이 약해서 잘 못 뛰는데'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나의 무기인 큰 목청을 이용해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남색 셔츠입은 남자 잡아주세요!!" 그 소리를 들은 몇 명의 사람들이 도망치는 사람을 쫒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 소리를 지른 사람에게 다가가서 상황을 파악했다. 불법 촬영을 하는 장면을 목격했고, 피해당사자는 모르고 있었고, 경찰 신고는 아직이었다.
경찰에 전화해서 상황을 설명하고 경찰이 올 때까지 놀랐을 피해자에게 앞으로 사건이 진행될 과정, 피해자로서의 권리 등을 안내했다. 동시에 경찰에게 인상착의를 전달하고, 도망친 방향을 전달해 지하철 경찰을 불러 달라고 요청해 결국 그 사람을 지하철 화장실에서 검거할 수 있었다. 모든 사진이 지워져 있었기 때문에 경찰은 피해당사자에게 처벌 의사와 디지털포렌식 의사를 물었고, 피해자는 강력한 처벌을 원한다는 말을 남기고 기차를 타러 떠났다. 나는 피해자에게 받았던 연락처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상담소의 연락처들을 보냈다. 오래지 않아 도착한 답장에서 나는 자기방어훈련이 이런 것이구나!라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신의 일인 것처럼 도와주셔서, 이것이 저만의 일이 아니란 것을 알았어요. 다른 피해자를 막는다는 마음으로 저는 끝까지 해보려구요.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일상을 스미는 폭력에 무기력해지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나에게 내재된 힘이 사실 엄청나다는 것을 느끼며 나를 위해, 나의 동료를 위해 그 힘을 함께 나누는 것. 모든 여성들이 자신의 권리와 동료의 권리를 위해 함께 싸워나가는 것. 그것이 나의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