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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주년 돌아보기1 : 생존자말하기 1회 기획단 인터뷰
  • 경진, 닻별, 서현
제1회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로부터 벌써 18년. 자원활동가와 상담소 활동가로 기획에 참여한 두 분과 성문화운동팀 활동가 닻별이 말하기에 대해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인터뷰이 | 해갈, 수수
인터뷰 진행·정리 | 경진, 닻별, 서현

여러분의 근황이 궁금합니다. 요즘은 어느 지역에서 어떤 일을 하며 지내고 계신가요?

수수_ 저는 전라남도 구례에서 노래 부르는 옥수수로 살고 있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 학교 돌봄 교실에 가서 노래 부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기후위기 행동이라는 시민 모임에서도 활동하고 있어요.

해갈_ 저는 도봉구의 여성 교육 관련 기관에서 일하고 있어요. 여성 취업, 사회 문화 교육 등을 하는 곳이에요.

닻별_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계속해서 시민사회 영역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어 반갑습니다. 먼저 생존자말하기대회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듣고 싶어요. 해갈님은 당시 상담소 활동가로서 느꼈던 문제의식도 있었을 것 같아요.

해갈_ 상담소에서 성폭력에 대한 인식과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오랫동안 얘기해오고 있잖아요. 당시 성문화운동팀에서 기획하고 참여를 제안했어요. 제가 있었던 여성주의상담팀에서도 개인적인 상담과 지지를 넘어 피해생존자들이 일상을 살 수 있도록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함께 하기로 했죠. 그동안 피해자들은 자기 신분이 드러날까 봐 늘 두려워했지만, <운동사회 내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 등이 일어나면서 피해 당사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어요. 영페미 문화도 일어났고요. 우리도 외국처럼 스피크아웃(speakout) 행사 같은 걸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사업을 시작했어요. 개인적으로 생존자라는 말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이 많았는데, 기획단을 같이 하면서 문제의식을 키울 수 있었어요.

1회 말하기대회 본행사
1회 말하기대회 본행사

남아있는 당시 자료들을 살펴보니 어떤 기준으로 피해자분들을 초대할지, 어느 정도로 행사 참여를 열어둘지 등의 얘기가 담겨 있던데요. 그때 쟁점이 되었던 주제들이 궁금합니다.

수수_ 기획단 안에 생존자의 정체성을 가진 분들이 많았어요. 각자 자신의 성폭력 경험들을 얘기하면서 다양한 삶의 모습과 그 안의 여러 감정들을 들여다보고, 그를 정형화하고 위계를 만드는 문화에 대항하고자 했어요. 당시 막 등장하기 시작한 온라인 성폭력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를 나눴어요. 그러면서 우리 안에도 성폭력 경험을 전형적으로 서사화하는 습관들이 있다는 걸 발견하기도 했죠. 하지만 피해 경험들은 너무나 다양하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있어요. 이걸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미술과 퍼포먼스, 시, 연극 등의 아이디어가 나왔죠.

닻별_ 해갈님의 말씀을 들으니 2018년 생존자말하기대회가 떠오릅니다. 한 생존자분이 북을 들고 나와서 소리를 지르고 북 치는 세기를 조절하기도 하면서 본인만의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하셨거든요. 20년이 흐른 지금, 그때와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체감하시나요?

해갈_ 당시에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를 많이 고민했어요. 피해 사실을 함부로 평가하지 말기, 사진촬영 금지 같은 조항이 담긴 서약서를 받았죠. 말하기가 확산되면서 듣기에 대한 고민이 다시 생겼어요. 여전히 피해 사실이나 피해자의 행동에만 집중하는 언론이나 미투에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 아직도 우리의 듣는 방식이 변하지 않았구나 싶어요. 최근에 지인과 만나 20년 전보다도 더 나빠진 것 같다고 얘기하기도 했어요. 예전에 생존자말하기대회에 오셨던 분들은 대부분 성폭력 사건을 함부로 판단하는 걸 조심스러워하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다들 성폭력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해요. 누구나 판사가 돼서 성폭력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더라고요. 백래시가 심한 상황이라 걱정이 되지만, 한 단계 발전하는 과정이겠거니 합니다. 기대해야겠죠.

닻별_ 예전에는 전화상담에서 이게 성폭력이 맞는지를 주로 물어보셨다면 이제는 주변의 반응에 대한 걱정이나 대응 방법을 많이 물어보시는 편인 것 같아요.

수수_ 얼마 전에 중학생분들과 '기후위기와 페미니즘'이라는 수업을 했어요. 근처 학교에서 있었던 불법촬영 사건을 주제로 얘기했는데, 굉장히 공분하고 공감하시더라고요. 지금은 10대 여성들이나 사회적 자원과 자본이 상대적으로 적은, 보통의 여성들도 이것이 성폭력이라는 걸 알고 계세요. 무엇을 폭력이라 정의하는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같은 젠더권력에 기반한 감각은 체감상 많은 변화가 있는 것 같아요. 백래시가 심해졌지만, 동시에 백래시의 민감도도 높아진 것 같고요.

SNS 등 말하기의 장이 다양해지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수수_ 장애여성들과 함께 노래/퍼포먼스 작업을 해오고 있는데, 이분들에게 성폭력 경험의 말하기란 무엇일지 생각해보게 돼요. 말할 수 있는 매체와 시간의 폭은 넓어졌는데, 여전히 특정한 계층이나 조건에 있는 분들에게는 폭력 경험을 얘기하기까지 제도적, 문화적 장벽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양한 매체의 존재조차 잘 모를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다양한 매체의 등장이 곧 성폭력에 대한 인식과 문화를 바꾸진 못하는 것 같아요. 오히려 격차를 더 벌릴 수도 있고요. 말하기의 방법과 시공간을 선택하는 과정을 잘 고민하지 않으면 배제되는 사람이 분명히 생길 수 있어요.

해갈_ 온라인 공간에서의 말하기가 많아지면서 피해자에게 실명을 밝히고 피해자임을 입증하라는 요구들이 심각하게 늘어났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 온라인은 무기가 될 수도 있죠. 상담소나 여성단체를 통하지 않고서도 온라인에서 개인적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말할 수 있게 된 건 큰 의미인 것 같아요. 그만큼 공격도 많아졌는데, 그건 아직 전형적인 피해자상이 남아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성폭력 통념을 바꾸는 것도 중요하겠습니다.

다시 생존자말하기대회를 연다면 어떤 것들을 시도해보고 싶으신가요?

수수_ 저는 몸을 써보고 싶어요. 스우파*의 영향인가(웃음). 공동의 몸짓을 만들거나 내 몸을 살피는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예전에 한 생존자분께서 요가를 열심히 하셨는데, 그때는 왜 요가를 하시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아요. 나의 성폭력 경험과 비슷한 사건들을 접하면 그 경험들이 계속 올라와요. 나를 갉아먹거나 삶의 의욕을 떨어뜨리는 여러 감정들을 조율하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몸 작업이 좋더라고요. 온라인으로도 몸짓들을 나누고 보여줘도 좋을 것 같네요.

2019 한국여성대회 원빌리언 라이징
2019 한국여성대회 원빌리언 라이징

해갈_ 그 자리에 참여하진 못하더라도 플래시몹이나 공동행동으로 지지와 응원을 표현해보면 어떨까요. 사실 이게 정말 외로워요.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로 인식이 많이 달라지고 본인을 페미니스트라고 밝히시는 분들도 많아졌지만, 아직 소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서로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이렇게나 많이 있다는 걸 표현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눈 소감이 어떠신지 궁금해요.

수수_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폭력이나 차별의 경험이 정말 많잖아요. 저는 구례에서 마주치는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나 자신과 공동체가 할 수 있는 만큼 능력치를 높여가려고 애쓰고 있어요. 오늘 이 자리를 통해 제 주변 공동체에서 일상적으로 목격했던 것들을 돌아보게 되네요. 폭력의 목격자나 지지자, 어쩌면 연루자로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을 내가 어떻게 들어야 할지, 또 어떻게 그에 연대하고 말해야 할지 고민이 들어요. 복잡한 감정이 들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네요.

해갈_ 처음에 인터뷰 제안을 받고 다른 사람을 추천했어요. 기획단 활동을 더 주도적으로 했던 사람들이 많고, 제가 이런 인터뷰를 하는 게 맞나 싶더라고요. 부담이 됐지만 인터뷰에 응하게 된 건 상담소가 그만큼 제게 의미있는 곳이어서예요. 페미니즘에 대해서 알게 된 소중한 곳이고, 그 힘으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거든요. 다행히 수수님께서 같이 하신다고 해서 정말 반가웠어요. 말하기 대회 이후로는 만난 적이 없는데, 수수님 이름이 옥수수의 줄인 말이라는 걸 얘기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더라고요.

한편으로는 그때 이후로 시간이 많이 흐른 만큼, 상담소에 찾아오시는 분들이 상담소에 기대하는 게 많이 달라졌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활동가들이 고민이 많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걱정도 되더라고요.

닻별_ 정보는 많은데 어떤 것들이 진짜 유의미한 정보인지 취사선택하기는 너무 어려운 시대인 것 같아요. 얕은 정보마저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들도 많고요. 과정보의 시대에 상담소는 어디로 향해가야 할까, 계속 고민하고 있습니다.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수수_ 어떤 폭력이든 서로 연결돼있고 증폭시키는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해요. '육식의 성정치'라는 책을 보면 공장식 축산, 젖소 착취와 재생산 능력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와요. 이것이 여성들이 경험하는 폭력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자신의 폭력 경험을 말하고, 서로 연결돼있는 차별과 폭력들에 대해 사유하고 상상하는 과정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런 부분들을 다른 페미니스트들과 나누고 싶어요. 말하기대회같은 곳에서도 서로 이야기하고 연결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연결됨으로써 생존자나 주변 지지자들이 스스로의 삶에서 회복되고 자유로워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해갈_ 상담소가 올해 30주년이라고 들었어요. 30년 동안 우리 사회에 의미 있는 활동들을 많이 해왔잖아요. 예나 지금이나 저는 여성단체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보는데, 지금 여성운동은 전반적으로 너무 어려운 상황이에요. 개인의 힘과 목소리가 커졌지만 여성단체의 역할은 분명히 있다고 믿어요. 활동가들도 힘내서 활동했으면 좋겠습니다.

두 인터뷰이가 나눠준 연결과 연대의 마음, 힘이 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인상 깊은 인터뷰였습니다. 사려깊고 재치있는 두 분의 이야기가 주는 울림이 나눔터 독자 여러분께도 전해지길 기원합니다!

* 스트릿 우먼 파이터. 엠넷에서 방영한 댄스 크루 서바이벌 프로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