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 | 여성주의상담팀 활동가
전화상담을 하다보면 가끔 매우 공손하고 주눅 든 목소리가 들려오곤 합니다. '제가 실수를 했는데요'로 시작하는 그 말들은 대부분 가해자의 전화입니다. 그러면 저는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고 상담하는 곳입니다. 가해자는 상담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지만, 그들은 쉽게 전화를 끊지 않습니다. '그러면 저는 어디서 상담받나요?'라고 물어봅니다. 그럴 때 어떻게 대답하는 게 좋을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정말 떳떳하다면 성실히 조사 받으라고, 알아서 변호사 알아보라고 말하곤 합니다. 전화를 끊고 자괴감에 빠집니다. 왜 변호사 이야기까지 했을까. 또 생각합니다. 내가 왜 자괴감에 빠져야 하지? 가해자들 여기에 전화하지 마!
이렇게 가해자 전화가 종종 오는 만큼 상담소에서는 성폭력 가해자의 법시장화 움직임에 일찍이 주목해왔습니다. 지난 9월에는 상담소의 부설연구소 울림 김보화 책임연구원의 박사 논문 발표회가 있었습니다. 논문에서는 성폭력 사건 해결 과정과 판단에서 법의 논리 강화가 가져온 법 시장에 대한 의존도 심화, 성범죄 전담 법인의 등장과 가해자에게 유리한 결과를 끌어내기 위해 활용되는 전략들, 성폭력 피해자의 법적 권리가 피해자의 책임과 고통의 증명으로 이전되고, 가해자의 역고소를 통해 역전되는 상황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또 법적 절차를 조력하는 역할만 강요받는 반성폭력 운동의 위치성에 대한 고민도 담겨 있습니다.
발표회는 피해자를 지원하면서 고민하는 지점들을 나눌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상담 현장에서 가장 피해자를 주눅 들게 하는 것 중 하나라고 느끼는 것은 단연 역고소입니다. 사건을 고소하기 전 단계에서 많은 분이 역고소를 우려합니다. '저는 피해자인데 역고소로 제가 가해자가 될 수 있다고 들었어요' 혹은 경찰서나 주변인들에게 역고소 위험이 있다는 것을 과도하게 듣습니다. '저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데 왜 그런 말을 하는 건가요?'라는 말을 듣다 보면 피해자를 향한 역고소 위협에 착잡해지곤 합니다. 물론 역고소가 우려될 때도 있고 이를 대비하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성폭력 사건에서 역고소를 운운하며 피해생존자에게 또 다른 불안감을 안겨주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건이 불기소되자마자 가해자들은 본격적으로 역고소로 피해자를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가해자를 위한 로펌에서 이를 부추기기도 합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 의한 성폭력 사건의 경우 가해자 측은 피해자를 지지하는 증인들을 모해위증죄로 역고소했습니다. 이처럼 유명한 사건의 특별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피해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고소하여 피해자 지지자원들을 전략적으로 차단하는 행위는 많이 있습니다. 또 피해자를 명예훼손으로 역고소하고, 피해자가 성폭력을 고소하지 않았음에도 무고로 고소하는 가해자도 있습니다. 스스로 법적으로 진행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고소하지 않은 피해자는 가해자의 역고소로 원치 않게 고소 절차를 시작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가해자가 민사상 손해배상청구를 하는 경우도 많은데 소송의 대응 시간, 비용 문제가 뒤따르기에 피해자가 처벌받지 않더라도 부담을 갖게 됩니다.
역고소도 문제지만 성폭력 사건이 법적인 해결에만 집중되는 현상도 조력자로서 부담이 가는 부분입니다. 모든 성폭력 사건이 법적으로 해결되기는 어렵습니다. 공소시효가 지난 경우도 있고, 현행 강간죄 구성요건인 폭행 또는 협박이 동반되지 않아 법적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사건도 대다수입니다. 하지만 고소가 유일한 성폭력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느껴지게 만드는 이유도 더 이상 공동체 내에서 사건을 해결할 자원이나 토대가 부재하기 때문이겠지요.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온전한 회복이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가해자가 형량을 많이 받으면, 합의금을 많이 받으면 될까요? 우리의 치유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상담소에서 활동하는 내내 저의 가장 큰, 상담팀의 가장 큰 고민거리가 될 것 같습니다. 완전한 정답도, 해결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꾸만 법적인 해결에만 치우치고 법정에서의 승소가 온전한 해결의 유일한 길이라는 사회적 분위기도 피해생존자의 회복을 더디게 만드는 분위기라고 생각합니다. 피해자를 지원하고 조력하는 방법은 법적 지원 말고도 많습니다. 치유에 집중하는 방법, 일상을 잘 살아가기 위해 함께하는 방법, 더 많은 피해생존자와 함께 연대하는 방법. 각자의 위치에서, 개개인이 가진 자원을 파악하여,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일상 회복을 위해 어떻게 함께할 수 있을지 이 글을 읽어보시는 모든 분들이 한 번씩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