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 |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
예전 한국성폭력상담소는 합정동 어느 골목길에 양 옆의 오래된 정겨운 집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따뜻한 집이었어요. 흔히들 옛날 집이라고 하면 머릿속에 금방 떠올리는 특별하지 않은, 그렇지만 너무나 익숙해서 마음 깊숙한 곳까지 편안해지는 2층 집이요.
커다란 대문 옆 작은 쪽문을 열면 사람 한 명 지나갈 수 있는 기다란 길이 나오고, 왼쪽으로는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오른쪽으로는 반층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나왔지요. 왼쪽 계단을 오르면 바로 옆 감나무 집의 귀여운 하얀 강아지 방실이가 동네가 떠나갈 정도로 짖으며 인사를 나눠주었고, 한국성폭력상담소 현판의 대문이 보였습니다. 쪽문을 따라 들어와 반층 아래 계단으로 내려오면, 작은 텃밭과 여러 집회시위 용품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어요. 동네 길냥이들의 화장실과 추운 겨울 내내 따뜻한 보금자리가 되어줬던 곳이었습니다.
2014년 부설 연구소 울림의 재개소 논의를 하면서 그동안 춥고 낡고 좁았던 상담소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의 필요성이 논의되었어요. 때마침 상담소가 위치한 집터를 사겠다는 사람도 등장했고요. 주변 부동산에서 '사무실'로 쓰일만한 새로운 곳으로의 이동을 재촉하기도 했습니다. 여러 공간을 둘러보았지만, 정든 합정동을 떠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터에 다시 새로운 상담소를 짓기로 하고 2년을 꼬박 준비해서 지하 1층 지상 3층의 새로운 공간이 완성되었죠.
그런데 미처 그때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공간에서 발생할 여러 일들을요. 상담소 건물을 설계하던 건축사 분이 '새로운 건물이 자리를 잡는데는 최소 5년이 걸린다, 건물도 사람처럼 자리를 잡고 익숙해져야 한다'고 했어요. 지난 4년 동안은 큰 문제없이 (이 새로운 건물과) 잘 지내왔죠. 그런데 너무 건물 관리에 대해서 잘 몰랐던 걸까요. 아니, 미숙하고 책임과 역할을 다하지 못했던 걸까요. 2021년 8월 30일.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 발생했어요.
이른 아침 다급한 연락을 받았어요. 8월 9시 출근 담당을 하던 파랑 활동가였습니다. 지하에 물이 차올랐다고요. 그때만 해도 전 심각하다고 여기지 않았어요. '지하에? 물이? 에이 설마'라고 생각했죠. 지하 화장실 세면대 아래 호스에서 물이 샌 적이 이전에도 있었기에 화장실 바닥이 약간 젖은 상태 정도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수화기 넘어 파랑 활동가의 말을 곱씹을수록 이상했죠. '엘레베이터가 안 꺼져요.', '발목까지 물이 찼어요'. 이상하다… 발목까지 물이 찼다고?
바로 오매 소장에게 전화했어요. 행동력이 빠른 오매는 상황을 파악하더니 바로 "구청에 양수기 대여해주는지 물어봐야겠어. 내가 구청에 들러서 가지고 올게"라고 했죠. 급하게 사무실에 와보니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했습니다. 이미 차단기가 내려가 지하 1층은 불이 제대로 켜지지 않는 암흑 같았고, 정말 물은 발목까지 차올라 있었습니다. 지하 1층 전체가요. 엘레베이터 밑 공간에도 물은 가득 차 있었습니다. 주말 내내 화장실 세면대 하단 호스에서 물이 흘러나왔고, 하수도 물을 지상으로 퍼올려야 하는 배수 펌프 2개는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당장 지하 1층 뒷 벽면을 채우고 있던 책장 안의 주요 서류들을 꺼내야 했습니다. 이미 젖어버린 상태의 서류뭉치들은 제대로 빠지지도 않았어요. 상담소 힘쎈이 감이와 여성주의상담팀 활동가들이 거의 책장의 옆부분을 부수듯이 서류들을 건져 올렸습니다. 지하를 가득 채운 물은 구청에서 대여한 양수기 2개로는 도저히 빼낼 수 있는 양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백목련 활동가가 검색으로 양수기업체를 급히 찾았어요. 오후나 되어야 도착한다는 말에 그대로 있을 순 없어 활동가 모두가 지하 1층부터 지상 1층 외부문까지 일렬로 서서 빈 쓰레기통으로 물을 퍼서 나르기 시작했습니다. 땀인지 물인지 알 수 없는 수분기를 온몸에 가득 품은 채로 열심히 퍼오르던 그때, 다행히 양수기업체 사장님이 빛의 속도로 달려오셨습니다. 엘레베이터 문을 열어두고 엘레베이터 하단에 가득 찬 물부터 빼내기 시작했어요. 거의 하루종일 걸려 지하 1층에 넘실대던 물을 모두 밖으로 빼낼 수 있었습니다.
차올랐던 물이 다 사라지고 난 지하 1층을 바라보자니 여러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날 침수 상황이 생기고 오매가 이사장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이사장님이 '다친 사람이 없으면 됐다, 다행이다'라고 하시더라고요. 네. 맞습니다. 그 누구도 다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어요. 침수상황에 다행히 전기 차단기가 잘 내려가 전기가 차단되었고, 다행히 바닥 전기 패널 외 다른 전기의 고장도 없었습니다. 물에 잠겼던 전기용품들은 떠나보내야 했지만 교체 예정이었던 물품들이 대부분이었고요. 그렇지만 또 건물 관리에 신경쓰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누군가 배수 펌프의 고장을 미리 알아챘더라면, 누군가가 세면대 아래 호스 누수 상황을 살폈더라면 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코로나19로 여러 행사들이 취소되면서 장기간 사용이 저조했던 지하 1층을 좀 더 세심하게 살폈더라면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에 한동안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오매 소장은 자기 책임이라며 한동안 자책과 우울감에 사로잡혀 있었죠.
지난 11월 거의 한 달 동안 보수작업을 거쳐, 지하 1층은 다시 사용이 가능한 상태로 복구되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큰 비용을 들이게 되었지만, 또 비용을 들여 건물 관리의 책임에 대해 깨닫게 되는 교훈도 얻었다고 생각해요. 이번 기회로 상담소 공간 곳곳을 매의 눈으로 살피는 감각이 장착되고, 상담소 공간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스캔하여 적재적소에 비치하여 두고, 비상 상황 발생 시 가동되는 체계와 사전 훈련의 필요성도 느끼게 되었죠. 무엇보다 새로 지어진, 지난 5년 동안 잘 자리 잡은 상담소 공간에 대한 애정도 더욱 살아났습니다. 말끔한 외관, 딱 떨어지는 디자인보다 중요한 건 공간에 스며드는 익숙함과 편안함이라는 것도 느낍니다. 내 집 같지 않아 낯설었던 곳에 빈 구석이 보이니 더 가꾸고 길들여야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렇지만, 다시는 이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네요. 네. 다시는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