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한 해 동안 성문화운동팀은 <새로운 반성폭력 성문화 이정표, 적극적 합의> 프로젝트에 전력을 다하였습니다. 여러 멋진 성과물1이 만들어졌는데요. 그중에서 오늘 소개해드릴 것은 '새로운 반성폭력 성문화 이정표, 적극적 합의 가이드라인' <적극적 합의를 시작할 때>입니다. <적극적 합의를 시작할 때>는 '성적 동의 경험 및 인식'에 대하여 총 1,028명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대중 설문조사와 9인을 대상으로 한 심층 인터뷰를 분석한 결과를 비롯, 적극적 합의를 잘하기 위한 체크리스트 및 워크숍 안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작 배경
<적극적 합의를 시작할 때>는 성적 동의의 원칙, 지향, 기준으로써 적극적 합의가 무엇인지 제시하고자 만든 가이드라인입니다. 상담소는 2019년 '적극적 합의'의 다섯 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는데요. '적극적 합의'가 일상적인 관행이자 공적 판단의 기준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실제 시민들이 어떻게 '동의'에 대해 생각하고 성적 실천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했습니다. 상담소에서 그동안 이야기해온 적극적 합의 다섯 가지 원칙이 얼마나 수용되고 있는지도 궁금했습니다. 상담 현장에서 느끼는 것처럼 사람들은 동의 없는 성적 행위를 성폭력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데이트하는 상황이거나 친밀한 관계라는 사실 자체가 '동의 여부'에 어떤 영향을 만들어내는지, 성별에 따라 성적 동의에 대한 다른 경험을 만들어내고 있지는 않은지, 여성들은 어쩔 수 없는 수락을 더 많이 하는지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강조하고 싶었던 것
그동안 '적극적 합의'를 개념화하여 알리는 작업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조사를 설계하고 분석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적극적 합의는 성적 동의와 어떻게 다른 새로운 개념인지에 대한 질문과 토론이 내외부적으로 있었습니다. 가이드라인에서도 밝혔듯이 상담소에서는 동의가 쓰이는 현재의 방식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었습니다. 현실 세계에서 동의는 대체로 남성이 여성에게 일방향적으로 제안하고 수락하거나 거절하는 확인 절차를 의미하곤 합니다. 미디어에서 재현되거나 '성적 동의'라고 했을 때 머릿속에 쉽게 떠오르는 장면처럼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성적 행위에 대해서만 행위 직전에 이루어지거나 사실상 생략되고 마는 것입니다. 또한 이성애중심적인 로맨스 각본을 따르고 있어 현실의 여러 관계 및 실천과 어긋나있고, 행위자의 취약한 조건이나 행위자 간의 권력관계가 충분하게 고려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적 동의가 필요하다는 명제를 원칙 없이 강조하면 성적 동의의 현실적 한계도 함께 강조하게 될 수 있기에, 우리는 '적극적 합의'라는 명료한 기준점을 제안하였습니다. "상호적이고 자발적이고 평등한 과정"으로써의 성적 동의를 강조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민주적 성적 실천과 관계를 여는 이정표로써만이 아니라, 현실에서 성폭력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점 또한 중요하게 고려되었습니다. 우리나라 형법상 강간죄는 '동의가 있었는지'가 아니라 '상대방의 저항을 어렵게 할 만큼의 폭행·협박이 있었는지'로 범죄의 성립을 판단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성폭력은 권력이 있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권력이 없는 사람에게 폭행과 협박을 동반하지 않고도 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미투운동에서 접했던 '권력형 성폭력'은, 직장, 학교, 업계 안에서의 권력 차이가 그 원인으로 지목되었습니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에서 2019년 1월~3월까지 상담한 강간 사례 통계 분석 결과, 직접적인 폭행·협박이 없었던 사례가 71.4%에 이르는 현실입니다.
'성적 동의 여부'를 성폭력 판단기준으로 두지 않는 법적 현실에서, 대중 인식조사에서는 모순적인 결과가 나오기도 했습니다.2 '동의 없이 이루어진 성관계는 성폭력이다'라는 문장에 96.7%가 '그렇다', '매우그렇다'라고 응답했지만, '성폭력을 동의 여부로 판단하게 되면 성폭력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모호해진다'에도 비교적 높은 수치인 60.5%가 '그렇다', '매우그렇다'라고 응답하였습니다. 또한 동의를 '항상 또는 상황에 따라 묻는다'는 응답이 98.8%였지만, 암시적으로 또는 느낌으로 파악한다는 응답도 적지 않은 비율인 42.9%에 달했고, 이전에 성적 행동을 했던 맥락이 있을 때 상대의 동의 여부를 확인하지 않는 경향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성적 행위를 수락한 경험을 성별로 나눠 보면 응답자 중 여성이 남성보다 2배가량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런 조사 결과를 두고 가이드라인에서는 성적 동의 시 두 가지 지점을 강조합니다.
① 상대방의 의사는 말과 행동을 통해 명시적으로 구해져야 한다
② 어쩔 수 없이 수락한 성적 행위는 동의가 아니다.
"상대방의 의사를 정확하게 확인하는 것의 기본은 명시적으로 묻고 확인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선결되어야 하는 조건이 있다. 상대에게 맞는 방식으로 소통하는지, 상대방이 자신의 의사를 그대로 밝힐 수 있는 평등한 관계인지, 의식이 있는 상태인지, 참여하는 성적 행위의 성격을 상대방이 이해하고 있는지 등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런 조건들을 무시하고 '동의'가 상대방에게 'yes'라는 말을 받는 것이라고 이해되거나 행위 직전에만 이루어지면 된다고 여겨진다면, 명시적으로 확인했더라도 충분하지 않다" (45쪽)
"자유롭게 거절할 수 없는 상황에서 원치 않는 성적 행위를 수락한 것은 동의가 아니다. 일방이 지속적으로 성적 행위를 강요하여 죄책감이나 의무감을 심어 압박하는 상황, 한쪽의 행위자가 술을 마셔서 의식이 불분명한 상태인 상황, 어떤 행위에 참여하는지 정보가 없거나 성적 경험에 대한 차이가 심하게 나서 한쪽에만 주도권이 있는 상황 등에서 상대방의 의사가 무시, 제한, 방해, 제압될 수 있다." (57쪽)
충분히 알아봤다면, 준비하기! 체크해보고 토론해보기
적극적 합의를 위한 체크리스트와 워크숍도 꼭 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동의'에 대해 어디서부터 토론을 해나가야 할지 막막할 때, 보드게임 형식의 질문판을 주사위를 굴리며 따라가다 보면 풍성한 이야기의 장이 펼쳐집니다. 칸칸에 적혀있는 질문들은 그 자체로 새로운 사유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체크리스트는 구체적인 경험의 차원에서 내가 어땠지?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었지? 스스로를 충분하게 존중하고 있었는지? 차분하게 점검해볼 수 있습니다.
'동의'를 중심으로 존엄한 세계 재조직하기
성적 동의에는 나의 의사를 존중하라는, 나는 존엄한 사람이라는 선언적 힘이 있습니다. '동의'에는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이 동의를 제안하고 수락하는 모든 주체에게 평등하게 있다는 원칙을 필연적으로 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불균형한 권력관계 위에서 어떤 행위를 제안하고 수락하는 현실 속에 있지만, '동의 여부'가 당연한 명제가 된다면 권력을 가진 일방이 나의 의사를 무시하거나 제압하지 않도록 제동을 걸 수도 있습니다. 동의를 확인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질수록 동의 없이 이루어진 성폭력을 제대로 처벌하고 피해자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습니다. 가이드라인에서는 성적 동의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펼쳐갑니다. 동의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조건은 우리가 원하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존엄한 세계와 다르지 않습니다.
올해엔 무엇을 하나요?
올해는 2021년의 활동을 여러 현장에 알리려 합니다. <찾아가는 교육>과 <주제 및 대상별 워크숍>을 통해서 적극적 합의가 왜 중요한지 공감하고 실천의 실마리를 같이 찾는 것이 목표입니다. 여러 현장과 만나서 이야기 나누는 활동은 상담소에게 중요한 질문으로 돌아오고 적극적 합의 담론은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이 글이 나갈 때쯤엔 프로그램 참가 신청을 받는 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