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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의 목소리를 외면한 반쪽짜리 판결
  • 유랑 | 여성주의상담팀 활동가
재판부의 성인지 감수성에 따라 같은 사건의 판결이 달라진다? 성폭력은 다른 어떤 범죄보다 맥락, 위력 등 피해상황에 대해 넓게 고려해야 합니다. 그 필요성이 여실히 드러난 '해군 상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의 판결을 전합니다.

2022년 3월 31일은 무려 3년 4개월을 기다렸던 해군상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사건 대법원 선고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판사가 선고를 외친 시각, 현장에서는 기쁨의 환호성이 잠시 들렸다가 곧이어 아쉬움의 탄성이 흘러나왔습니다. 같은 사건에 두 가지 상반된 판결이 선고되었기 때문입니다.

2010년, 근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해군 여군이 직속상관에게 지속적인 성폭력 피해를 입은 일이 있었습니다. 상관은 성소수자였던 피해자에게 '남자 경험을 알려준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성폭력 피해로 인해 병원에 가야 했던 피해자는 함선의 총책임자였던 함장에게 피해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함장은 총책임자로서 조직 내 성폭력 피해자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오히려 피해자에게 또 다른 성폭력 가해를 했습니다. 피해자는 2차 피해에 대한 우려로 피해 사실을 몇 년간 이야기하지 못하다가 2017년, 고소장을 제출합니다. 그리고 2018년, 해군본부 보통군사법원 1심 재판부는 직속상관, 함장 두 가해자에게 각각 징역 10년, 8년을 선고합니다. 피해자의 용기 낸 고소가 가해자의 법적 처벌로 이어지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그해 11월, 놀랍게도 고등군사법원은 1심의 판결을 완전히 뒤집고 두 가해자에게 모두 무죄를 선고합니다.

같은 사건에 대해서 1심과 2심은 어떻게 이렇게 다른 판단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성폭력 범죄의 구성요건인 '폭행 및 협박'에 대한 두 재판부의 판단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법에서 말하는 '폭행 및 협박'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때리거나 욕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가해자의 유형력 행사를 모두 포함하는데 1심은 가해자가 피해자의 몸을 밀치거나 무게를 실어 누르는 등의 행위를 한 것을 '폭행 및 협박'으로 인정하였습니다. 반면, 2심 재판부는 가해자의 행위 자체보다 피해자가 당시 저항을 했는지에 더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피해자가 저항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에 이르지 않은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성폭력의 구성요건인 '폭행 및 협박'을 훨씬 더 엄격하게 해석한 것이지요.

'폭행 및 협박'이 있었는지 보려면, 가해자가 유형력을 행사한 경위, 피해자와의 관계 등 모든 사정을 종합하여 판단해야 합니다. 군대는 상명하복 질서를 근간으로 하는 수직적인 조직입니다. 특히, 좁은 배 안에서 단체생활하며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해군은 집단주의 문화가 더 강한 곳입니다. 이렇게 폐쇄적인 환경에서 모든 상황을 통솔해야 하는 군 상관의 위력은 더 강력해집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이러한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군 상관을 상대로 신임 장교였던 피해자가 어떻게 더 적극적으로 저항할 수 있었을까요? 또한, 피해자가 동성애자임을 이미 알고 있던 가해자는 뻔뻔스럽게도 피해자가 본인에게 호감이 있는 줄 알았다는 변명을 했습니다. 2심 판결문에는 이러한 가해자의 변명만 인용되어 있었고 피해자의 성소수자 정체성은 빠져있었습니다. 가해자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한 2심 판결은 성인지 감수성이 결여된 최악의 판결이었습니다.

그로부터 3년이 넘도록 대법원은 움직이지 않았고, 공동대책위원회와 시민들은 대법원에 공정한 판단을 촉구했습니다. 그리고 2022년 3월 31일. 대법원은 2차 가해자인 함장에게는 '파기환송'을, 1차 가해자인 직속상관에게는 '상고 기각' 판결을 내렸습니다. 파기환송이란, 고등군사법원의 무죄 판결이 잘못되었으니 이 판결을 파기하고 다시 판단하라는 뜻이고 상고 기각은 고등군사법원의 무죄 판결에 잘못이 없으니 (피해자 측의) 이의제기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즉, 함장에게는 유죄 취지 판결이, 직속상관에게는 무죄 취지 판결이 내려진 것입니다. 이 두 사건은 피해자가 같고, 피해자가 직속상관의 성폭력 피해로 도움을 요청했던 함장에게 추가 피해를 입었다는 점에서 밀접하게 연관된 사건임에도 각기 다른 재판부에 배정되어 다른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파기환송 판결을 했던 대법원 제1부는 성폭력 피해와 관련한 주요 부분이 일관적이고 구체적이므로 피해자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또한, 성폭력의 구성요건인 '폭행 및 협박'에 대해서도 피해자가 "초급 장교로서 지휘관인 피고인의 지시에 절대복종할 수밖에 없는 지위에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여 가해자가 반항을 곤란하게 하는 유형력 행사를 한 것이 맞다고 판단했습니다. 피고인이 피해자의 성적지향을 알고 있었다는 점도 언급되었습니다. 성인지 감수성을 갖고 사건을 바라본 판결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법원 제3부는 원심(고등군사법원)이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나 성립 요건을 판단한 것에 대해 잘못이 없다며 상고 기각을 했습니다. 즉, 성폭력이 발생한 상황과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않아 모두가 공분했던 부당한 2심 판결의 내용을 그대로 확정한 것입니다. 사건을 바라보는 대법원 제3부의 관점은 2심 판결과 같았습니다.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사건인데도 재판부가 어디인지, 판사가 누구인지에 따라 판결 선고가 달라진다면, 어떻게 법원을 신뢰하고 피해자가 용기 내 신고할 수 있을까요? 상고 기각 결정은 군대가 성평등한 상식의 공간이 되기를 바라는 시민들과 피해자의 목소리를 외면한 반쪽짜리 판결이었습니다. 하지만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반쪽 판결은 성인지 감수성을 바탕으로 고등군사법원의 판결을 뒤집은 판결이었습니다. 앞으로 대법원 선고에 따라 함장 가해자 사건을 다시 판단하는 파기환송심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그리고 피해자는 일상을 계속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작년에 군대 내 성폭력 보호 체계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던 현실을 기억합니다. 성폭력을 신고한 군인 피해자가 2차 피해 없이 일상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꾸준히 국방부와 군대를 지켜보고, 제대로 된 보호 체계를 마련하라는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파기환송심 결과가 가해자의 처벌로 이어질 수 있도록, 그리고 피해자가 2차 피해 없는 일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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