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후 칼 취업' 소망을 비웃듯, 대학을 수료한 지난 가을부터 제 삶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습니다. 일주일을 기준으로 하루나 이틀 상담소의 일을 돕고, 삼 일은 생활비와 월세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남은 주말 중 하루를 빼서 공장식 축산업과 동물실험의 피해생존돼지들을 돌보러 새벽이 생추어리에 갑니다. 장래에 활동가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기업은 이러한 활동을 경력으로 적어내면 낙제점을 주겠지요.(실제로 최근 상담소 자원활동 경력을 써내고 본 어느 기업 면접에서 한 남성 면접관은 "무서운 곳에서 일하지 않았냐"며 "지금도 녹음기를 켜놓고 있을 것 같아 말을 못 하겠다"고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처음 상담소를 알게 된 것은 성폭력 피해 사실을 인지한 상사의 추천을 통해서입니다. 그날 집에 돌아와 상담소의 홈페이지에 접속했어요. 그리고 상담 전화를 걸지 않고 자원활동가 신청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때 저는 아픔에 대해 이중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함께 그 고통을 인정하고, 해결해주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온전히 나 혼자 그 사실을 몰래 간직하고 싶었습니다. 혹여나 누군가가 함부로 말을 얹어 '아픔을 느낄 권리'를 빼앗아 가진 않을지 걱정했어요. 그러면서도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찾아간 것은 혼자 고통을 안는 것이 벅차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땐 스스로도 어떻게 요구해야 할지 모르는 무언가를 계속 세상에서 구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든 내 감정을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나에게 전해줄 사람을. 보이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다시 설명해주는 '공감'을 줄 수 있는 이들이 모인 곳을요. 저에게는 상담소와 생추어리가 그런 곳이었습니다.
상담소에 큰 간판이 없고 열림터를 비롯한 국내 성폭력피해생존자보호시설이 입소인 보호를 위해 그 위치를 공개하지 않고 있듯, 생추어리 역시 위치와 입소 동물의 구체적 수를 알리지 않고 활동합니다. 철저한 내부 단속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외부 위협과 지역 사회와의 갈등을 겪어온 점도 닮았어요. 둥근 지구에서 쉼터를 제외한 모든 공간이 생존을 위협할 때(어떨 땐 쉼터조차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나를 지킬 수단은 아무도 모르는 '노 웨어'(nowhere)로 숨는 것뿐인 건지 고민하게 된 것이 몇 달이 지났는데도 답이 요연합니다. 상담소와 생추어리는 같은 문제를 놓고 싸우고 있는데, 둘 다 해결할 수 없다는 부정적 인식이 강한 무력감으로 다가올 때도 많았습니다. 물론 우리는 고통을 매개로 하지 않고 공통점을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상담소에 오면, 새벽이의 발이 다 나았냐는 질문을 받고, 생추어리에 가면, 차별금지법 집회 발언1 잘 들었다는 격려를 받습니다. 경계를 넘나들며 모두의 안위를 살피는 사람들이 가장 큰 연결고리인 것입니다.
씁쓸하지만,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는 시간적, 물리적으로 다른 이의 삶에 다가갈 여유가 적습니다. 자발적 주고받음을 통해 만들어지는 관계에 대해 적으면서 마지막까지 물질적인 문제를 무시하는 것은 일종의 기만이 되겠지요. 저는 상호적인 동일시가 가능한 특권을 누린 운 좋은 사람입니다. 어느 곳이든 대부분 접근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지고 있고, 저를 둘러싼 다정한 관계 그물망은 저의 활동을 응원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쓰면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구조적 억압을 고민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실천으로써 소명감을 가진 자원활동가들과 다르게 너무나 일인칭의 세계에 빠진 글을 쓴 것 같기도 합니다. 거창한 이유도 마땅히 없으면서, 이미 받아놓은 제목을 고칠 자신도 없어, 별수 없이 그대로 두었습니다. 어려운 주제라고 툴툴거리다가 세상천지에 삶 내내 타인이 시킨 일만 하면서 사는 사람이 어디 있나 생각하다 보면,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하는 '자원' 활동이 궁금해집니다.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든, 친구나 가족을 위한 것이든, 얼굴 모르는 사람을, 얼굴을 잃은 비인간 동물을 위한 것이든 말이에요.
1 3월 17일,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여성의전화가 주관한 <평등 없는 국회에 한 끼 대신 한 마디!> 집회. 상담소 홈페이지와 블로그에서 후기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