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초, 한국성폭력상담소는 흥미로운 제안을 하나 받았습니다.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오늘의 풍경'에서 조금은 특별한 협업을 함께 해보자는 것이었어요. 이름하여 '상호돌봄의 디자인'! 올해에는 적극적 합의 아카이브 웹페이지 제작으로 성문화운동팀과 합을 맞춰보았는데요. 새로운 경험과 관계 맺음에 상담소를 초대해준 '오늘의 풍경(이하 '오풍')'의 인아, 희원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눠보았습니다.
산_ 반갑습니다. 오풍의 새로운 협업이 뭔지 먼저 설명해주시겠어요?
희원_ '상호돌봄의 디자인'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요. 보통 외주란 디자이너에게 어떤 내용을 전달하고 결과물을 받는 방식인데, 디자인이라는 게 사실 맥락이 중요해요. 클라이언트와 디자이너가 전체 프로젝트의 맥락 속에 같이 참여하면 어떨까, 질문을 던져보게 됐어요. 서로가 서로의 의견에 의존하는 상호 디자인 협업 방식인 거죠.
산_ 필요성을 느끼고 그걸 실현한 게 참 멋지고 대단하네요. 처음 제안이 왔을 때, '돌보는 디자인'이라는 문구가 있었던 기억이 나요. '돌봄'이라는 단어로 표현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인아_ 컴퓨터 앞에 앉아서 어떤 아트워크를 만드는 것이 디자인의 전부라는 생각이 많은데, 그 외에도 필수적인 업무가 많아요. 그런데 그게 디자이너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평가절하되어 있어요. 전에 다른 스튜디오에서 일했을 때 그런 일을 여성 디자이너들만 하는 걸 관찰한 적이 있고요. 분명 필수적인 업무인데 이렇게 저평가되는 것이 돌봄노동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산_ 그렇군요. 지금까지 이 '상호돌봄'이 어느 정도 실현이 되었나요?
희원_ '실현이 됐다'기 보다는, 이 원칙을 지키려 하면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상황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감추려는 방식이 아니라 같이 해결하려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산_ 처음에 웹페이지 내용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각자 생각하던 상이 달라서 갈피를 못 잡았다고 들었어요. 이때 오풍에서 제안한 퍼소나 워크숍(Persona Workshop)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하던데, 퍼소나 워크숍은 어떤 건가요?
희원_ 어떤 서비스나 제품을 만들 때, 현실에서 정말 이것을 쓸 것 같은 구체적인 인물을 정해보는 거예요. 적극적 합의라는 개념을 전달하는 작업을 하려는데 각자의 머릿속에 있는 상을 확인하는 게 너무 어려웠어요. 그래서 퍼소나 워크숍을 통해 누구에게 이 웹페이지를 전달하려는 것인지 구체적인 인물을 만들어보기로 했죠.
산_ 성문화운동팀도 저도 오풍 덕에 퍼소나 워크숍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된 것처럼 상담소 활동가들이 오풍과의 협업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오풍은 어떠신가요?
인아_ 제가 디자이너로서 큰 도전을 했다는 것을 방금 깨달았습니다! (웃음) 바로 웹디자인을 했다는 점인데요. 저는 원래 전문적으로 웹디자인을 하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새로 배워가며 한 것이라서 제게도 큰 도전이었어요. 그래서 간단한 걸 해내고도 큰 성취감을 느꼈습니다.
산_ 함께 일하면서 기억에 남은 에피소드가 있다면 뭘까요?
희원_ 저희에게는 익숙한 툴킷이라는 용어에도 에피소드가 있는데, 협업의 마지막 순간까지 '툴킷'이 무엇인지 서로 생각하고 있던 게 달랐다는 걸 알고 충격을 받았었죠. 저희는 웹페이지 자체를 툴킷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활동가분들이 전화로 '이제 이 웹페이지에 올라가는 툴킷은 어떤 게 필요한 거냐'고 물어보셨어요. '이것이 툴킷이다. 이 이상 뭘 더 어떻게 하냐'며 급발진하는 저를 활동가분이 안심시키고 다행이라고, 또 뭘 따로 만들어야 하는 줄 알고 본인들도 걱정하고 있었다고(웃음) 그때가 10월 말이었거든요. 정말 마지막까지 우리가 결과물에 대한 상이 달랐다는 게 너무 놀라웠어요. 이렇게 얘기하니 재밌고 웃기네요.
인아_ 희원이 그 통화를 하고 와서 제게 이야기해줬던 게 기억 나네요(웃음).
산_ 상담소가 이야기하는 의제가 여럿 있잖아요. 혹은 인아 님이나 희원 님이 생각하는 여성운동의 의제도 있을 테고요. 상담소와 함께 고민해보고 싶은 의제가 있을까요?
인아_ 저는 상담소 활동 중 가장 전통이 있고 강력한 것은 생존자말하기대회라고 생각해요. 생존자라는 정체성을 드러내고 당당히 두 발 딛고 설 수 있는 판을 만드는 활동인 것 같아요. 그 전통이 길어서 그 길을 되짚고 발굴하고 시각화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희원_ 저는 예전에 책 『보통의 경험』을 읽었어요. 지금 읽어도 그럴 테지만 정말 필요하고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이더라고요. 그래서 이 책이 더 많이 알려지고 팔렸으면 좋겠고 너무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개정판이 나온다면 함께 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산_ 두 아이디어 모두 정말 좋네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인아 님과 희원 님은 5년 후의 자신을 상상해보신 적이 있나요?
인아_ 저의 좌우명은 카르페디엠입니다(웃음). 늘 오늘을 살아와서 이후를 생각한 적이 없어요.
희원_ 5년 후를 생각한다면 이렇게 살 수 없습니다(웃음). 하지만 뭐, 인생이 여태까지 더 나빠진 적은 없었기 때문에 더 좋아질 거로 생각해요.
산_ 상담소도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함께 오래오래 일해요(웃음). 귀한 시간 내어 인터뷰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