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상담소 활동가들과 친족성폭력피해생존자들은 친족성폭력과 정상가족이데올로기를 긴밀하게 엮어가며 다양한 자리에서 필요한 쟁점을 만들었습니다. 상반기에는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운동 전략찾기 연속간담회를 열어, 21대 국회에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및 연장 법안이 4개가 발의되어 있음에도 법적 안정성, 형평성이라는 이름에 가로막혀 있는 현실에 개입하고자 했습니다. 하반기에는 제3회 친족성폭력피해자 생존기념축제 〈좋지 아니한 家 : '정상가족' 바깥의 우리들, 연결되자!〉를 준비하여 일상적 위협과 폭력의 공간이었던 '정상 가족'을 벗어나 새로운 관계와 삶을 구축해온 우리의 생존을 축하하고, 다양한 정상가족 바깥의 존재들과 새로운 가족경험을 시도했습니다.
1년간의 활동은, 친족성폭력을 은폐하고 유지시키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주목함으로써 피해 회복을 위한 최소한의 법적 권리인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너머·이후에 어떤 사회를 요구하고, 누구와 함께 목소리를 낼 것인지 조직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친족성폭력 의제에 관한 문제의식을 펼쳐놓고 많은 사람과 대화한 기록을 공유합니다.
상반기 간담회는 우리사회가 가족 관계 내 성폭력을 잘 모르는 것 아닐까 질문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언론에서 친족성폭력을 다룰 때 '정상적'인 가족과는 다른 일탈적인 사건으로서 선정적으로 보도하고, 이는 결과적으로 가족과 폭력의 연결점을 부인하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에 더해, 국가는 가족 내 폭력의 발생구조에 대한 이해에 기반하여 법과 제도를 만들기보다, '가족 유지'라는 목표를 우선하면서 가족 내 성폭력을 인지하고, 고발하고, 해결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상담소는 가족제도와 정상가족 규범이 폭력을 은폐하고 유지시키는 구조임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8월 3일에 열린 2차 간담회 자리에서 한국여성의전화 송란희님은 이성애정상가족제도가 폭력의 정상화에 어떤 기여를 하는지 질문해야한다고 짚으며, 가정폭력대응운동 현장에서 길어온 고민을 나눠주셨습니다. 가정폭력이 가시화되고, 가정폭력처벌법 제정이 논의되던 시기 한국사회의 반응은 정상가족제도의 실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언론은 가정폭력이 법적으로 처벌해야하는 범죄가 아니라 '가정의 평화'라는 상호의무를 토대로 집안 내에서 '원만하게' 해결해야할 일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주장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국지전인데, 여기에 법이라는 핵폭탄을 쓰는 격"이라며 가부장적 구조로 인한 가정 내 폭력을 사소화하였습니다. 이처럼 가족제도는 폭력을 폭력이라고 이름붙이지 않고, 사랑이나 돌봄, 훈육 등 다른 단어로 대체함으로써 가족 내 폭력을 가능하게 하고 은폐시킵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을 유지시키기 위해 보상기제를 통해 제도를 재생산하기도 합니다. 가족임금, 법적 가족을 중심으로 주택을 우선공급하는 방식 등으로 특혜를 주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이렇게 가족제도를 유지시키는 이유는 지금의 가족제도를 통해 이득을 얻는 권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7월 18일 1차 간담회에서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장서연님은 '법이 호명하는 가족의 의미와 한계'라는 연구(가족구성권연구소. 2019)를 통해 한국의 법에서 "선 가정 후 사회보장"의 관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현행 법률 1,400여개 가운데 240여개에서 가족이 언급되고 있었고, 현행법은 돌봄과 부양을 가족의 기능으로 정의하며 출생에서 사망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삶 전반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쉼터 열림터 활동가 수수님은 이처럼 복지와 보호가 가족에 묶여있을 때 가족을 고발한다는 것은 안전한 복지로부터 이탈하게 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친족성폭력 피해자들이 법적 해결과정이 종료되더라도 정상가족 밖에는 삶의 기반도 자원도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생존의 문제를 맞닥뜨리게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친족성폭력피해 생존자로서 심이경님은 이를 "피해자가 생존하려면 가족 안에 머물러야 하고 성폭력에 대처하려면 가족을 떠나야 하는 모순된 상황에 놓여있다"는 말로 설명했습니다.
송란희님은 친족성폭력을 비롯해 가정 내 폭력을 문제제기하는 운동의 핵심전략은 다른 종류의 생활방식을 배제하고 '가족'에 특권을 부여하는 모든 국가정책을 변화시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대표적으로 가정유지를 근간으로 하는 가정폭력처벌법의 목적조항을 개정하고, 사회복지정책 집행의 대행자로서 가정의 기능을 약화시키는 등 가족이 덜 필수적일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궁극적으로 필요하다고 설명했습니다.
수수님은 애정과 친밀성이라는 감정이 가족단위에 묶여있는 문제에도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짚었습니다. 친족성폭력피해생존자를 지원하면서 마주하는 어려움 중 하나는 가족의 부재에서 오는 외로움을 호소할 때라고 설명하며, 사건의 법적 해결 이후에도 많은 피해생존자는 근원적인 친밀성을 상징하는 관계를 상실했다는 생각을 극복하기 위해 분투한다는 점을 상기시켜주었습니다. 가족 관계 외의 친밀성을 우리사회가 그다지 장려하고 있지도, 구축하고 있지도 않기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가족제도를 벗어나 돌봄과 애정의 관계를 만들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요구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해주었습니다.
11월 25일 보신각과 광화문에서 진행된 친족성폭력생존기념축제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친족성폭력피해생존자에게 필요한 권리가 정책적, 의료적인 지원뿐 아니라 소통하고, 의지하고, 돌봄을 나누는 관계임을 요구했고, 참여한 생존자와 연대자들은 정상가족 관계 바깥에서 서로의 곁이 되는 공간을 직접 열었습니다. 지금까지 가족규범을 넘는 존재들은 가족제도 안에서의 불평등을 가장 먼저 체감하며 가족제도와 불화하면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모색해온 이들1임을 기억하며 '이상한 정상가족'의 증언자이면서 동시에 자기 삶을 오롯이 일구어온 개척자로서의 삶을 드러내고 더 많은 바깥의 존재들이 서로 연결될 권리를 주장한 것입니다.
앞으로도 친족성폭력생존자들과 상담소는 '그런 가족은 필요없다!' - '가족'해방 프로젝트를 더 많은 시민들에게 알리고 나누며 다른 일상을 살아갈 권리의 공간을 넓혀갈 예정입니다. 많은 지지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1 김순남(2023) 가족을 구성할권리(혈연과 결혼뿐인 사회에서 새로운 유대를 상상하는 법). 오월의 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