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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65건의 강간 상담이 들려준 이야기 : 전국성폭력상담소 2022 폭행협박없는 성폭력 통계분석
  • 오매 |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법과 제도는 사회의 인식 변화를 견인하는데 큰 역할을 합니다. 현실의 성폭력을 담지 못하는 현행 '강간죄'의 구성 요건은 하루빨리 정조의 침해라는 가부장적 시선에서 벗어나 '동의여부'로 개정되어 성적 권리의 침해로 해석해야 합니다.

"어떤 사례가 있나요?" 언론기자, 정부나 국회 관계자가 상담소에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죠. '사례'는 법, 정책 개정 필요 설득에서 가장 직접적 자료 중 하나입니다. 반대편에는 상담전화 너머 피해자의 질문이 있습니다. "이런 것도 상담해도 될…까요?" 현재의 법은 여전히 남성중심적이고 보수적이어서 피해자들이 겪는 실제의 성폭력을 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이하 전성협)는 2019년 71.4%의 강간 상담이 직접적 폭행과 협박 없이 발생했던 내용임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1 '강간죄'개정을위한연대회의가 처음 활동을 시작하면서 그 해 1-3월까지의 상담을 집계한 결과였습니다. 무려 70%가 넘는 성폭력이 현재 법이 외면하는, 폭행협박이 직접적으로 있지 않은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성폭력을 실행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 중에서 술이나 약물, 수면 상태를 이용하는 사건, 장애를 이용하는 사건은 어느 정도일까요? 불송치, 불기소 결정시 이를 어떻게 고려하고 있을까요? 좀 더 자세히 통계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2023년 4월 전성협 정책대응팀 10개 상담소 대표들은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안젤라홀에 모여 대규모 통계분석을 위한 입력틀을 만들었습니다. 수정 보완, 테스트를 거쳐 전국 136개 전성협 상담소 중 119개(87.5%)가 참여한 통계분석이 여름에 이뤄졌습니다. 총 4,765건의 강간상담. 바쁜 업무 와중에 쉽지 않은 일이지요. 입력도, 수합도 말입니다. 전성협은 그동안 성폭력과 연결된 법 정책 제도 변화를 위해 자료생산, 연구협력, 의견개진에 열심이어 왔습니다. 형법상, 성폭력 법체계상 강간죄 판단기준의 변경은 오랫동안 상담현장에서 느껴온 필요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과제입니다. 그러니 쌓여온 '협업의 근육'이 발휘될 수밖에요.

피·가해자 관계와 폭행·협박 현황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2022년 강간상담 통계 결과 및 분석을 살펴볼까요.2 전체 4,765건 중 장애 있는 경우는 19.1%, 술·약물·수면에 의한 준강간은 29.4%를 차지합니다. 피·가해자 관계를 먼저 보지요. 아는 관계3(57.9%), 친밀한 관계(13.6%), 친족 친인척(10.2%), 모르는 사람(6.5%), 미파악 기타(11.8%) 순이었습니다. 세부항목 순위별로 보면 채팅상대자 12.8%, 동급생·선후배 12.4%, 단순대면인 11.4%, 직장관계자 10.3%, (전·현)애인 8.7% 순이었습니다.

장애 있는 피해자
19.1%
준강간(술·약물·수면)
29.4%
아는 관계
57.9%
직접 폭행·협박 없는 강간
62.5%
직접 폭행·협박 있는 강간
20.7%
전성협 2022년 강간상담 통계 주요 수치 (전체 4,765건)

폭행·협박으로 가볼까요. 직접적인 폭행·협박 있는 경우 20.7%, 없는 경우 62.5%, 미파악 16.8%였습니다. 2019년보다 다소 낮아졌으나 직접적인 폭행·협박 없는 강간은 여전히 높기만 합니다. 폭행·협박 있는/없는 경우 피·가해자 관계를 살폈습니다. 세부분류 중에는 채팅상대자가 가장 많았는데 채팅상대자의 경우 피해자에게 장애가 있는 비율이 평균 19.1%보다 훨씬 높은 28.6%였습니다. 온라인에서 '여자들 홈런 치는 방법', '술 마시고 강간하고 고소당하지 않는 법' 등 성폭력 노하우 게시글을 떠올려보면 채팅상대자의 높은 비율, 그 중 장애있는 피해의 높은 비율을 추적하게 됩니다. 피·가해자 관계 중 동급생·선후배·친구, 단순대면인, 직장 관계자의 경우 '준강간' 비율이 평균보다 훨씬 높습니다. 술·약물·수면 상태를 많이 이용하는 상황들입니다. (전·현)애인은 직접적 폭행·협박이 있는 경우가 평균 20.7%을 훨씬 상회하는 35.6%를 차지했습니다. 친밀한 관계여서 폭행·협박이 필요치 않았으나, 오히려 친밀한 관계여서 폭행·협박이 더 쉽게 동원되었습니다.

피해 당시 세부 상황도 살펴봤습니다. 주관식 응답집계는 자료집을 꼭 참고해주시고요, 객관식 응답 순서는 강요 > 회유 > 지위 > 속임 > 그루밍 > 폭언 순이었습니다. 폭행·협박 없는 성폭력은 회유가, 장애 있는 성폭력은 강요와 회유가 비슷하게, 준강간은 강요가, 채팅상대자는 회유, 전·현애인은 강요, 친부모는 지위이용, 모르는 사람의 경우 속임이 가장 많았습니다.

신고·기소·불송치 현황

집계된 것은 성폭력상담소 지원을 요청하는 상담들이었습니다. 이런 특성상 신고·고소한 비율 67.9%, 신고·고소하지 않은 비율 21.2%, 미파악 10.9%였습니다. 송치, 불송치, 불기소, 이의제기도 봤습니다(전체 강간상담 대비 기소율 24.7%, 신고·고소한 강간상담 대비 기소율 36.4%). 검경수사권 분리 결정 이전에 송치가 이루어진 사건도 있기에 다소 복잡했지만 찬찬히 짚어 불송치 571건, 불기소 197건에서 '이유'를 추렸습니다.

불송치 — 폭행·협박 미입증
19.3%
불송치 — 피해자 진술 신빙성 의심
17.6%
불기소 — 피해자 진술 신빙성 의심
18.4%
불기소 — 폭행·협박 미입증
17.0%
장애인 불송치 — 진술 신빙성 의심
26.0%
불송치(571건)·불기소(197건) 주요 이유

불송치는 폭행·협박 입증되지 않음 19.3%, 피해자 진술 신빙성 의심 17.6%, 불기소는 피해자 진술 신빙성 의심 18.4%, 폭행·협박 입증되지 않음 17.0%으로 두 이유가 가장 높습니다. 장애 있는 경우는 피해자 진술신빙성 의심이 26.0%로 높아졌습니다(불송치 이유 중). 피·가해자 관계로 보면 친족 친·인척은 상담 > 불송치 > 불기소로 갈수록 비율이 적어집니다. 그런데 (전·현)애인, 과거 배우자, 채팅상대자, 직장 관계자는 불송치, 불기소에서 비율이 점점 높아집니다. 친밀도가 높은 관계에 대해 불송치, 불기소 비율이 높은 것은 현실 성폭력에 대한 수사기관의 편견, 낮은 성인지 감수성과 수사의지를 드러냅니다.

21대 국회 토론회 현장 (2023.7.25)
21대 국회 토론회 현장

법은 70년 전의 '정조에 관한 죄'의 이념과 기준 상태이지만, 성폭력 '문화'와 '구조'에 저항하는 이들은 지금, 여기의 성폭력을 알리고 이야기해야지요. 2024년에도 계속해보겠습니다.

1 2019년 7월 9일 '강간죄'개정을위한연대회의 2차 의견서 https://change297.tistory.com/6

2 2022년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강간상담 통계 결과 및 분석은 2023년 7월 25일 국회에서 있었던 〈21대 국회 토론회: 폭행협박에서 동의여부로, 형법 297조 강간죄 구성요건 개정 쟁점과 과제〉 토론회에서 나무(장애여성공감 성폭력상담소)님의 발제로 처음 공개되었고, 토론회 자료집에는 통계분석 결과 종합버전이 수록되어 있음.

3 친족, 친·인척, 친밀한 관계 이외 채팅상대자, 동급생 선후배 친구, 단순대면인, 직장관계자, 동네사람, 교사 강사, 서비스 제공자, 종교인, 복지시설 관계자, 의료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