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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왕자가 된 소녀들> 관람기 - “60년 전에 태어났다면 난 아마도 혈서 전문가”
  • 미쓰제이 | 대학 강사
삶의 돋보기

영화 <왕자가 된 소녀들> 관람기

“60년 전에 태어났다면 난 아마도 혈서 전문가”

미쓰제이 | 대학 강사

‘그녀’가 내 마음에 처음 들어온 그 날,

아동극 ‘피터팬’. 극의 내용이 기억에 없는 걸 봐서 그냥 그런 아동극이었으리라. 극이 끝난 후 우연히 분장실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극 중에서 남자였던 주인공 ‘피터팬’이 옷을 갈아입고 있던 중이었고 나는 브라 차림의 ‘그녀’를 보게 되었다. [슬로모션] 그는 무안한 듯 옷을 스윽 입었고, 머리를 슥-슥- 정리하고, 나를 보고 씨이익 웃었다.

주인공의 미소가 강렬하게 내 가슴에 꽂힌 그 찰나의 순간 이후 나는, 나를 매혹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무대 위의 중성적인 여자, 그들의 목소리와 몸짓, 때론 기타를 든, 때론 마이크를 잡은. 그리고 쭉, 그러니까 대략 25년 이상, 그 여인들의 매력에 빠져 지내고 있다. Mel C, Melissa Etheridge, Ani Difranco, Otep, Skin, 최근의 엠버까지. 물론, 결국 같은 장르라고 생각하는 카운트테너의 목소에도 매혹되었고, ‘마지막 카스트라토’라 불린 모레스키의 음반은 이미 여고생 시절 일본에서 공수해 소장했다. 그들의 비밀, 역사, 사생활을 하나라도 더 알아보겠다고 ‘빨래집게 놓고 A자 알던 시절’부터 영어 잡지를 뒤적이고 월드와이드 팬 페이지를 기웃거리는 것이 오랜 시간 삶의 유일한 낙이었다. 그 열정이 조금만 더 컸다면, 혹은 그 열정이 누군가의 열정과 만나 동반상승 효과를 발휘했더라면, 나는 아마도 가출을 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영화 <왕자가 된 소녀들>을 보고 확신했다.

영화 <왕자가 된 소녀들 (The Girl Prince)>

<왕자가 된 소녀들>은 1950년대에 인기몰이를 한 여성들만의 창극, 여성국극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할머니들의 기억 속에나 아스라이 남아있는 장르라 생각했던 여성국극이 아직도 명맥이 유지되고 있으며, 당대에 이름을 날린 배우들이 여전히 생존해 무대에 오른다는 사실을 알려준 놀라운 영화이다. ‘여성들만의 창극’이라는 것은 여성들이 극중의 남자 역할도 모두 한다는 의미이다. 그런 면에서 여성국극에서는 남자 역할을 하는 배우들이 특별히 더 주목받는 것 같다. 박력 있는 목소리로 왕자 혹은 장군 역할을 하는 배우들이 기실 ‘여자’라는 사실은 대중들에게 놀라움을 준 것 같으며, ‘나 같은’ 사람들을 매료시켰을 것이다.

영화 <왕자가 된 소녀들> 포스터

‘왕자가 된 소녀’라니! 지인으로부터 영화의 제목을 처음 소개받는 순간, 나는 이 영화가 ‘내 장르’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영화를 세 번 보았다. 처음 영화를 보았을 때는 귀신같이 이옥천 선생님만 눈에 들어오는 경험을 했다. 조끼를 입고 병풍 앞에서 이야기하시는 선생님 모습에서 스크린을 뚫고나오는 ‘오라(aura)’를 함께 보았다. 도포자락 휘날리며 적벽가의 한 대목을 하시던 모습에선 거의 숨을 쉴 수 없는 지경이었다. 집에 와서 네이버에 올라 있는 이옥천 선생님의 ‘흥겨운 민요 메들리 40’을 반복 재생하다 지쳐 다음 상영 날짜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두 번째 보게 된 영화.

이옥천 선생님을 보러 갔는데, 조금앵 선생님, 허숙자 선생님, 김혜리 선생님의 재담에 매료되었다. (카메라 앞이었을 텐데) 어찌나 말씀들을 잘 하시는지 ‘이것이 바로 쇼맨(showman)의 전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은 명장면들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앵 선생님이 자신이 얼마나 남자 연기를 잘 했는지, 박력 있는 남자 연기란 어떤 것인지 설명하던 장면, 허숙자 선생님이 혈서를 보내던 당시의 가열된 팬들의 열기를 설명하던 장면, 김혜리 선생님이 여성국극의 전성기에 명성을 얻고 돈도 번 사람들이 여성국극이 쇠퇴기를 맞이하자 여성국극에서의 경력은 숨겼던 것을 설명하며 “가소롭지!”라고 내뱉으신 장면 등. 이 같은 강렬한 장면들이 지하철을 타고가다 문득, 책을 읽다 문득, 문득 문득 떠올랐고 영화를 다시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앵 선생님이 지하철을 타시던 장면은 그래서 어떻게 이어졌지? 신부귀 선생님들은 전성기를 어떤 표정으로 설명하셨지?

그런데 세 번째로 영화를 보니 배우 선생님들 뿐 아니라 팬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분명 수줍은 표정으로 “우리는 결혼할 때 남편 될 사람한테 이런 언니가 있는데 괜찮냐, 물어보고 결혼했어요. 호호호”라며 팬의 자격으로 인터뷰 하셨던 분인데 무대 뒤에서 선생님들에게 분칠을 해 주고 계신다. “아유, 시부모님 밥 차려 드리고 공연 보러 나다녔죠.”라고 볼을 붉히던 분이 국극보존회 신년회에서 걸걸한 목소리로 “자, 건배!”를 외치고 계신다. 그나마 여성국극의 명맥이 이렇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보이지 않는 노고 덕이란 생각이 들었다. 늘 음식이 넘쳐나던 뒤풀이 자리는 팬들의 한나절 동안의 땀방울로 가능했던 것이리라.

석유로 화장을 지우던 시절, 시커먼 가제 수건을 뽀얗게 빨아다준 팬들이 있었음에 전성기가 가능했을 테니 팬들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궁금하다. 여배우들에게 매혹되었던 자신을 어떻게 설명하고 해석하고 살았을지, 배우가 되어 무대 위에 서고 싶었던 적은 없는지, 이 여자들과의 관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학교 다닐 나이도 잊고, 시집갈 나이도 잊고” 그렇게 한 평생을 함께,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배우와 팬으로 관계를 이어갔다니. 또 다시 큰 박수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이들일 텐데, 다음 네 번째로 이 영화를 보게 된다면 아마 영화 속에 등장한 오랜 국극 팬들이 영화관을 방문하는 날이 아닐까. 이 분들의 열정에, 인생에 꼭 기립&박수를 보내고 싶다.

영화 <왕자가 된 소녀들>은 인디플러스, 아리랑시네센터, 쇼타임즈 등 극장 상영을 거쳐 6월 27일에는 광주 극장에서도 개봉한다. 인디플러그(indieplug.net)의 웹다운로드 서비스를 통해 만나볼 수도 있다. 여러 종류의 재미를 느낄 수 있을 테지만 특히 여자스타의 여팬이었음에 숭고해지는 기분을 느끼고 싶다면, 이 영화를 놓치지 않길 바란다. 내 생각에 이 영화는 팬질의 역사교과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