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림터 24시 }
조화 | 본 상담소 부설 열림터 활동가
나는 오후 6시에 출근한다.
사람들에게 내 근무시간을 얘기하면 “왜 밤에 일해?”, “잠은 언제 자?”, “낮엔 뭐 해?”라고 되묻는다. 24시간 운영되어야 하는 쉼터의 특성 때문에 야간에 생활인들과 함께 생활해야 할 활동가가 필요하다. 열림터 활동가 면접에서 근무시간을 들었을 때 (오후 6시~오전 9시) ‘낮 시간을 잘 이용해 보자’는 마음에 오히려 좋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낮 시간을 알차고 즐겁게 활용하는 것은 맘처럼 쉽지 않았다. 거기에 밤새 열림터를 지키며 생활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야간 활동가로 1년 6개월을 활동할 수 있었던 열림터의 매력을 함께 나누고 싶다.
열림터에서 나는
저녁을 먹은 뒤 생활인들은 게임을 하자거나 놀아달라고 나를 조른다. 나는 하던 일을 잠시 미루고 마지못해 놀아주는 척 하지만 사실 생활인들과 노는 건 참 재미있는 일이다. 수다를 떨기도 하고, 함께 운동을 하면 서로의 관계가 조금 더 이완되는 기분이다. 고민이 있는 생활인은 숙직방 문을 두드리며 상담을 요청한다. 그러면 나는 조용히 듣기도 하고, 고민을 함께 나누며 대화하기도 한다. 늦은 밤이 되면 학생들은 다음날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성인들은 다음날 스케줄을 확인하며 하루를 마친다. 생활인들에게 열림터는 집이다.
성폭력피해생존자들이 생활하는 열림터는 집처럼 편한 공간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는 치유의 과정도 함께 포함되어있다. 학교나 직장 생활을 하며 일상과 함께 자신의 치유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생활인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안에 나도 조용하게 녹아서 보탬이 되고 싶다.
작은 고민
밤에 혼자 열림터를 근무를 하다보면, 열림터에서 발생하는 여러 일들에 대해 혼자 결정 하고, 그 결정에 책임을 져야 하는 순간이 부담이었던 것 같다. 생활인들과 관련된 것은 사소한 것이 하나도 없기에 진중한 고민을 필요로 하는 순간이 많았다. 다행인 것은 ‘스마트한 폰’으로 열림터 활동가들과 실시간으로 단체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의견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 또한 마음이 편치 않다. 쉬어야할 활동가들과 밤까지 생활인 이야기를 해야 하니 말이다.)
열림터는 평균 여덟 명의 생활인들이 함께 산다. 그 개개인의 개성이 얼마나 다른지 매번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생활인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나지만 어디까지 이해해야 할지, ‘선생님’이라는 역할의 경계를 어디까지 둬야할지를 잘 몰라 어려웠다. 늘 나를 고민 하게 하는 건 ‘적정선이 무엇인가’였던 것 같다. 적절한 결정이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항상 허덕이는 나를 발견 한다.
살을 맞대고 산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함께 살 때야 좋지만 그렇게 지내다 퇴소하는 생활인이 있으면 그 허전함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방법을 아직도 찾지 못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퇴소하는 생활인 걱정하기도 전에 새롭게 입소하는 생활인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다. 헤어짐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새 만남을 준비하는 것 같아 늘 아쉬움이 남는다.
사건은 밤에 많이 일어난다
야간활동을 막 시작할 때쯤 새벽에 몰래 가출을 했던 생활인이 있었다. 함께 지낸 시간은 일주일 정도였고, 낯선 감정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온데간데없고 문도 다 잠겼는데 증발한 것 마냥 없어진 것이었다. 나갔을 것으로 추정된 시간에 나는 분명 깨어있었는데 살금살금 몰래 나갔던 것이다. 생활인 한 명이 가출한 것에 대한 책임과 그 아이 걱정으로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그 일을 계기로 잠귀가 더 밝아졌다. 이 외에도 생활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활동가를 당황스럽게 할 때가 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심장이 더 단단해지고 이성을 빨리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체득하게 되었다. 고마운 녀석들.
남들 일 할 때 혼자 놀기
사람들은 종종 낮에 뭐하냐고 묻는다. 취미가 많은 나는 그 날 기분에 따라 하고 싶은걸 고른다 (피아노, 펠트공예, 책읽기, 흙피리 불기, 강아지와 산책하기, 잠자기, 사람 만나기, 십자수, 그림그리기, 맛있는 음식 먹기 등). 남들이 일 할 때 혼자 놀 수 있는 건 나에게 큰 위안이다. 낮의 휴식은 밤에 일할 수 있는 원동력을 주는 충전의 시간이다. 특히나 혼자서 무언가 할 때 까무러치게 행복할 때가 있다. 낮에 잘 쉬고 저녁에 생활인들과 잘 지내고 아무 일(?) 없으면 그것이야 말로 나의 행복한 하루인 것이다.
함께 성장하기
비혼을 선택한 나는 항상 마음속으로 혼자 살아갈 인생을 준비한다. 그동안은 부모님의 도움을 받지 않는 것, 주변사람들이 모두 결혼하고 혼자가 되는 것에 대한 걱정을 하며 살았다. 그런데 열림터 활동을 1년 넘게 하면서 독립성이 강해졌다. 늘 집에서만 자던 내가 집 밖에서도 잘 자고, 집의 시설물이나 관리에 관심도 없던 내가 망치질도 잘하게 되었다. 밥도 늘 차려진 것만 먹다가 스스로 만들어 먹을 수도 있게 되었고, 무엇보다 혼자 살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없어졌다. 밤새 열림터의 안전도 책임지다 보니 점점 용기가 생기는 나를 발견한다. 열림터가 아니었다면 사람과 섞여 치열하게 살아가는 방법도 몰랐을 것이다. 생활인들이 열림터에서 자립을 준비할 때 옆에서 나도 함께 자립을 준비한 것 같다. 열림터는 생활인, 활동가 할 것 없이 모두가 성장할 수 있는 그런 곳이다.
때로는 피곤에 지쳐 잠들기도 하고, 생활인과의 갈등으로 방에서 혼자 울기도 하고, 생체리듬이 깨져 건강도 안 좋아지고. 어쩌면 쉬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생리통에 반쯤 쓰러진 나에게 따뜻한 차 한 잔과 말없이 찜질기를 가져다주는 생활인들과 이렇게 마음을 나눌 수 있다면 이것으로 충분하다.
※ 조화 조화로움을 추구하지만 조화롭지 않은 여자입니다. 지금은 치킨 한 마리와 녹차라떼 한 잔으로 혼자만의 휴가를 준비하고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