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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제10차 세계여성학대회에 다녀와서
  • 이화여자대학교 여성학과 교수, 제9차 세계여성학대회 조직위원장 장필화
쟁점과 입장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제10차 세계여성학대회에 다녀와서

⊙ 이화여자대학교 여성학과 교수, 제9차 세계여성학대회 조직위원장 장필화

mundos de mujeres / women's worlds 08 대회 엠블럼

세계여성학대회 (International Interdisciplinary Congress on Women) 9차 대회가 서울에서 열린 것이 2005년인데 어느덧 세월이 흘러 3년만에 열리는 제 10차 대회가 지난 7월 2일부터 9일까지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개최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100여명이 참여했고 저는 세계여성조직 (WOWS: Worldwide Organization of Women's Studies) 운영위원들, 아시아여성학회 회원들과 함께 바쁜 일정을 같이 했습니다. 9차대회 조직위원들로서 이번 대회는 보통 다른 국제학회에 참여할 때와는 아주 다른 마음가짐을 갖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2005 서울 대회 폐회식에서 스페인 대표가 다음 대회는 마드리드에서 주최한다는 선언을 한 이후 우리들의 조언을 많이 구해왔기 때문에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지요.

이번 대회의 대주제는 “평등은 유토피아가 아니다”라고 했는데 아마도 유토피아라는 말이 “도달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이라는 뜻을 갖는 말이기 때문에 “평등은 실현될 수 있다”는 말을 부정형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주최 대학인 컴플루텐즈대학은 학생 수가 거의 10만명에 가까운, 유럽에서 가장 큰 대학 중의 하나입니다. 스페인은 1970년대만해도 유럽에서는 상대적으로 가난한 농업국가였는데 덕분에 공장이 거의 없는 역사, 문화의 보고로서 세계 최다 관광객을 유치하는 부유한 나라가 되는 역사의 역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작년에 사회당 정부가 재집권에 성공해서 사회발전 지표를 향상시키고 여성친화적 정책을 이어나가고 있는데 이는 현재 내각의 14명의 장관 중 8명이 여성이고 이들이 행정자치부, 교육부, 환경부, 여성부 뿐만 아니라 국방부의 수장을 맡고 있는데에서 단적으로 나타납니다.

이번 대회에는 아시아지역에서는 많이 참가하지 못했지만 스페인과 스페인 언어권인 라틴아메리카에서 대거 참가해서 3,500명이 2,700개의 논문과 포스터 발표를 신청한 거대 규모 대회가 되었습니다. 기조발제자 중 한명인 캄보디아 출신 소말리 맘은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지만 국제적으로는 잘 알려졌고 인권 신장 관련 수상 경력이 많은 분입니다. 인신매매, 성노예 피해자 구출을 위해 1997년 설립한 AFESIP (Agir pour les Femmes en Situation Pr?caire or Acting for Women in Distressing Situations)의 활동 보고를 통해 새로운 문제의식과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본인이 12살부터 인신매매의 피해자로서 모든 고난을 직접 경험한 당사자로서 갖는 힘과 용기가 강하게 전달되었고 성적 착취에 대한 실태와 대책에 대해 모든 청중에게 큰 호소력을 갖는 발제가 되었습니다.

또 다른 기조발제자인 이집트의 대표 지성인, 나왈 엘 사다위는 “창의성, 여성, 비판세력”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큰 공감을 이끌어내었습니다. 사다위는 신자유주의 혹은 “자유”시장이라는 담론으로 은폐되는 현대의 자본주의 가부장제 하에서 여성들이 비판적 창의성을 발현하기 위해 우리가 불러내야 할 용기, 우리가 함몰되어서는 안되는 거짓들, 뿌리쳐야 할 유혹들을 명료하고 명쾌하지만 따뜻한 시선으로 전달했습니다.

한국 여성학자들은 아시아여성학회가 주최하는 패널을 구성하여 아시아에 이제 막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유럽인들과 라틴 아메리카인들에게 아시아여성학의 관점을 다양한 주제를 통해서 알리는 기회를 가졌고 수많은 관객들이 이 패널을 경청하기 위해 참여했습니다. 이상화 교수의 “아시아적이라는 의미와 ‘아시아 여성학’의 개념” 발제에 이어 이주노동, 국제 결혼 등 다양한 현안에 대한 발표들이 이어졌지요. 이 패널 이외에도 서울시 여성재단은 조영미 박사등이 다른 여러 도시에서 참여한 학자/정책입안자들과 함께 도시와 젠더, 여성이 행복한 도시의 구상들을 제시하면서 주목을 받았습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서도 세션을 마련했고 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 학자들도 각기 여러 다양한 패널에서 발표하여 한국여성학의 위상을 보여주었습니다.

마드리드에서 세계 각국의 여성학자들과 함께한 단체 사진
▲ 마드리드에서 세계 각국의 여성학자들과.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장필화 교수.

저는 이 대회에서 세미플레나리 세션 발제자로 초청받아 여성주의의 새로운 대안적 패러다임으로 떠오르는 gift economy와 생태여성주의에 대해 발표했는데 이 지면을 이용하여 이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소개함으로써 앞으로 더 많은 의견 교환을 위한 계기를 삼고자 합니다. 세계화를 통해 가속화되는 생태계 파괴와 자원전쟁, 빈부격차 심화와 같은 현상이 새로운 대안적 패러다임을 절실하게 추구할 수 밖에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이 발제에서 저는 우선 기후온난화를 비롯해서 지구를 강타하고 있는 다양한 재해가 사실상 여성들에게 더 혹독한 시련을 준다는 실증적 연구를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게 하는 뿌리에는 인간 가치보다는 도구적 합리성을 더 중요시하는 가부장제적 패러다임이 자리하고 있다고 보고 이를 대치할 수 있는 대안 모색이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그 하나의 대안으로서 제네비브 본 (Genevieve Vaughn)이 제시하는 gift giving 패러다임에 주목했습니다. gift economy란 화폐를 매개로 하는 교환 관계만이 인정받는 자본주의 시장사회에 가리워져 비가시화 되어 있지만 사실은 그 사회 존속을 위해 없으면 안되는 활동과 관계의 패러다임을 총칭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어린아이와 어머니의 관계를 들 수 있지만 거기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대가를 바라거나 보상을 바라지 않으면서 이루어지는 모든 종류의 보살핌 노동과 관계들이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제네비브 본은 특히 인간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인간이 본래적으로 교환 경제에 의존하는 존재가 아님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봅니다. 특히 화폐를 매개로 하는 시장 사회의 교환 경제는 여기에 참여하는 개개인이 모두가 “손해 안보기”와 “자기 이익 최대화하기”에 매달리게 되는 상황을 가져오고 그것은 곧 거짓 (선전, 과대포장)을 부르고 신뢰를 깨뜨리게 하는 구조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공기와 물과 같은 것은 가치가 없는 듯 보여지고 오히려 인위적으로 “희소가치”(예를 들어 수량을 한정시키는 명품) 상품이 더 소중한 가치를 가진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전략입니다. 제네비브 본은 “대가없이 주는” 인간 본연의 모습에 눈을 떠서 다시 보고 회복함으로써 그것이 지배적 가치가 되는 사회로 변혁하기 위한 이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이론을 노자의 도덕경의 여성, 자연 은유와 연결하기도 하고, 한반도 가부장제의 뿌리깊은 모성과 그 딜레마, 그리고 지난 5,6월 촛불 집회가 보여주는 함의를 끌어내기도 하는, 약간 복잡한 내용을 발제했지요. 촛불 집회의 예가 들어간 것은 한편으로는 이것이 여성중심적이었다는 점 (적어도 초기에는) 즉, 아이와 가족들에게 또 스스로에게도 안전한 음식을 제공하고자 하는 바람으로 충만한 여성들이 가장 피부에 닿는 생활정치 영역에서 의식화되었다는 점입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화를 위한 많은 역사적 시위와 마찬가지로 더 나은 사회, 혹은 공동체를 만들려는 의지와 희망 이외에는 그 어느 다른 보상을 바라는 바 없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시간과 정력과 마음을 쏟아 붓는 gift giving의 좋은 예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질문과 호응이 있었고 또한 이어서 교환, 거래, 호혜 등과 관련하여 이 패러다임에 대한 더 깊은 논의가 별도의 패널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드리드 회의가 끝난 후 이태리 로마 근교인 론실리오네에서 제네비브 본과 소규모 학회모임이 개최되어 같은 주제에 대한 집중적인 토론을 벌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학회에 참여하여 모계제 사회의 여러 신화, 습속, 설화와 서구 문화, 시장사회와 근대성이 지배적 패러다임으로 자리잡지 않은 토착문화에 대한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렇게 보통 한 사회에서는 소통되지 못한 새로운 생각과 이론, 사람들과 만날 수 있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국제학술대회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기회라고 봅니다. 특히 이번 대회 폐회식에서 스페인 컴풀르텐즈 대학 총장님이 여성학 제도화를 약속하는 것을 보고 더 보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대회를 이어가기 위해 지난 3년간 WOWS 한국사무국과 긴밀히 소통하면서 착실하게 준비해 온 캐나다 팀(칼튼 대학, 오타와 대학 팀)이 11차 여성학대회의 주최자로 결정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꼭 보고해야할 말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서울 대회가 좋았다는 얘기를 특별한 에피소드와 정겨운 추억 몇 가지를 곁들여 거듭 거듭 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서울에서 왔다는 것만으로도 박수를 받을 정도였으니 이는 서울 대회를 준비한 분들 모두가 보여준 정성과 우정에 대한 응답입니다. 제9차 세계여성학대회 조직위원 여러분과 모든 수고하신 분들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