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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1/3 - 알고 싶다면 하라; 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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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야기

알고 싶다면 하라; 체현

⊙ 상담소 후원회원 가온

배낭을 메고 산길에 선 필자

연재의 문을 열며

안녕하세요? 가온이에요. (최지승경 이라고도 합니다^.^) 저는 작년 8월, 딱 요맘때, 한국성폭력상담소의 [다른 몸 되기] 프로젝트의 하이라이트(!) 코스였던 지리산 종주에 함께 하게 되면서 다른 몸 친구들과 만나게 되었어요. 그때까지 저에게 여성주의가 '말과 글'로 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말과 글만큼이나 몸으로 배우는 여성주의에 매혹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화여대 여성학과 석사과정에 2학기째 다니고 있고요, 공원으로 운동장으로 쏘다니고 싶은 엉덩이와 읽고 쓰고 싶은 손을 모두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저의 몸 일기인 동시에 나눔터 57~59호에 실린 키라의 [몸이야기]에 대한 저의 길고 긴 댓글입니다. 세 번에 나누어 실을 이 글은 〈알고 싶다면 하라: 체현〉, 〈욕망의 모방: 다른 몸의 관계성〉, 〈몸·마음·혼의 통전과 치유〉의 순서로 쓸 계획입니다. 왁자글 왁자글 많은 댓글과 몸 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 바랍니다.

배우는 데는 오직 한가지의 방법밖에 없다고 합니다. 직접 해 보는 것.

키라가 소개한 '체현'(體現, embodied body)이라는 말이 그런 의미이겠지요. 그런데 제가 책을 읽다 보니 이미 동서양의 많은 옛 성현들이 체현을 이야기하고 있더군요. 송나라 성리학자 장자는 "배움이 크게 이롭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 자신의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어서다"라고 하였고, 주자는 "도의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자기 몸을 가지고 저 도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 "학문하는 요체는 확실하게 마음을 닦고 절실하게 몸으로 느껴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깨닫는데 있다"고 학문함의 본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1

유학자라고 하면 책상머리에 앉아 책만 파는 모습을 떠올렸었는데, 그것도 고정관념이었나 봅니다. 그들도 배움이나 학문함이 이성이나 순수한 의식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온 몸으로 배운다는 것을 알았고, 도(道)를 알기 위해서는 도 속으로 몸을 던져 들어가야 하며, 학문하는 참된 자세는 마음과 몸으로 느껴 깨닫는 것이라고 머리를 넘어선 학문의 길을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에게 여성주의, 여성해방, 여성주의 힘 기르기(empowerment), 다른 몸 되기는 '체득', 즉 몸으로 얻어야 하는 앎으로 다가왔고, 몸과 마음을 그 속에 던져 깨닫고 싶었습니다. 여성학(Women's studies)은 그 학문의 성립과 발전 자체가 여성의 (몸의) 삶을 이론화하고 언어화한 것이기에, 몸과 마음으로 배우는 자세야 말로 여성학을 제대로 공부하는 태도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지난 학기에 수강하였던 〈여성학방법론Ⅰ〉 수업에서 조순경 선생님은 내가 읽고 들은 것이 단지 정보(information)일수도 있지만, 그것이 체화되면 변형(transformation)의 질료가 된다고 설명하셨어요. 'information'; 나를 형성하는 것이(formation) 외부로부터 나에게로 들어옵니다(in). 그러나 그것은 들어왔다가 한귀로 빠져나갈 수도 있고, 잠기 머물렀다 사라지기도 합니다. 'transformation'; 그러나 그 정보가 나를 변화형성(trans-formation)시킬 때 그것은 진정 내 것이 됩니다. 장자의 표현대로 하자면 나의 기질이 변화하는 것이죠. 세상에 아무리 정보들이 널려있다고 해도 내 가슴을 울려서 나의 다리를 움직이게 하고 나의 변형(transformation)을 추동하는 앎은 결코 많지 않았습니다. 몸으로 배우지 않는 것, 체득하여 체화한 것이 아니면 그것은 아직 온전히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몇 일전에 이를 씁쓸하게 확인해야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밤 11시가 되었을까요, 글을 쓰다가 잠시 머리를 비우고 싶어 동네 뒷산, 아니 언덕에 올라갔습니다.

서걱서걱 아카시아 나무들은 바람에 몸을 부비고 있었고, 조용하고 푸릇한 어둠이 편안했습니다. 낮은 언덕 정상 벤치에 다다랐을 때 중학교 2,3학년으로 추정되는 남학생 4명이 쪼그리고 앉아있더군요. 그들과 나는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고, 그 중 한명이 "우리반 박지성 변태!"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말은 분명 그들이 하고 있던 이야기 주제와는 완전 상관이 없는 엉뚱하고 돌발적인 것이었음이 나머지 세 명의 뻥한 표정에서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그 소리를 지른 아이는 박지성이라는 아이가 어떤 변태짓을 했는가 이야기하면서 나에게서 시선을 때지 않았습니다. 나를 성적 공격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하는 것일까 순간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그 아이가 그 말을 지르면서 눈빛이 바뀌던 것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내려가는 길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들과 거리가 조금 생기자 나는 벌렁거리는 심장으로 뛰어내려왔습니다. 집 앞에 이르렀을 때, 야릇한 패배감이 몰려왔습니다. 나 혼자 너무 겁을 먹었던 것일까? 오판이고 오바over였을까? 오판이 아니었다면 혼자서 이 밤에 뒷산에 가는 것은 역시 날 죽이쇼 하는 것이었을까? 나는 여전히 맞서거나 방어하는 몸 훈련이 되어 있지 않구나! 그런 것을 곱씹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안타까움과 동시에 나는 몸을 읽고 기운을 읽기에 있어서는 예전보다 많이 눈이 뜨여졌구나 하는 자각도 일어났습니다. 언어학자들과 커뮤니케이션 학자들은 인간의 의사소통 중 언어에 의존하는 것은 30%뿐이고, 의사소통의 70% 이상이 비언어적인 소통(non-verbal communication)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70%는 신체의 표현, 기운과 무의식이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죠. 분석심리학자 융 역시 사람들이 딱 만났을 때 무의식이 먼저 서로를 알아본다고 했지요. 내가 나의 몸과 에너지, 무의식, 내면에 대해서 의식적으로 인지하고 탐구할수록 다른 사람의 기운과 에너지를 더 잘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춤이든, 운동이든, 명상이든, 연극이든 몸으로 하는 모든 것을 통해 개발할 수 있는 또 다른 눈입니다. 무술 대련을 할 때 고수들이 서로의 자세에서 빈곳이 있는지 없는지 파악하는 것과 같지요. 요가를 오래 한 사람이나 연극배우들이 딱 사람을 봤을 때, 저 사람이 지금 이완되어 있는지 긴장되어 있는지 단박에 아는 것처럼요.

이번의 이 뒷동산 사건은 '몸 기운 읽기'라는 경험도 개념도 접하지 못했던 시절 겪었던 사건을 기억 속에서 불러내었습니다. 2004년 여름 이맘 때 쯤 같습니다. 친구에게 선물 받은 샤방샤방한 치마와 하늘거리는 블라우스를 입고 집으로 오던 길, 키 170센티에 70킬로 쯤 나갈 것 같은 20대 초반의 남자가 내가 대문에 열쇠를 꽂는 순간 치마사이로 손을 집어넣었습니다. 나는 그 전까지 내 주위에 누가 있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고, 가해자가 골목을 따라 오는 낌새도 전혀 채지 못했습니다. 그때 나는 넘어지면서 소리 지를 수밖에 없었고 뛰어 쫓아가거나 한판 몸싸움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상을 해본적도 없었지요. 그리고 그 동네를 떠나버렸습니다.

내가 몸을 의식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다이어트를 위해서였습니다. (키라의 논문에서 인터뷰한 여자 복싱 챔피언 선수가 자기도 다이어트를 하려고 권투를 시작했다고 해서 어찌나 위안이 되던지요!) 몇 번의 성폭력 사건들, 뚱뚱해서 차였다고 자학했던 관계들, 여성주의 한다는 한 선배가 던진 오지랖 넓다는 비난에서 저는 도망쳤습니다. 무력한 몸, 뚱뚱한 살덩이 같은 몸, 참고 참기만 하는 몸이 그때 내가 느꼈던 나 자신이었습니다. 학교도 휴학하고 고향 부산에서 낙동강의 베일 듯한 바람을 맞으며 매일 뛰고 걷고, 새벽마다 산에 올라갔습니다. 몸에 새겨진 상처를 지우고자 길에, 산에 매달렸습니다. 그렇게 10kg과 헤어지고, 나는 여성주의의 o도 쳐다보지 않기로 했지요.

그런데 한번 움직임의 쾌락을 알게 된 몸은 산을 오르고, 길을 달리던 또 다른 나의 몸을 기억하고 있더군요. 자꾸 움직이도록 들쑤셨습니다. 산이 있으면 가보고 싶고, 길이 있으면 뛰고 싶었습니다. 학원 강사로 일할 때는 매일매일 등산을 했습니다. 10km 마라톤 대회에 나갔습니다. '맥주병'이던 내가 새벽 수영을 하면서, 어느덧 '내가 전생에 태평양의 돌고래가 아니었을까' 수영하면서 웃는 미친 짓도 하게 되었습니다. 몸의 대부분이 드러나는 그 '옷(服)'이라고 할 수 없는 '수영복'이라는 것을 입고 수영장 안으로, 타인의 시선에 내 몸을 노출시키는 것은 나에게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습니다. 내 살에 대해, 내 몸에 대해 여전히 미움과 고까움이 남아있지만, 산을 걸을 때, 뛸 때, 수영할 때, 나는 치타같이, 돌고래같이 움직이고 싶은 그 펄떡펄떡하는 생동감과 욕망을 더 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여성주의 책에서 "가부장제의 시선을 벗어나 당신의 몸을 그대로 긍정하고 사랑하세요!"라는 메시지를 백만번 읽어도 되지 않던 그것이 지리산의 그 길에서 알겠다는 느낌이 왔습니다. "내 튼튼한 종아리, 완소야, 고마워."

이렇게 쓰고 보니 제가 무슨 대단한 몸 훈련이나 한 듯이 이야기 한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만, 확실히 저는 예전의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다른 나입니다. 그리고 나는 계속해서 달라지겠지요. 한 가지 일상의 변화를 말하자면, 이제는 공간을 읽는다는 것의 개념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전거를 탈 때나 밤에 걸을 때 온 몸의 세포를 열고 공간과 움직임을 파악하려고 집중합니다. '몸은 우리를 둘러싼 전체적인 시공간과의 접촉점'이라는 표현을 이해하게 된 것이죠. 나의 이 변화, 다른 몸 되기는 오직 '함'으로서만 내 것이 되었고, 도전하고 싶은 몸 움직임의 종목들은 더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춤과 운동, 걷기와 산, 그런 생각만으로도 아드레날린이 춤춥니다. 사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지요!

'알기 위해서는 해봐야 한다.'는 것을, 배움은 체현되는 것임을,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기 위해서는 그것을 살아봐야 한다고 깨달았을 때, 여러 선배들이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것을 함께 나누면서 이번 글을 마칩니다.

"진정한 해방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했을 때,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을 헌신해 철저히 참여했을 때 비로소 가능한 법"
융 (Carl Gustav Jung, 1875~1961), 스위스의 분석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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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을 살아보십시오."
릴케 (Rainer Maria Rilke, 1875~1926), 독일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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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것을 알고 싶으면 우리는 이것을 해야만 한다.
그대가 이것을 알고 싶으면 이것을 하라"
켄 윌버 (Ken Wilber, 1949~), 미국의 통합연구·초개인transpersonal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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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삶만이 교육이다.
살아보고 맛보고 소화시킴으로써 마침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다"
비노바 바베 (1895~1982), 인도의 사회개혁가· 정신적 지도자
공중으로 뛰어오른 여성

다음 연재 글의 예고

연재의 두 번째 글은 〈욕망의 모방: 다른 몸의 관계성〉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옆에 있는 사람의 것을 따라하게 됩니다. 욕망도 모방되는 것이지요. 저 멀리의 욕망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사람의 욕망을 따라합니다. 내가 따라하고 있는 욕망들을 살펴보면, 그것들은 내가 맺고 있는 관계 안에서 나왔습니다. 나의 자아는 관계성을 띠기 때문이죠. 내 안에 친구가 있고, 가족이 있습니다. 그런 관계 안에서 나는 어떤 욕망을 따라하고 있는 걸까요? 모방이라는 단어는 비자율적으로 따라한다는 부정적 느낌을 먼저 가져오지만, 내가 무엇을 욕망하는가, 모방하는 것인가 자각하게 되면 무엇을 배울 것인가 말 것인가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다음 글의 키워드는 '욕망, 따라하기, 주위 사람들, 행복, 권력'입니다.

오매님과 박지나님의 코멘트와 응원, 감사합니다.

1 박희병 편역, 1998, 『선인들의 공부법』, 창작과비평사

허은주, 2006, 「여성 격투가의 '몸-체험'과 여성 주체성에 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M.존슨, 『마음 속의 몸 - 의미 · 상상력 · 이성의 신체적 근거』 노양진 옮김, 2000, 철학과 현실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