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년, 출산휴가, 육아휴직을 마치고 돌아오며
부대꼈던 기억이 남긴 것
⊙ 참여기획팀 지선
안식년 휴가를 맞으며 들뜨고 설레었던 마음, 홀로 있음과 쉼에 대한 깊은 명상(?)을 끄적거렸던 일(나눔터 54호 53쪽을 참고하세요~)이 벌써 2년이 다 되어 간다. 그 사이 얼마나 많은 일들이 나를 숨가쁘게 살아가게 했던가? 여성연합, 유한킴벌리, 여성재단, 성공회대학교가 함께 준비한 1년 과정의 활동가 역량강화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기억. 그리고 거기서 느낀 배움의 희열, 여성운동과 시민운동에 대해 새롭게 떠오른, 혹은 한층 깊어진 갈증과 고민들. 그리고 갑작스럽게 다가온 임신, 출산, 육아까지!!!
아직 많은 시간을 살아왔다고 단언할 수 없는 나이지만, 지난해와 올해는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 큰 획을 그었음을 인정해야겠다. ‘나’라는 인간이 가진 삶에 대한 불안, 관계에 대한 두려움, 활동가로서의 불투명한 미래, 그리고 죽음 등에 대한 생각을 나름대로 정리할 수 있었던 계기였으니 큰 획이라 하기에 어색함이 없을 듯. 다만, 그 ‘나름의 정리’가 다름 아닌 내 배 속에서 함께 살다가 분리되어 세상으로 나온 존재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게 많다는 게 의외일 따름이다. (어떤 사람들은 임신, 출산, 육아가 여성에게 엄청난 경험을 갖게 하는 게 당연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는 출산 전에는, 적어도 임신기간까지는 출산이 여성 개인의 삶을 얼마나 제한할 수 있는지 상상하지 못했다.)
음... 2년이라는 시간동안 느꼈던 수많은 것들 중 최근에 가장 많이 떠오르는 것, 그것은 ‘타자와의 평화로운 관계’인데, 그에 대한 이야기에 앞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인간에게 ‘자율성’이란, 혹은 소위 ‘계약을 맺을 수 있는 주체’로서 땅 위에 당당히 발을 딛고 서 있는 시기란 전 인생에 걸쳐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자율성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신체가 자유로워야 하고(의식주를 혼자 몸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을 가져야 하고), 정신적으로도 타인과 자신을 분리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자율적인 한 개인이 되기 위해서는 분노, 불안 등 감정을 통제할 줄 아는 능력, 경제적인 자립 등 갖춰져야 할 여건이 너무나 많다. 소위 ‘타인과 나의 경계를 구분하고, 타인을 배려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자기 독립성이 갖추어졌을 때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타인과의 거리 유지가 실질적으로 가능한 시기는 인간 삶을 통해 얼마나 짧은 기간인가. 경제력 하나만 생각해봐도 적어도 20대는 되어야 자립의 여건이 주어지고, 개개인에 따라 그 경제력이 사라지는 시기는 천차만별일 것이다. 또한 우리는 그러한 거리를 유지할 만한 경제력, 지식, 건강을 갖고 있는 순간과 그렇지 않은 순간 사이를 불규칙하게 여러 차례 이동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율성을 보유한 소수의 사람, 활발하게 경제활동을 하는 성인을 기준으로 법을 만들고, 제도를 만들고,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소수를 위해 다수가 희생하는 사회, 자율성을 갖춘 소수의 사람이 그렇지 않은 다수의 ‘약자’들을 보호, 방치, 억압함으로써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는 사회가 바로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다.
여러 문제가 많지만 여기선 육아에 대한 이야기만 더 해 보자.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물론 육아를 여성에게 전담시키는 상황은 인간 역사를 통틀어 존재한다) 소위 ‘자율성’을 갖추지 못한 유아, 어린이, 노인, 장애인을 돌보고 기르는 일을 제대로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막대한 예산과 인적, 물적 투자가 필요한 이 부분은 가족, 구체적으로는 ‘어머니’, ‘여성’이 해야 할 역할로 일임하고, 강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사회, 국가, 기업은 여성의 희생으로 이러한 부분에서 자유로워진, 여성들에게 육아와 돌봄을 맡겨버리는 현실에 철저하게 기대고 있는 ‘자율성 아닌 자율성’을 갖춘 사람들을 기준으로 움직이고 있다.
현(내가 낳은 아이의 이름)이 가지고 있는, 도대체가 그 정도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세상 속에 홀로 놓여있다는 것에 대한 공황에 가까운 불안감, 울부짖음... 그것은 정말이지 자신의 전 존재를 어찌할 바를 모르고 타인에게 전적으로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나오는 절규일 수도 있겠다(현을 이렇게 바라보게 된 것도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그간의 생활을 돌아보며 정리할 여유가 있던 최근에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전까지는 그저 둘 간의 끝 모를 사투였다고 해두자). 인간은 그렇게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기간이 누구에게나 있다. 그 시기에는 절대적인 사랑과 보호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왜 그 사랑과 보호, 지원을 어머니가 다 떠맡아야 하는 것인가? 주변에서 당연히 엄마라면 해야 할 일로 규정한 그런 것들에 대해 나는 계속 의문을 품게 되었다. “왜 나만(엄마만) 육아의 책임을 감당해야 되지? 내가 애를 낳았기 때문에? 나도 지금은 안정감을 회복해야 할 약한 상태라구!” 엄마는 전능하다는 식으로 의무감을 부여하고, 육아의 책임을 엄마에게 일임하면서 벌어지는 일들. 엄마와 아이의 관계를 아름답고, 행복한 최상의 관계로 비추고 있지만, 사실 그 안에선 얼마나 많은 폭력과 상처가 발생하고 있는지.
지금도 일을(7월부터 상담소에서 다시 일하고 있답니다 ^^) 마치고 돌아가면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또 다시 시작되는 현의 전적인 의존과 투정에 나는 어느 정도의 에너지를 쏟을 수 있을지, 내 안의 에너지가 바닥났을 때 가해지는 나의 분노, 폭력을 현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하루하루 긴장의 연속이다.
물론 인정해야 할 부분도 있다. 그것은 ‘나’라는 인간이 가진 협소함, 이기심, 폭력성이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조건에서 벗어나 그야말로 그 사람의 입장에서 대상을 바라보고 상황을 판단할 ‘능력, 감수성, 여유, 지혜, 성찰의 힘’을 가지지 않았다. 자신의 안위와 생존이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한다는 것은 말만 번지르르한 빈껍데기일 뿐임을 지난 몇 달간 몸으로 체험했다.
그러나 그렇게 ‘내 지혜와 성찰이 아직 부족해서’라고만 말하기에는, 또 ‘내 속에 잠재한 폭력성의 문제’라고 원인을 밝히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너무나 많다. 사회적인 육아시스템이 형성되지 않는 한, ‘헌신하고 그 헌신을 통해 성숙하는 모성’이라는 신화가 깨지지 않는 한 여성도 유아도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없다. 요즘 엄마가 행복해야 아기도 행복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적어도 ‘엄마가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사회가 만들어줘야 하는 것 아닐까? 아기가 태어나면 하루 4시간이상 상시 돌봐줄 기관이 가까이 있고, 지역사회의 탁아소에서 마을 주민이 아이를 같이 기르는 사회를 상상해본다. 이를 위해 기업은 노동시간을 줄이고, 국가는 아동 등 약자가 쉽게 자율성을 누릴 수 있도록 기존 정책을 약자의 기준으로 바꾸는 사회를 상상해본다.
다시 내 맘 속에 떠오르는 화두.
생명, 탄생, 생존, 관계, 관계 속에서의 공존, 공존 속에서 각자의 행복을 만들어가는 것.
그리고 평화롭게 내가 물려받았던 지구를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는 것.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같이 떠안아야 할 아주 당연한 화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어머니가 희생하면서 가족을 지탱하고, 사회를 지탱하고, 국가를 지탱하는 구조. 그 속에 숨은 어머니의 고통과 어머니가 쏟아내는 폭력을 직접 맛본 나는 이제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고 싶다. ‘타자’와 정말이지 평화롭게 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도 당연하다고 믿는 것들과 갈등하고, 부대끼면서 새로운 대안을 꿈꾸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