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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의 이야기 - 연재 11th 수능전야 1
  • 水 (성폭력 피해생존자)
생존자 말하기 · 연재 11th

수능전야 1

[편집자주] 생존자의 목소리 꼭지는 성폭력피해생존자의 투고로 채워지며, 연재 혹은 단회로 독자 여러분과 만남을 갖습니다. 글 보내주실 곳은 ksvrc@chol.com 입니다. 이번 호에는 '水'의 연재수기 열한 번째 이야기와 '진'님의 사연이 지난 호에 이어 실렸습니다.

⊙ 水

얼마 후면 전국의 고3 수험생들이 수학능력시험을 보는 날이다.

나도 고등학교 3학년 때 수능시험을 보았다. 수능시험 며칠 전 그 사람은 저녁식사 때 유난스런 걱정을 시작했다.

“얘 시험장이 멀어서 걱정이야, 근처에 호텔을 잡아서 전날 가서 자고, 다음날 시험 보러 가게 할까봐."
“왜? 거기까지 가서 잔대? 차도 있는데”

엄마는 따지듯 물었다. 그 속에는 '너 딸 데리고 호텔에서 그짓 하려구?'라는 뜻이 담겨있는 듯 했다.

“애 시험 보는 데 신경 쓰이게 하지 마”

그 사람은 밥을 입에 넣고, 어찌할지 몰라 하는 나를 쳐다보며 내 핑계를 댄다. 그 순간 모든 가족은 내가 그 사람과 호텔에 가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더 이상 엄마도 뭐라고 하지 못하고, 다들 그냥 묵묵히 밥을 먹었다. 더 얘기했다가는 또 그 사람이 엄마를 죽도록 때리고, 온 가족이 괴물로 변한 그를 보아야하기 때문이다. 입속에서 밥알들은 맛을 잃고, 굴러다닌다. 토하고 싶다.

그 사람은 그 후, 밀월여행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들뜬 일상을 보냈다. 시험장 근처에서 가깝고, 깨끗한 호텔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며칠 동안 계속해서 주문을 외우듯 ‘시험당일은 시험장까지 차가 막히거나 늦을 수 있으니 전날 그 호텔에 가서 자고 다음날 시험 보러 가자’고 했다. 호텔의 스위트룸을 잡아서 내 수능시험을 편하게 보게 해주겠다는 그 사람의 계획은 ‘이번에는 좀 특별하게 그 짓을 해봐야지, 분위기도 좀 내봐야지’ 하는 의도로만 보인다.

나는 수능시험 전날, 난생 처음 호텔에 들어섰다. 교복을 입은 딸과 함께 로비에 들어서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그 사람은 로비에서 아빠 같은 말투로 호텔직원에게 말한다.

“우리 애가 내일 수능시험 보거든요. 조용한 방으로 주세요.”

수능시험을 보기 위한 딸을 위해 이렇게 좋은 곳까지 준비하는 배려심 깊은 아빠의 표정을 애써 지어 보인다.

“여기서 ○○고등학교 가깝죠? 내일 아침에 늦지 않게 시험 보러가게 하려고 데려왔거든요.”

그 사람은 스위트룸 열쇠를 받아들고, 방으로 가는 동안 아무것도 묻지 않는 안내해주는 남자에게 자세하게 설명까지 한다. 나는 말없이 안내해주는 사람과 그 사람의 뒤를 따라가야 했다. 나는 늘 그 사람이 나를 데리고 여관 같은 곳에 갈 때면 짧은 순간 스치는 여관 문 앞의 주인들의 눈빛이 괴롭다. ‘쟤, 원조교제 아닐까? 어린 것이 벌써부터 이런 델 들락거려? 쟤 부모는 저 사실 알까?’ 하는 표정들, 그러면서도 조용히 그냥 아빠라는 그 사람의 말만 듣고, 돈을 받고, 열쇠를 내어주는 저 인간들, 그들도 밉고, 싫다. 그리고 말해주고, 싶다. ‘저기요, 적어도 아빠는 제가 여관 들락거리는 거 알거든요, 이 사람이 친아빠예요.’ 말해주고 싶다.

나와 그 사람을 스위트룸까지 안내한 이 젊은이도 예외는 아니다. 문 앞까지 안내를 해준 후, 저 문 안을 들어서면 뻔하겠지 하는 표정이다. 나는 그런 것이 느껴진다. 아닐 수도 있지만 나는 그런 더러운 느낌이 든다. 기분 나쁘다. 나는 여기서 벗어날 힘이 없는데, 왜 모두들 그 사람이 나한테 어떤 짓을 할지 뻔히 알겠다는 표정으로 지켜만 보고 있는 것인지. 젊은이는 가고, 나와 그 사람만 문 앞에 남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 사람은 신이 난 모양이다. 엄마, 오빠, 동생들 눈치 안보고, 신경 안 쓰고, 어떤 알리바이도 만들지 않고, 맘 편하게 기분을 낼 수 있겠다는 기대에 부푼 표정이 압권이다. 그런 표정은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주고 싶을 정도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빙긋 웃으며 스위트룸의 문을 열고 있다. 아무튼 나보고도 들어오라고 하더니 ‘이제는 준비 다 되었다’는 뜻인지 2중, 3중의 문고리들을 모두 잠근다.

“피곤하지, 우리 샤워부터 하고, 한번 땀나게 하고 푹 자자, 일어나서 정리한 것 한번 훑어보고 내일 시험 보러 가면 되지”

나는 말없이 짐을 풀고, 욕실로 들어갔다. 속으로는 ‘뭘 한번 해, 뭘, 너는 내일 내가 시험인데도 그 짓을 꼭 해야겠냐?’라는 말들이 밀려나오고 있었지만, 다시 목 아래로 집어삼켰다.

샤워실에 들어가 거울 속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데 그 사람이 문을 두드린다.

“문 좀 열어봐”

문을 열었더니, 불뚝한 배를 내밀고, 배 밑으로는 흉하게 생긴 무기를 내밀고, 훌떡 벗고 서있다. 그 사람은 한껏 기대에 부푼 얼굴로 말했다.

“같이 샤워하자”

그 사람에게는 “그것”만 있는 것처럼 그것만 보인다. 꼭 나를 고문하기 위한 도구를 붙이고 서있는 사람처럼, 눈은 뻘겋게 핏발이 서서, 이건 또 뭐하자는 거니, 싶어 고개를 돌렸다. 그 사람은 정말 잔뜩 흥분했는지 얼굴도 상기되어 있었고, 기분이 좋은지 가벼운 걸음으로 욕실에 들어선다. ‘너나 해라, 이 새끼야, 너는 정말 그러고 싶니? 정말 그렇게 짐승도 상상 못할 짓을 계속해서 어쩜 그렇게 잘도 해내니? 니 불뚝한 뱃속에는 그 짓거리를 위한 더러운 정액만 꽉 찼냐?’라는 말들이 내 속에서 꾸역꾸역 올라왔다. 내 속의 화, 욕지거리들이 얼굴에 묻어 나오는 걸 그 사람이 알아챌까봐 그러면 또 뭔 짓을 할지 몰라서 고개를 확 돌렸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 서있던 그가 내 뒤통수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어디를 맞았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허리가 무척 아팠다. 주먹으로 등 뒤를 퍽퍽 쳤던 거 같다. 얼굴이 검붉어지고, 미친개 같은 눈을 해서는 이를 꽉 물고 지랄을 시작했다. 순간 그 사람의 손도, 키도 무지막지하게 커지는 것 같았다. 정말 그는 점점 괴물이 되어가는 것 같다. 그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채를 잡고, 쓰러뜨린 후 욕실에서부터 거실로 질질 끌고 나왔다.

“야, 이년아, 거울에 니 얼굴 봤어, 얼굴을 찡그려? 니가 뭐 성모 마리아라도 되냐?”

머리가죽이 벗겨진 것처럼 화끈거렸다. 거실까지 머리카락이 당겨지는 힘으로 끌려나왔다. 그 사람은 내 온 몸을 발로 차기 시작했다, 아니 밟았다는 표현이 맞는 거 같다.

‘나는 성모 마리아가 아니라 니놈 딸이거든, 그래서 니가 성모 마리아랑 뭔 짓을 하든 나한테 상관없는데, 나한테는 이러면 안 되거든, 개쌍, 미친새끼야, 차라리 성모 마리아랑 그 짓을 해라’

입을 열어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얼굴, 허리, 등, 다리, 팔, 배, 가릴 것 없이 막 때려서, 맞고 있는 동안은 입이 겁에 질려 아무 소리도 못 낸다. 맞을 때 소리 지르는 크기에 따라 매의 강도는 더 높아진다. 갑자기 맞을 때 났던 내 비명소리가 신경 쓰인 모양이다.

“소리지르지 마! 이년아, 너 오늘 나한테 죽어봐라, 소리지르면 더 패줄 테니 해봐, 한번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이를 꽉 깨물고, 조용히 내지른다. 그는 입술까지 파르르 떨며 내는 목소리로 나를 질리게 한다. 그리고 정말 그냥 내 힘으로 죽고 싶어지게 만든다. 내가 너한테 죽느니, 내 손으로 죽는다. 아니 내 손으로 너 죽이고, 나 죽는다 하고 싶다. 하지만 난 너무 힘이 없다. 왜 이렇게 약할까.

발로 차고, 주먹으로 퍽퍽 소리가 나게 때리더니, 지쳤는지 침대에 앉아 쉰다. 나는 가능하면 얼굴을 맞고 싶지 않아 둥글게 몸을 마는 벌레처럼 몸을 말았다. 계속 맞으면 처음 맞을 때는 아팠던 감각들이 점점 사라지고, 내 살이 아닌 것 같아지는 순간이 있다. 그러다 정신을 놓아버리면 아프지 않게 맞을 수 있다. 그런데 오늘은 왜 그런지 정신이 더 또렷하다.

침대에 앉아 쉬면서도 그는 입으로 말도 안 되는 설교를 늘어놓는다.

“니 에미가 얼마나 지저분했는지 알아? 지 에미 닮아서 버스 타면 남자새끼들 쳐다보느라고 눈 희번덕거리고, 니 에미가 얼마나 갈보 같고, 창녀 같았는지 알아? 그 피가 어디 가겠어? 넌 어차피 내가 이렇게 해놔서 시집도 못 가, 누가 널 데려가겠냐? 좀 잘 해주면 기어올라, 아주. 이게 나를 무시해? 니가 뭐 깨끗한 년이나 되는 줄 알아? 거울에 비치는 거 다 봤어 이년아, 어디 얼굴을 찡그려, 아주 무슨 벌레 보듯이”

쉬면서 힘을 되찾았는지, 이제는 벗어놓았던 바지를 들어 아주 천천히 허리띠를 빼기 시작했다. 허리띠가 스르르 풀려 나오자 그것을 한쪽 손에 몇 바퀴 감고 있다.

“너 오늘 맛좀 봐라.”

나는 순간 오줌을 쌌다. 거실 흥건히 오줌을 싸버렸다. 일부러도 쌌고, 모르고도 쌌다. 오줌이 나올 줄 몰랐기도 했지만. 온 몸에 힘이 풀려버렸다. 예전에 한 번 반 죽도록 맞는데, 오줌 싸러 가고 싶다는 말도 못 하고 맞다가 오줌을 싼 적이 있다. 그랬더니 그가 매를 때리다, 멈췄던 적이 있다. 그걸 노렸던 것도 있다. 제발 허리띠로는 맞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람에게 20년 넘게 매를 맞았던 엄마도 그 사람이 허리띠만 풀면 기절할 듯 무서워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단단히 손에 허리띠를 감아쥐고 있었다.

“이제는 오줌 싸는 척까지 해, 그런다고 내가 너 불쌍하게 생각할 거 같아. 아까 거울 속에서 니가 나를 어떤 눈으로 쳐다봤는지 알아? 내가 너 수능시험 보게 할 거 같아, 너 대학이고 뭐고 없어, 집에 처박아 놓을 거야, 저년이 대학가면 나를 얼마나 더 무시할거야? 너는 내가 망쳐놔서 시집도 못가, 내 애나 낳고 내가 시키는 대로 살어, 이년아. 내가 수능시험 보게 하나봐, 내가 마음이 약해서 시험 보러가게 할 거라고 착각하지 마 이년아”

‘어? 알았어? 야, 너도 그런 거 알아볼 수 있구나, 벌레보다 못하게 봤는데 그러니까 기분이 나빠? 그럼 내가 그 동안 니가 한 짓 때문에 얼마나 힘든지, 너를 얼마나 죽이고 싶은지, 그것도 알아? 그런 눈빛이 싫어? 내 눈빛이 싫어? 내가 니놈의 나쁜 짓을 싫어하는 게 싫어? 잘못 된 거니? 야, 그리고 이 새끼야 니가 마음이 약해서 지금 이러고 있냐?’ 나는 속으로 계속 외치고 있었다.

그 사람은 거울 속에 비친 일그러진 내 얼굴표정에 대해 욕을 하며, 바지에서 뺀 허리띠를 오른손에 더욱 단단히 감고 있었다. 때릴 준비를 마친 그는 허리띠로 채찍질 하 듯 내리쳤다. 동그랗게 말린 내 몸의 껍질을 뜯어내기 위해 때리는 것 같았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너무 아프다.

감각을 가지고 있는 껍질들이 차라리 벗겨져 나갔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아프지 않을 텐데.

“소리 지르지 마”

그는 힘주어 악문 입술로 조용히 으르렁거렸다.

“소리 내지 말랬지”

더 세게 때린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지금 이글을 쓰는 순간에도 “아프다”는 말로 이 지면을 다 채우고 싶을 정도로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프다는 말밖에 이때를 표현할 수 있는 건 없다. 무슨 수식어를 붙이거나 비유를 사용한다면 그때의 내 아픔이 가볍게 느껴질까 봐 싫다. 허리띠의 가죽은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내며 날아와 내 살에 감겼다 떨어져 나가곤 했는데 그때그때 감각이 달랐다. 샤워하려고 벗은 몸에 물까지 적당히 묻어 채찍질을 위해 준비된 몸 같았다. 갈수록 아프고, 색다르게 아프고, 늘 처음 맞는 것처럼 아팠다. 내 피부에 감각이 있다는 게 화가 날 정도다. 내 피부는 왜 살아서 이 모든 고통을 다 느껴주는 것일까 원망스러웠다.

허리띠로 한참을 맞는데, 소리 내지 말라는 그 사람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내 목에서 조금씩 비명소리가 새어나가자 매질은 더욱 거세졌다. 오후에 시작된 매질이 어스름 저녁까지 이어진다. 매질을 시작할 때는 불을 켜지 않아도 실내가 밝았는데, 그 사람은 이제 불까지 켜고 나를 때리고 있다.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데도 그는 때리고, 나는 맞고 있다. 맞는 건 정말 힘들다. 그런데 그는 때리다 힘이 드는 모양이다. 중간 중간 쉬어가며 때린다. 딸이 아빠에게 강제로 그 짓거리 당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지칠 때까지 때리는 이건 도대체 뭐로 만들어진 인간이냐?

허리띠로 실컷 때린 후, 그는 또 잠시 쉬면서 다른 궁리를 하는 듯 했다. 그러더니 나를 들어서 침대 모서리나 의자, 테이블 다리의 모서리 부분으로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입으로는 어디서 들어보지도 못한 욕들을 해대며 나를 번쩍 번쩍 들어 던지고 있다. 이건 아무리 필사적으로 내가 몸을 말고 있으려 해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모서리에 허리 같은 곳이 처박힐 때면 순간적으로 찌릿하고 전기가 온몸으로 통했다. 이제는 얼굴이고 뭐고 가릴 수도 없고, 마구 던져졌다. 이리 저리 던지면 날려 다니며 아무 곳에나 내 몸 곳곳이 부딪혔다.

나는 더 이상 그 사람에게 사람이 아니라 생명이 없는 인형, 아니 물건이었다. 어릴 적 가지고 놀다 싫어지면 쓰레기통에 버리거나, 남을 줘버릴 수도 있던 무생물의 인형,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부숴버릴 수도 있는, 오로지 놀이만을 위해 가지고 있었던 인형들처럼, 그 사람에게 나는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지 놈이 원하는 대로 아무 때나 원하면 그 짓을 해야 하는데 그것에 기꺼운 마음으로 응하지 않았다고, 자신이 몇 주 동안 계획해서 만든 밀월여행이었는데, ‘니가 싫어해서 분위기 다 망쳤잖아’ 하고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은 것에 대해, 가지고 놀기로 했던 인형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리 던지고, 저리 던지고 하던 그는 아까보다 더 지친 것 같았다. 물을 마시고, 땀을 닦으며 침대에 앉는다.

그 사람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문을 잠그고 어딘가 나간다. 그가 없는 방안은 평안 그 자체다. 머리가죽이 얼얼해서 더듬어 쓸어내려보니 머리카락이 한 움큼 쓸려 내려온다. 방안의 고요함은 방금 전까지 있었던 끔찍함과 자신은 상관없다는 고요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어찌되었든 지금 이 순간이 좋다. 나 혼자 쉴 수 있는 이 순간. 그 사람이 없는 이 공기. 이제는 깜깜해져버린 스위트룸에서 불도 켜지 않고, 바짝 마른 소리 없는 울음을 울었다.

나를 이 방까지 안내해준 호텔직원이 미웠고, 옆방에서 들리는 발자국소리의 주인들이 싫었다. 왜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 걸까?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도움을 요청할 곳도 없고,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도 없었다. 하기야 가족들도 나 몰라라 하는데 누가 도와주겠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늘어져있는 커튼과 침대, 냉장고, 의자, 책상, 텔레비전, 또 밖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소리, 차가 지나가는 소리 모두 미웠다. 지금 그 사람에게 물어뜯기고 있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이 잘들 돌아가는 세상이 모두 싫다.

잠시 후 고요함을 깨고, 문 앞에 발소리가 멈춰 섰다.

<다음 호에 계속>

■ 水의 한마디

몇 주 동안 그 호텔방에 갇혀 지낸 기분이다. 쓰면서, 고치면서, 읽으면서 계속 눈물이 났다. 처음 듣는 이야기도 아니고, 몰랐던 일도 아닌데 왜 이러나 싶다. 그래서 이번 글은 엄청 늦게 마무리했다. 쓰는 내내 부족한 내 글발로는 그 당시를 잘 표현하지 못해 답답하기도 했고, 이게 과연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인지 계속해서 의문스럽기도 했다. 근데 뭐 내가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춤이나 음악, 그림으로 어찌해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무 재주도 없다. 그냥 이렇게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다 답답하면 덮었다 다시 펴서 두드린다.

그 사람과 사는 동안은 그 사람이 잠시 잠깐 없어지기만 해도 행복했는데........요즘은 내 배가 불렀나보다. 그 사람이 내 눈앞에서 사라졌는데도 불행할 때가 있다. 그 사람을 안 봐도 되는 지금도 나는 이유를 알 수 없이 몸과 마음, 기억의 아픔이 여전히 느껴질 때가 있다. 그 사람이 계속해서 내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착각이다. 나는 글을 쓰면서 그때로 돌아간 듯 착각하곤 하지만 그 착각을 깨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겪은 일들을 글로 쓰는 이유는 지금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고 있음을 확인하고, 앞으로는 내 일상에 어떤 식으로든 끼어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꿈에라도 그 일들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도록 말이다.

사실 몇 년 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힘들기도 했지만 글을 쓰면서 꿈이 달라지는 경험을 했다. 꿈속에서 그 사람은 늘 내 뒤를 따라왔다. 나는 있는 힘껏 도망가는데도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아 땀을 흘리다 깨곤 했다. 그 날도 꿈속에서 나는 도망가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꿈속의 내가 생각하기 시작했다. ‘뭐가 무서워, 그래 한번 뒤돌아보자, 쫓아버리자.’ 그 날도 겁에 질려있던 꿈속의 나는 정신없이 도망가다 갑자기, 멈췄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몸을 완전히 틀었을 때, 내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뒤로 꿈속에서 그 사람을 피해 도망가야 할 일은 없어졌다.)

그래 그 일은 지나갔다. 끝났다. 이제는 더 이상 그 시절로, 그 호텔방으로, 어릴 적 살던 집구석으로 나를 끌고 들어가지 말아야지.

"주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당하게 하신 날수만큼, 우리가 슬픔을 당한 햇수만큼 우리에게 기쁨을 주소서 시편 90:15
앞으로 내 인생은 기뻐하며 사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