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기로 가해자를 고발하다
⊙ 진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바로 그 다음 말이 어떻게 이어졌는지
자세히 생각나질 않는다.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황당하기 짝이 없고,
화가 치밀어오를 뿐.
더럽고 추한 일을 겪었다는 예사롭지 않은
단어를 입에 올렸는데도 왜 궁금해 하질 않지?
게다가 자기 알 바 아니라고?
살얼음판을 걷는 듯 팽팽한 나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센터 현판 디자인에 관해 논의할 때 내가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른 캄보디아 사람들 앞에서 그 인간이 내게 의자를 던지려고 했던 날, 치밀어 오르는 화를 삭이려 외출했다가 여대생 직원으로부터 그 인간의 구더기 같은 짓거리에 대해 듣게 된 것이 내 무효한 반란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전에는 그 사람의 온갖 추악한 언행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의 마지노선은 지키고자 노력했었다. 일말의 측은지심이랄까. 강산이 여섯 번 바뀌는 나이를 처먹고도 저 수준밖에 안 되는 그 사람의 그릇이, 살아오면서 자신의 잘못된 사고방식과 행동을 깨닫지 못하게 만든 우리 사회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만약 내게 무슨 짓이라도 실제로 저질렀다면 물론 180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겠지 하면서도 나 스스로 문제의 핵심을 애써 외면하며 마음을 다잡기에만 바빴던 건 아닌지 나도 내심 나 자신을 부끄러워하던 참이었다.
고갈되고 있었던 내 인내심이 더 이상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자 오히려 배짱이 생겼다. 순간적으로 욱했던 것을 사과하기는커녕, 나와는 더 이상 함께 일할 수 없으니 본인이든 나든 누구 하나는 그만둬야 한다는 의견을 본부에 전달하겠다는 뻔뻔스러운 작태를 마주하니 이제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래. 그렇게 참고 견뎠어도 그 인내심의 대가가 결국 이런 파국을 맞는 것이라면 나도 이제 애써 웃는 모습만 보여줄 필요가 없겠구나.
이런 내 마음가짐에 불을 댕긴 건 차원을 달리한 그 사람의 쥐새끼 같은 수작이었다. 다음날인 일요일 오전, 아침 일찍 출근한 캄보디아인 직원들이 딱히 할 일도 없이 1층 내부를 어슬렁거리고 있는 사이, 아침식사도 하기 전에 그 사람이 나를 주방 한 쪽으로 데려가더니 갑작스러운 사과 인사를 건넸다. 어젯밤 한숨도 못 자고 생각했다며, 오늘 밤 한국에서 청소년봉사단도 오는데 달랑 둘 뿐인 한국인들이 눈도 안 마주치고 있는 꼴을 보여주면 어쩌겠냐며 억지로 내 오른손을 쥐고 악수를 해댔다. 어제는 마치 죽일 듯이 으르렁거리다가 하룻밤 새에 꼬리 치며 살살대는 강아지로 돌변한 그 사람을 보니 기가 막혔다. 어젯밤 그만두라는 은근한 압력이 섞인 말을 하며 나를 궁지로 몰아넣으려 하다가 마음대로 하시라며 내가 오히려 세게 나간 것이 의외였는지 갑자기 굽실대는 모양새가 정말 가관이었다. 내가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지나치게 단순한 이유만으로 의자를 던지려고까지 하며 화를 낸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느냐는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재차 회피한 채 앵무새처럼 “다시 잘 해보자”는 말을 되뇐다. 무엇이 잘못됐는지에 대한 개념 따윈 없었다. 얕디얕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다시 한 번 느끼며 나는 대답했다. 어제 일어난 일은 앞으로 살아가면서 잊지 못할 충격적인 사건이었다고.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그리고 내일 올 아이들을 위해 일단은 묻어두겠다고. 여대생 직원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접어두었다. 섣불리 건드릴 사안도 아니었을 뿐더러,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당장 해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날 저녁 16명의 고등학생, 대학생으로 구성된 청소년봉사단이 프놈펜에 도착했다. 아이들 앞에서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려 해도 그 사람의 얼굴만 보면 치미는 분노와 역겨움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센터와 직원 소개와 더불어 봉사단이 10박 11일간 캄보디아에서 경험할 프로그램을 브리핑하는 그 짧은 동안, 도대체 왜 저럴까 싶을 만큼 온갖 뻥튀기를 해가며 아이들을 선동하는 모습을 보고 또다시 느꼈다. ‘저 인생은 가련하리만치 거짓과 오물로 가득차 있구나.’ 그런 사소한 모습들에서 나는 다시 한 번 차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입구만 열어도 내용물을 확인할 수 있을 법한 주머니를 왜 그렇게 거짓 포장으로 꾸미고 부풀리지 못해 안달인지, 게다가 순수한 청소년 아이들 앞에서.
봉사단이 깜뽕참이라는 도시에서 일주일가량을 봉사활동에 전념하는 동안, 도서관 개관을 코앞에 두고 마쳐놓아야 할 일들이 많았다. 깜뽕참에 가서 아이들이 별 문제없이 생활하고 있는지, 봉사 활동에 지장이 없는지도 점검해야 하는데, 그 사람 눈치를 보느라 늘 쩔쩔매는 캄보디아인 남녀 대학생 직원들을 두고 센터를 하루 이틀 떠나 있자니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어차피 그 사람은 센터장이랍시고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입으로만 지시를 해대는 상황이라, 내가 센터를 책임지고 있겠다고 박박 우겨서 그 사람이 깜뽕참으로 가 아이들을 챙기기로 하고 나는 프놈펜에 남았다.
그가 없는 사이, 대학생 직원들로부터 또 다시 어이없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 사람이 내가 자리를 비울 때마다 수시로 직원들을 윽박질렀다고 했다. 미스 리는 정신이상자에 성격파탄자니까 가까이하지 말라고, 말조차 섞지 말라고 그랬단다. 아, 그래서 직원들이 자꾸 눈치를 봤던 거였구나. 그제야 아귀가 들어맞는 느낌이었다. 얼굴에 만연한 웃음을 띠고 나를 대하면서 뒤에서는 내 험담을 늘어놓으며 직원들과 나 사이를 이간질하고 있었다니. 늘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뒤통수를 때리는구나. 도대체 얼마나 더 기함해야 하는지. 감정의 골이 걷잡을 수 없이 깊어지자, 봉사활동을 마치고 그 사람과 함께 돌아온 봉사단 청소년들 앞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냉랭한 기운을 숨기기 어려웠다. 심지어 아이들이 보는 데에서 언성을 높인 일도 여러 번 있었다. 아이들한테까지 몰상식과 거짓말을 일삼는 그의 언행에 번번이 내가 점화된 탓이었다.
봉사 프로그램에 앙코르와트 관광이 포함되어 있어 이번엔 내가 봉사단을 이끌고 씨엠립을 향했다. 어느 한국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 아이들을 그룹지어 투숙하게 하고, 여장을 풀던 첫 날 저녁, 나와 같은 방을 쓰게 된 몇몇 여학생들로부터 기절할 만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서너 명의 여학생들이 그 개자식이 내게 한 짓과 비슷한 성추행을 자신들에게 저질렀다며 분기탱천하여 거의 울먹이기까지 하면서 털어놓았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평생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을 정도로 내 안에서 주체하지 못할 분노가 터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캄보디아 현지 여자들에게, 나한테 한 짓도 모자라 어린 학생들에게까지! 항상 그래왔듯 늘 내 상상을 뛰어넘는 그 인간의 파렴치함에 치가 떨렸다.
씨엠립을 다녀온 날 저녁, 그렇게 기다려왔던 동갑내기 남자 간사가 마침내 프놈펜에 도착했다. 다음 날, 센터장을 빼고 간사들과 봉사단끼리 가진 활동 평가회에서 센터장의 행각이 도마 위에 올랐다. 아이들이 분을 못 이기며 성토한 그의 행위는 다양했다. 여학생들에게 자신의 방이 더 넓으니 들어와 같이 자자고 했다거나, 티셔츠 라인을 따라 속옷을 건드리고 엉덩이를 주무르듯 만졌다는 일화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아이들은 일찌감치 그의 성추행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한 후, 그 사람의 포악한 성질까지 미리 파악해 자신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유연하게 대처했다. 왜 그러냐고 대놓고 따지기보다는 16명 중 4명밖에 안 되는 남학생들이 나머지 12명의 여학생을 보호하느라 이동할 때마다 그 사람을 에워싸고 다니며 격리시키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자질 부족에 인면수심인 사람이 센터장으로 군림하고 있는 것에 대해 아이들은 심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봉사단이 떠나고 난 후, 남자 간사와 마주앉아 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업무가 뒤죽박죽된 것은 물론이고, 신문에서나 봄직한 일을 내가 겪었다는 것에 대해 심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특히 낮에 아이들이 너나 할것 없이 이구동성으로 털어놓은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쐐기를 박는 듯한 내 경험담을 듣자 그는 진저리를 쳤다. 이 동료 간사도 남자이긴 하지만, 프놈펜에 오기 전 한국에서 몇 번의 모임을 통해 그를 겪었던 터라, 그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자리하고 있었던 탓인지, 그동안 겪은 일을 이야기하다 그동안 참았던 모든 것들이 눈물과 함께 쏟아져 나왔다. 다행히 남자 간사는 심정적으로도 어느 동성 친구 못지않게 내게 큰 동조를 해주었다.
그 다음날부터 우리는 나름대로 계획을 세웠다. 남자 간사가 한국의 지인을 통해 알아본 바에 의하면 지금까지의 일이 형사고소감이라고 했다. 그 말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겪은 일이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한 사안이라는 이야기를 듣자, 문득 겁이 나면서도 한없이 고개를 치켜드는 자책감과 자괴감을 누를 수가 없었다. 왜 미처 깨닫지 못했을까. 왜 그냥 참으면 된다고 생각했을까. 일단 뭐라도 행동으로 옮길 만한 적절한 시점은 개관식 즈음이었다. 한국에서 사무총장을 비롯한 본부 직원들이 몇 명 방문할 테니, 그들이 머무는 동안 여기 사정에 대해 논의할 기회가 있으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그 사람과 나는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가 “저 여자는 젖이 너무 커서 징그럽다”거나 “살찐 여자는 젖소 같으니 살을 빼야 한다”는 식의 발언을 서슴지 않고 내뱉을 때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그래서 그렇게 포르노나 보고, 이 여자 저 여자 치근대고 다녔냐”며 쏘아붙였다. 내가 당신의 추악한 짓을 듣고 보고 경험해 알고 있다고, 당신 때문에 센터뿐만 아니라 한국에 대한 이미지까지 나빠지고 있다고, 그런 식으로 더 계속하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이렇게 저렇게 수없이 대항해보아도 달라지는 게 전혀 없었다. 캄보디아인 직원들에게 나와 어울리지 말라고 윽박지르는 것이 심해진 것은 물론, 심지어 남자 간사한테까지 날 두고 정신병이 있는 사람이니 빨리 한국에 돌려보내라고 닦달한다고 했다. 나로 인해 모든 문제가 발생한 것처럼 그는 애써 꾸며대고 있었고, 잘못한 것도 없이 나로 인해 주변사람들이 힘들어진다는 생각에 나는 괜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개관식을 마치고, 그 날 저녁 한국에서 날아온 직원들까지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사무총장을 필두로 그간의 경과보고와 센터의 향후 운영방향 등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였지만, 내 정신은 온통 단 한 군데에만 쏠려있었다. 센터장이 저지른 성폭력 문제가 해결되어야 내가 계획하고 있던 나의 미래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개관식이 시작되기 전인 아침에 만났을 때에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워하며 두 손을 잡고 격려의 말을 쏟아내던 단체 사람들이 관광 일정 등 스케줄을 마치고 저녁에 돌아와서는 어딘지 모르게 차갑게 나를 대하는 것을 보고 또 한 번 그 사람의 이간질이 빛을 발했을 것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고 있던 터였다. 그런 기류를 눈치 채고서도 일단 부딪쳐보리라는 생각에 기회를 보다가 사무총장이 내게 이러저러한 부분에 대해 큰 역할을 담당해주기를 바란다는 당부의 말을 건네자 이 때다 싶어 그 말을 받아 대답했다. 그렇게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그 동안 여기서 “더럽고 추잡스러운” 일을 겪었기에 힘들었노라고. 일순간 분위기가 싸해지더니 잠시의 머뭇거림을 거쳐 사무총장이 말했다.
“그건 내가 알 것 없고, ……”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바로 그 다음 말이 어떻게 이어졌는지 자세히 생각나질 않는다.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황당하기 짝이 없고, 화가 치밀어오를 뿐. 더럽고 추한 일을 겪었다는 예사롭지 않은 단어를 입에 올렸는데도 왜 궁금해 하질 않지? 게다가 자기 알 바 아니라고? 혹시나 하던 예감이 순식간에 확신으로 변해 강렬히 다가온 순간이었다. 하루 종일 따라다니며 그간의 이 곳 사정을 전하는 척하면서 이들에게 나를 험담했겠지. 센터 직원들에게 그래왔던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꾸며대지 않았을까. 모르긴 몰라도 정신이나 성격에 이상이 있어 문제가 심각한 것처럼 조장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 대해 전혀 우호적이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다시 어떻게 물꼬를 터야 하나 하는 암담함과 그 사람에 대한 분노에 휩싸여 폭발하기 일보 직전까지 갔을 때, 내 왼쪽에 앉아 있던 남자 간사가 탁자 밑으로 내 팔을 잡으며 나를 만류했다.
이 날 이 자리를 얼마나 기다려왔는데! 프놈펜에 도착한 날부터 얼마나 마음 졸이면서 참고 또 참아왔는데! 그 모든 기대와 희망이 삽시간에 사그라지는 것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목도하듯 느끼며 아연실색한 채 앉아 있는데, 그 와중에 그 인간이 자기변호를 눈부시게 펼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세대차이가 있다 보니 이 간사가 서운한 게 많았나보다는 둥, 이 모든 게 자신의 부덕의 소치라는 둥, 나이 먹고 기운 빠진 자신이 쉬는 게 낫다는 둥. 무슨 드라마 대사를 읊고 있는 것만 같이 너무나도 부자연스럽고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그만두겠다는 말을 내뱉어버렸다. 나도 계획한 적이 없거니와, 옆에 있던 남자 간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일 만큼 갑작스러운 선언이었다. 사무총장을 포함해 한국에서 온 본부 측 세 명과 센터 직원 세 명, 이렇게 여섯 명 사이에 당시 여러 말이 오갔었지만,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잘 기억하지 못하겠다. 그냥 그 한 시간 남짓 동안 내 모든 기대가 서서히 꺾여가는 상황이 마치 정점에서 0을 향해 하강곡선을 그린 그래프처럼 도식화된 이미지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그만두겠다고, 더 이상 못 해먹겠다고 고개를 젓고 있는 나. 모든 게 자신의 불찰이며 부덕의 소치라는 말을 녹음테이프를 틀어놓은 것처럼 되풀이하는 그 사람. 총장 직속으로 여기 프놈펜에서 센터장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일해보지 않겠냐며,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카드를 제안이랍시고 내놓고 앉아 있는 사무총장. 돌이켜봐도 여전히 우습지 않은가. 더럽고 추잡스러운 일을 겪어 힘들다는 직원을 둘러싸고 언제, 어떻게, 무엇을 겪었기에 그런 이야기가 나온 건지 그 배경이나 원인 따위를 캐려 하기는커녕, 그 작은 프놈펜 안에서 센터와 관계없이 같은 기관에서 파견 나온 직원으로 근무하라니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지. 내 머리가 백발로 변해있지는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이 될 정도로 힘이 쭉 빠지고 노곤함이 찾아들었다. 내 안의 무언가가 툭 끊어져버린 느낌.
그래, 센터장 너 이 새끼. 일단 네가 이겼구나. 육십 몇 년을 이런 식으로 살아왔니? 사무총장, 단체장이라면서 이딴 식으로밖에 못해? 어떻게 약속이나 한 듯 최악이라고 생각할 법한 길로만 빠지는 거지? 그래 좋아. 미련조차 두지 않을 거야, 이 더러운 것들아. 이런 생각에 나를 맡기면서도 겉으로는 나도 웃으며 “인연이 여기까지인가 보네요”라고 사무총장에게 마무리 인사를 건넨 게 생각난다. 그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더 삐걱대면 쟤가 저렇기 때문이라고 손가락질할 게 뻔했기 때문에, 나도 나름대로 수를 좀 쓴 것 같다.
자리가 파한 후, 그만두겠다는 말을 갑자기 왜 했냐는 걱정 섞인 남자 간사의 질책에 대답이 궁했다. 그냥 도저히 더 못하겠다 싶어 나도 모르게 툭 나온 말이었다, 그렇지만 후회는 없다는 식으로 대충 얼버무렸다. 이제 와서 어쩌겠느냔 말이다. 사무총장이 있는 자리에서 그만두겠다고 대놓고 말해버렸고, 붙잡는 시늉을 하는데도 끝까지 굽히질 않았으니. 이제는 도저히 가망이 없었다. 그 인간과도, 그 단체와도 더 이상 인연의 끈을 잇고 싶지 않았다.
사퇴의사를 밝히고 수리한 과정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사이에 앉은 자리에서 일사천리로 진행됐지만, 우습게도 내가 언제 그만두고 떠나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입 밖에 낸 적 없이 흐지부지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만둔다고 밑밥을 던져 놓고 정신을 차려 보니 당장 며칠 후면 중국에서 공부하고 있던 막내 여동생이 겨울방학을 맞아 언니도 볼 겸 캄보디아 관광을 하러 올 예정이었다. 이제 와서 못 오게 할 수는 없고, 그만뒀다고 어떻게 말을 꺼낼 것이며, 막상 동생이 오면 어디서 묵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이참에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자니 부모님 얼굴을 어떻게 뵈어야 할지도 너무 걱정스러웠다. 다짜고짜 일을 그만둘 게 아니라 진작 다른 곳을 알아봐 둘 걸 하는 후회도 앞섰다. 그만두기로 한 내 결단과 나를 그렇게 내몰았던 내 인내심의 발휘에 대한 후회는 일말도 없었지만, 눈앞에 닥친 상황을 어디서부터 정리해야 좋을지 몰라 또 다시 잠 못 드는 나날이 이어졌다.
예정대로 동생과 2주 정도 여행을 마치고 다시 센터로 돌아와 일자리를 본격적으로 찾아 나섰다. 부푼 가슴을 안고 떠난 길인데,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으니 뭐라도 붙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갈 때 가더라도 프놈펜이든 어디든 당분간 적을 두고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놓고 돌아가야지. 프놈펜 내의 국제기구나 단체를 찾아 인터뷰 기회를 자청하고, 몇몇 캄보디아 친구들을 통해 합류할 만한 프로젝트들을 알아봤다. 다행스럽게도 몇 군데 인터뷰 약속을 잡아 놓고 무너진 탑도 다시 쌓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뿌듯해하던 어느 날, 이런 내 속사정을 모르던 남자 간사가 개인적인 일 때문에 일주일간 한국에 다녀와야 할 일이 있다며 그 전에 내가 먼저 한국에 들어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내 의견을 물어왔다.
여행을 다녀온 후, 나는 그 때도 여전히 센터에 머무르고 있었다. 1월에도 열 댓 명의 청소년봉사단이 두 팀이나 번갈아 왔기 때문에 센터 상황이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고, 나 역시 며칠이라도 더 머물며 쓸 만한 동아줄을 잡으려 안간힘을 쓰던 때였다. 눈만 마주치면 내 험담을 일삼으며 거짓말로 본부에서 공문이 왔으니 빨리 쫓아내라고 남자 간사를 볶아대던 그 사람의 바닥 같은 인격을 잘 알고 있기에, 그리고 센터를 나가 게스트하우스를 전전하려는 나를 굳이 붙잡아 왜 헛돈을 쓰냐며 센터에 계속 머무르도록 북돋워주고 센터장으로부터 보호해주려고 노력했던 남자 간사의 따뜻함이 되레 너무 고맙고 미안했기에 나는 내 개인적인 계획보다는 남자 간사의 스케줄을 우선 고려해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센터장을 하루 빨리 강제 소환해 귀국시키는 일. 그것이 우리의 유일무이한 목적이었다. 그러자면 일단 본부를 납득시켜야 했고, 사건 피해 당사자인 내가 적극 나서서 피해상황을 낱낱이 알리면 남자 간사가 지원사격을 하는 것으로 대강의 밑그림을 그렸다. ‘남자 간사보다 며칠 먼저 한국에 들어가 사무총장과 대면하면 되겠지’라고 막연히 생각해 놓았다.
이런 계획을 세우게 된 데에는 내가 센터를 비운 사이에 벌어진 일들이 큰 역할을 했다. 12월 말에 캄보디아를 방문했던 첫 봉사단의 개별 평가보고서가 본부에 제출되고 나서, 센터장의 성추행 문제가 기관 차원에서 불거지게 된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남자 간사도 사무총장 등 본부 측의 연락을 여러 번 받았다고 했다. 전부 사실이라고, 이 간사는 더한 일도 겪었기 때문에 그만두겠다고 말한 것이라고 남자 간사가 나를 대신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바를 밝혔지만, 본부의 반응은 “정말이냐”고 재차 물으면서도 별 일 아니라는 듯 시큰둥했다고 한다. 특히 사무총장은 “제3자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몽땅 빼고, 네가 직접 보고 겪은 것만 얘기하라”고 다그쳤다고 했다. 당연히 동성인 남자 간사는 나나 봉사단 여학생들이 당한 일들을 겪었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도서관 개관 후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1층 화장실에서 센터장이 문을 활짝 열어놓고 샤워하는 것을 직접 봤다든가 하는 몇 안 되는 이야기로 신빙성을 더하는 것에 그쳤지만, 그런 남자 간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무총장이 내린 결론은 단순명료했다고 한다. “40년 동안 군생활을 한 남다른 분이라, 다른 사람과 조금 다른 점을 크게 부각시켜 문제시”하거나, “원래 나이든 남자들이 조금씩 그런 부분이 있는데, 젊은 애들이 괜히 별 것도 아닌 것을 갖고 이상한 쪽으로 몰아가는 것 같다”라나.
이렇게 풀릴 듯 풀리지 않는 엉킨 실타래를 한 움큼 안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남자 간사와 논의에 논의를 거듭해 세운 계획이건만, 돌아갈 비행기 티켓을 알아보니 비어 있는 날짜가 여행사에 전화한 바로 그 날 밖에 없다고 했다. 오늘 가지 않으면 일주일을 넘겨야 하니 그렇게 되면 우리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컸다. 남자 간사와 내가 함께 사무총장 면전에서 센터장의 귀환을 강력 요구할 작정이었으니까. 아무리 길어도 한 2주 정도면 마무리 지을 수 있겠지. 그 사이에 잡힌 인터뷰나 미팅 일정은 미루거나 어쩔 도리 없이 펑크를 내게 되었다. 저런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 저 자리에 그냥 있지 못하게 하는 것보다 더 긴박하고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어. 아쉬움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지만 곧 돌아올 것을 기약하며, 나는 급하게 짐을 쌌다. 업무 수행에 요긴할 것 같아 바리바리 싸간 전공 책들과 대부분의 옷들은 남겨두었다. 곧 돌아올 거니까.
갑작스레 오늘 한국에 돌아가게 되었다고 주변에 알리니, 낮에 본 얼굴들이지만 가기 전에 다시 한 번 만나자며 저녁 때 센터장을 뺀 모두가 한자리에 모였다. 모두들 대충이라도 센터장의 행각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 당시 한인사회 일부를 중심으로 센터장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퍼져가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어느 한국분이 일부러 귀띔해주었을 만큼, 그의 더럽고 천한 행위가 주변에 알려져 있었다. 1, 2주 후에 다시 보자고 가볍게 인사하고 나온 그 날 밤 송별회가 그토록 긴 이별이 될 줄이야. 그 날 이후 정확히 1년 8개월 동안 나는 캄보디아에 돌아가지 못했다.
〈다음 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