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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2/3 - 욕망의 모방, 질투는 나의 힘
  • 상담소 후원회원 가온
몸 이야기

욕망의 모방
질투는 나의 힘
연재 2/3

상담소 후원회원 가온

첫 번째 글 <알고 싶다면 하라: 체현>에서는 무엇이든 알고 싶다면 직접 해보는 길 밖에 없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어떤 배움이 체화되고 나의 변형의 질료가 되기 위해서는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고 저 새로운 경험의 세계로 나가봐야 한다는 것입니다.1 직접 몸으로 체험하고 그 경험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언어와 이론을 함께 배운다면, 우리 몸과 머리는 유기적으로 함께 성장의 양분을 빨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욕망은 모방적’이라고 인류학자, 사회학자, 정신 분석가들이 입을 모아 말합니다.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누군가의 것을 따라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편‘독창성’,‘개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이러한 욕망의 모방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허영’에 빠진다고 하는데요. 허영은‘모방(물듦)의 사실을 인정하지 않거나 숨긴 채 자신의 사이비 독창성을 고집하는 태도’라고 르네 지라르2는 정의합니다. 허영을 직시하는 방법은 먼저 나의 내면을 구성하고 있는 타인의 영향을 직시하는 것과, 모방의 사실을 잊거나 덮어버리지 않고 독창성의 환각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3 사회라고 하는 이 거대한‘모방적인 욕망’의 그물망에서 나는 무엇을 쫓아가고 있는가? 특히 어떤 몸을 욕망하고 모방하여 왔는지 저의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내가 욕망하는 몸은 어디에서 왔지?

일전에 함께 사는 친구가 성형수술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쌍꺼풀 수술을 하더니, 턱을 깎았습니다. 고통스럽지만 만족해하더군요. 맥주병으로 다리를 문지르던 그 친구는‘종아리 근육 퇴축술’을 다음 작업으로 생각했습니다. 다리가 드러나는 옷을 입고 집밖으로 나가면, 온 길거리의 사람들이 다 나의 종아리를 본다고 느꼈던 저는 그 친구와 함께 수술을 해야겠다고 조금씩 마음이 기울고 있었습니다. TV에서도 종아리 근육 퇴축술이 얼마나 간단한 시술인지, 직장인들이 점심시간 동안에 수술하는 모습도 보여주더군요. 이제 저에게는 돈을 모아 성형수술 침대위에 눕는 것만이 남은 듯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수술의 가장 치명적인 부작용이‘걷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얇은 종아리를 갖겠다는 욕망은 싹 사라지고 말았습니다.4 별생각 없이 친구 따라 강남 가듯 종아리 근육을‘퇴축’할 뻔한 저는 그 사건 이후‘대체 내가 욕망하는 것은 어디서 왔는가? 내가 뭘 따라하고 있는가?’물어야 했습니다. 나의 욕망은 아주 특정한‘여성적인 아름다움’에 맞추어지고 끊임없는 따라하기(모방)의 행위가 그를 뒤좇았습니다. 신발이며 옷이며 화장이며 말투, 몸가짐 하나하나 까지 TV속의 연예인이나 가까운 친구들의 것을 따라했습니다.

또 따라오는 질문은‘어디까지가 나의 시선이고, 어디까지가 사회의 시선인가’이었습니다. 만약 내가 나의 종아리가 불만이라면, 그것은 나의 시선인가? 사회의 시선인가?‘사회’중에서 누구의 시선인가? 같은 과 친구 xx의 시선? 아니면 xx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은 나의 시선? 혹시 살 좀 빼라고 하는 친척언니의 시선?

나만의 미의 기준을 만들고자 하던 나는 도대체 나의 시선과 타자들의 시선을 구분할 수 없어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때‘내면화’라는 개념이 들리더군요. 나도 미디어의 이미지와 가부장제적 미의 기준을 내면화하고 있었습니다. 나 자신의 시선과 내 안에 들어온 외부의 시선은 칼로 무 자르듯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구분 불가능한 것이었지요. 다만 무비판적으로 가부장제의 시선을 접하는 동안 나는 그것이 내 안에 이미 스며들어 있는지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도 몰랐던 것입니다.

나의 시선을 구성하고 있는 가부장제의 시선은 아프고 불편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언제나 저런 몸이 되면 나도 연애를 할 수 있고, 짧은 치마나 스키니 진을 입을 수 있고, 섹스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지금 나의 수많은 가능성을‘날씬해진 언젠가’로 모두 미루었습니다. 현재를 살지 못하게 된 것이죠. 그런 하나의 미(美)에 대한 선망과 동경이 좌절되자 그것은 불행으로 이어졌고, 다이어트와 성형이라는 가볍지 않는 선택으로 나를 몰아갔습니다.

그뿐인가요, 자기 몸에 대해 수용하고 긍정하지 못할수록 타자의 몸은 나에게 열등감을 불러일으키는 질투와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열등감을‘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인가에 의해‘스스로’열등감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마른 몸, 자연스러운 몸, 몸에 대한 검열과 제약이 없어 보이는 몸에서 풍기는 그 자연스러움과 활발함, 가벼움이 저의 열등감을 불러내고, 그 열등감은 어느 덧 나의 자아의 모습으로 이어졌습니다.5

그 시선에 맞추어서 사는 것이 행복하지도 않았고, 내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들 전지현이 될 리 만무하니, 여성다운 외모꾸미기라는 소비 시장 안에서 그 욕망은 끝을 찾지 못했습니다. 원래 욕망은 탐하면 탐할수록 커지는 것이고 시장은 우리의 행복을 욕망 안에서 허우적대게 만드는 시스템이니까요.

그나마‘당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라!’는 여성주의의 메시지는 그 안에서 숨 쉴 구멍을 주었습니다. 조금씩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고자 머릿속에서 주문을 외웠습니다.‘난 나다. 너네들이 뭐라고 보던 난 나야’그러나 여전히 내가 욕망하고 따라할 구체적인 대상이 가까이 있지 않았고, 그 메시지도 쉽게 체화되지 않았습니다.

욕망하는 몸이 바뀌었습니다 ; 질투는 나의 힘

그러나 나의 아름다움을 보는 눈(심미안審美眼)을 바꾸는 일생일대의 만남이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다른 몸 프로젝트를 함께 했던 xxx였습니다. xxx를 비롯한 다른 몸 친구들은‘여자다워야 한다’,‘예쁘게 보여야 한다’는 이성애적 규범에서 자유로워 보였습니다. 몸의 움직임이 자유로웠고, 활개를 치고 다니며, 저항하고 대항해야 할 순간에 대처할 수 있는 몸 훈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해보지 않았던 많은 움직임들에 도전하고 몸 일기를 쓰고 있었습니다.

몇 해 전 우연히 한 행사에서 마주쳤을 때‘어쩜, 참 안 예쁘게 생겼다’고 생각했던 그녀가, 보면 볼수록 멋있고 잘 생겼고 예쁘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를 따라하고 싶었고, 그녀에게 인정받고 싶었고, 다른 몸 그룹에 나도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그녀부터 시작해서 이후로 만난 다른 몸 언니들은 나의 심미안을 급격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운동하는 몸, 근육의 몸, 몸적 자신감으로 어디서나 한 자리를 든든히 차지하고 있는 몸, 자기 공간을 압도하고 굳건히 서 있는 몸, 길의 중앙으로 걸어가는 몸, 사랑을 구걸하지 않는 몸, 풍만한 몸의 아름다움을 가진 몸, 자기 리듬을 타는 몸, 입고 싶은 데로 입는 몸, 방어할 수 있는 몸, 위축되고 수축되지 않는 몸, 노래하고 춤추는 몸, 격파하는 몸, 장미란 선수같이 세상을 들어 올릴 몸.

그녀들은 운동장에서, 산에서, 달리면서 행복해 보였습니다. 빛이 났습니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몸으로 발그레진 얼굴로 거칠 것 없이 소리치고 웃었습니다.

그러나 욕망하는 몸이든, 욕망하지 않는 몸이든 나의 시선은 언제나 타자를 향해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공허하다는 느낌이 커졌습니다. 다른 몸 그녀들을 만나서 나의 심미안이 바뀌었지만, 그러나 그 시선 역시 타자를 향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몸 프로젝트는 가부장제의 시선,‘당신의 시선을 넘어’서고자 했지만, 끊임없이 당신을 향하는‘나의 시선’을 나는 보아야 했습니다. 따라하고 싶은 그녀가 바뀌었지만, 늘 나는 따라하고만 있나? 쓸쓸했던 것이죠. 밖을 향하는 시선을 멈추어 보았습니다. 따뜻하게 거울을 볼 수 없었던 나의 시선에 대해 시인은 다음과 같이 무릎을 치게 만듭니다.

…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서 였을까요? 타자를 향한 시선은 어느덧 나를 향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거울 속의 나를 슬며시 피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거울을 보고 한번씩 씩 웃게 되었지요. 나를 보는 눈과 타자를 보는 눈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내가 나의 몸을 긍정할수록 타자의 몸을 긍정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나를 수용할수록 타자 역시 더 넓게 수용하게 되었습니다. 몸에 덧씌워졌던 수많은 욕망들의 허상을 조금 더 거리를 두고 보게 되었습니다. 늙어가는 몸, 아픈 몸, 더 많은 몸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몸은 그저 몸 일뿐.

행복이 최고의 권력입니다

행복은 거부할 수 없는 최고의 권력입니다. 나는 그/녀들이 행복해 하는 것을 보았고, 느꼈고, 그 행복이라는 권력에 매혹되었습니다. 그리고 나 역시 더 커진 행복을 자주 느끼게 되었습니다. 자신감 있게 산다는 것, 생생하게 산다는 것, 지금 여기를 몸으로 산다는 것의 희열을 맛본 것입니다. 나에게 아름다운 것이 달라졌습니다. 내가 무엇을 욕망하는가, 내가 무엇을 모방하는가 직시하는 연습을 끊임없이 하게 되었습니다. 누구에게든, 특히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로부터 그들은 어떻게 해서 저리 행복한가, 배우려고 합니다. 내가 나의 몸을,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데, 어디에서 그 사랑을 구걸하겠습니까? 내가 나에게 스스로 주지 않는 것을 어느 누가 주겠습니까? 깊이 그리고 충분히 나는 나를 사랑하는가? 나는 점차 되묻게 되었지요.

사회운동은 타자와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움직임입니다. 하지만 저는 요즘에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행복’에 있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됩니다. 우리는‘행복’한 사람을 알아봅니다. 직관적으로 그/녀를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가 행복한 빛을 발할수록 그 빛은 사람들에게 변화하고 싶은 자극이 되는 것이지요. 물론 질투와 시기로 눈멀지 않는 다면요. 아니, 당신이 무언가를 보고 질투와 시기를 느낀다면, 당신도 그것을 원한다는 신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 부러운가? 그것은 나도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더군요.

이제 나의 일상에서 행복을 지키는 것이 나의 투쟁이 되었습니다. 주위 친구들의 아픔을 들어 줄 수 있으려면 나는 오히려 더 건강해져야 했습니다. 친구를 공감하고 위로하고 힘주고 싶은 마음은 내 안의 에너지와 행복에서 나왔습니다. 같이 울고 말지만, 같이 넘어져서는 안 되었습니다. 악착같이 걷고, 없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라도 노을을 보며 행복해 합니다. 내 몸도, 내 아픔도,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더 자주 깊은 행복을 느낍니다.

나는 나 스스로에게 몸과 마음으로 말합니다.

‘나는 언제 행복한가, 그 행복을 더욱 깊이 느끼고 지키십시오. 욕망하고 모방하는 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조절하는 힘을 기르십시오. 욕망은 끝이 없으니 내가 그 욕망을 직시하고 조절할 때 행복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언제든 그 사람에게 배우려고 하십시오. 지금 나의 고통의 이면(裏面)인 행복을 질문해봅니다. 지금 나는 행복하기를 선택하고, 그리하여 새로운 국면은 오고 말 것입니다.’6

오매님과 박지나님의 빨간펜 감사합니다.

1 나눔터 59호, 몸이야기「지금 여기에서, 내 몸으로 세상을 바꾸다」에서 키라는“낯선 영역으로 내 몸을 던져보는 것이 어떤지?”라며 운동화 끈을 묶고 문밖으로 나가자고 추동하고 있지요.

2 르네 지라르는 프랑스의 문학비평가로서『폭력과 성스러움』,『희생양』『,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등의 저자입니다.

3 한겨레, <기획-책과 생각>, 김영민의 영화와 인문,「홍상수,‘극장전’: 허영의 주체」,2008년 8월 2일 기사를 참고하였습니다.

4 이후로 수많은 성형수술이‘친구 따라 강남 가듯’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형 계모임을 하고, 친구들끼리 가면 단체 할인을 받고, 엄마 친구의 소개로 연결되는 등 성형은 사적인 관계망을 통해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집니다. 그런 방식은 성형에 대한 낯설음이나 두려움, 부작용의 기회비용마저도 감수하게 하고, 성형을‘할 만한 것’으로,‘남들도 다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5 친구 박지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다음의 글이 생각났다고 합니다. 나를 들여다볼 때의 이 당혹감과 괴리감에 위로가 되었습니다. 몇년전 유럽의 한 예술가가 시내 번화가에 투명 화장실을 설치한 적이 있습니다. 화장실 안에서 밖이 잘 보이지만 밖에서는 안이 전혀 보이지 않는 원웨이미러 방식이었는데 이용자들이 재미있는 반응을 보였다는군요. 일단 들어오기는 하는데 제대로‘볼일’을 보지 못하더라는 거지요. 나는 잘 보이는데 상대방은 나를 전혀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기가 쉽지 않아서였습니다. 공상 소설 속에서 초보 투명인간이 자기가 안 보인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해서 실수를 연발하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자기를 인식하는 일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내가 보는‘나’와 남이 보는‘나’가 다른 것은 물론이고 그걸 알아차리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나는 상관 안 해’류의 무신경이나 뻔뻔함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한 자기인식은, 투명화장실에 앉아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행인을 바라볼 때처럼 당혹감과 괴리감을 동반합니다. 그걸 견딜 수 있어야 비로소 제대로 자기대면이 가능해집니다. -출처: 정혜신의 그림에세이, 투명화장실, http://blog.naver.com/mindprism

6 나눔터 58호, 몸 이야기, <고통이 아니라 행복을 질문하기>, 키라의 글을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