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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기로 가해자를 고발하다 - 연재 4th(마지막회)
  • 진 (성폭력 피해생존자)
생존자 말하기 · 연재 4th

말하기로 가해자를 고발하다

그러나 나는 사건의 종말을 보고 싶었다. 센터장의 몰락보다는 그가 저지른 일에 대한 합당한 조치가 내려지는 과정을 내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1년이 넘는 세월을 굳이 흘려보낼 필요가 없었으니까.

진

짧은 기간 동안이나마 정들었던 캄보디아 직원들과 함께 몇몇 한국인과의 아쉬운 작별을 뒤로 한 채 서둘러 한국으로 돌아온 바로 다음 날, 밤늦은 시각에 집 전화벨이 울리고 어머니가 수화기를 건네주었다. 내 귀국 소식을 어떻게 알았는지 본부의 여성 본부장이었다. 마치 내가 한국으로 돌아와 무슨 일이라도 크게 벌일지 몰라 애초에 싹이라도 자르려 작정하고 전화한 듯, 더없이 다정하고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냥 미친개한테 물렸다고 생각해. 나는 젊었을 때 그보다 더한 일을 겪었어도 다 용서했어. 기독교 믿니? 예수님의 자비로 용서를 어쩌구저쩌구……” ‘모 여성단체’ 경기도 부천인가 하는 어느 지회 지부장이었다는, 인생 선배라는 말을 들먹여가며 온갖 회유성 발언을 쏟아내는 그의 얘길 들으며 나는 소리까지 버럭 내지를 정도로 이성을 잃었다. 여성 리더십을 들먹이던 인간의 개인사와 속내가 결국 이렇게 꼴사나웠다니. 너무나도 환멸스러웠다.

답답하고 암담한 심정에 인터넷을 뒤졌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다. 그 늙은 여우같은 미친놈을 하루빨리 한국으로 불러다놓아야 하는데. 거기서 더한 추잡을 떨고 있을지 모르니까. 당장 내게 필요한 것은 정보였다. 여기저기 알아보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 무턱대고 전화를 걸어 상담을 받았고, 며칠 후 국가인권위원위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감정적으로 많이 헝클어지고 두서가 없었지만, 나와 주변 사람들이 받은 피해 상황에 대해서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고 또 어떻게든 이를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절박한 심정이었기에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상담소를 통해 두 번이나 변호사를 만나 자문을 받았다. 일단 내가 겪은 일이 어느 정도의 조치를 취할 만큼인지 법률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봐야 했고, 또한 가해자의 행위가 그대로 묵과할 수 있는 차원인지도 궁금했다. 처벌 수준이나 피해구제방법, 위험 부담 등 법적 절차와 과정 등에 대해 무지한 형편이었으므로, 상담소 활동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큰 힘이 됐다. 한편으로는 인권위에서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시간을 두고 진행됐지만 인권위 조사관을 대면해 일대일 조사를 받았고, 여러 차례에 걸친 통화로도 내 진술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사건 해결(당시 상황에서는 센터장 소환을 의미)과 캄보디아에 돌아가야 한다는 당위성의 경중이 비슷했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요하는 고소 진행은 최후의 방편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굳게 닫힌 본부에 절망을 느끼면서도 본부장을 통해 일단 사무총장과의 면담을 간접 요청해 놓았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사무총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전화 통화를 하면서 여지없이 또 한 번 분통을 터뜨리면서도 사무총장이 수용하든 안하든 내가 원하는 바를 분명히 전달했다. “센터장의 강제 소환”과 “대면 사죄”. 사실 사죄 종용은 사무총장의 권한 밖의 일이라고 생각해 그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강제 소환”이어야 한다고 수십 번을 강조했건만, 소위 “아름다운 노년의 장엄한 귀환” 식의, 60대 노인이 은퇴 후 열대지방에서 봉사활동에 힘쓰다 기력이 쇠진해 돌아오게 되었다는 스토리로 감쪽같이 둔갑되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물론 나는 여전히 센터장의 표현을 빌린 “정신이 이상한 사람”에 머물러 있었다.

마침내 본부측과의 면담 날짜가 정해졌다. 허겁지겁 귀국한 지 꼭 한 달만이었다.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는 나이였지만, 민망함을 무릅쓰고 어머니까지 대동해 본부에 사무총장을 만나러 갔다. 그만두기는 했어도 내가 잘못한 게 없음을 증명하고 싶었고, 센터장이든 기관이든 대충 상황이 다 알려진 마당에 얼마나 더한 꼴을 보이겠나 싶기도 했다. 0%의 진심을 담은 미안하다는 한 마디라도 좋았다. 가해자인 그가 잘못을 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짚어내고, 피해자인 내가 정신이상자로 몰리는 어이없는 상황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마음이 앞섰다. 그러나 역시 큰 착각이었다. 2시간에 걸친 대면 대화에서 그는 여전히 구렁이 담 넘어가듯 요리조리 살살 피하면서 나와 내 어머니의 약을 올렸고, 본부측의 사무총장과 여성 본부장은 단체에 불똥이라도 튈까 전전긍긍하며 발뺌하기에 바빴다. 심지어 그 날 그 자리에서 “너 혼자 살자고 단체를 죽이려고 하느냐”라는 말까지 듣고 얼마나 흥분했는지 모른다. 결국 이날 대화는 무의미하게 끝났다.

저만치 두고 관망하기만 했던 ‘형사고소’라는 단어에 점점 무게를 싣게 되었다. 힘든 싸움이라던데. 성폭력 사건은 피해자가 가해자로 몰리기 십상이라는데. 진행 과정에서 피해자가 오히려 더욱 지쳐 나가떨어질 수도 있다는데. 모두들 이런 우려에 걱정을 앞세웠다. 인권위의 조사 결과가 내 손을 들어준다 해도 해당 조치에 대한 법률적 강제성이 없는 만큼, 실질적으로 무엇을 얼마나 거두기 위해 발을 뗄 것인가를 우선적으로 결정해야 했다. 결국 상담소 활동가와 인권위 조사관의 조언에 용기를 보태 시작해보기로 마음먹었다.

3월 중순, 방배경찰서를 방문해 고소장을 접수시켰다. TV에서나 봤던 유치장 창살과 총천연색 대합실 의자가 황량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폭력수사팀에서 한 시간 가량 수사관들과 대화를 나눴다. 피해자의 직접 진술에만 의존해야 하는 이런 사건의 성격상 증거 제출이 어렵기 때문에 까딱하면 피해자가 무고죄로 고소당할 수도 있다는 비관적인 현실을 두세 명의 수사관들이 입을 모아 재차 강조하며 우려 섞인 의견을 전해왔지만, 이미 각오한 터라 별다른 심적 동요는 없었다.

돌이켜 보면, 그 시간들을 어떻게 견뎌왔나 싶을 정도로 끔찍하다. 잊을 만하면 반복되는 센터장과의 대면. 굳이 대질신문이 아니어도 한 장소에서 얼굴을 마주치고, 목소리를 듣고, 또 한 편의 장황한 소설을 써내려가는 모습을 봐야만 하는 현실이 몸서리치게 싫었다. 나에 대해 여전히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는 그를 보며 쉽지 않은 싸움에 절망스러워 길거리에서 한 시간을 펑펑 울기도 했고, 거짓말탐지조사를 받으면서 별 경험을 다해본다며 짐짓 들떠하기도 했던 순간들이 지나갔다.

내가 겪은 일은 해외 봉사단체라는 특수한 상황 하에서 일어난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강제 성추행이라서 특히 많은 관심을 받은 게 아닌가 싶다. 인권위에서는 전례 없이 형사고소로 이미 넘어간 사건을 그대로 맡아 ‘언어적 성희롱’ 부분을 집중 조사해주기로 결정하여 조사관이 처음으로 해외 파견 조사를 나가 캄보디아에 다녀오기도 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사건 해결 종료를 목 놓아 기다리며 불안한 심정으로 밤을 지새우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2007년 9월, 마침내 인권위의 조사가 끝나고 결과가 알려졌다. 사상 첫 고액이라는 ‘3,000만원 배상 판결’이 권고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물론, 가해자의 이행에 관련해 법적 효력이 담보되지 않은 권고이었지만, 그 상징적인 의미는 내게도 조사관에게도 매우 컸다. 그러한 결정은 인터넷 종합매체에도 보도자료로 배포되어 실시간 뉴스로 여러 신문사에서 나와 가해자의 이름을 익명으로 처리하여 보도하기도 했다. 실제로 손에 쥔 것은 없었지만, 감격스러웠다. 그간의 심적 고통이, 내 마음고생을 헤아려가며 도와준 여러 사람들의 노력이 위로받는 것 같아 정말 기뻤다.

인권위에서 내 진정건의 ‘성희롱’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경찰서에서는 ‘성추행’ 부분이 동시에 수사되고 있었다. 수개월에 걸쳐 서너 번 경찰서를 방문해 조사를 받았지만, 별 다른 결론 없이 검찰로 사건이 넘어갔다. 강도 높은 검사의 수사에도 가해자는 잠시 수그러들다가도 인정은커녕 여전히 나를 뜬금없이 성추행 가해자로 지목하거나 소설가로 둔갑시키는 등 비이성적 행동으로 검사의 빈축을 샀다. 인권위 조사관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자신의 거짓말을 사실로 믿어버리는 단계에 접어든 듯 했다.

경찰서 수사관과 검사는 수사의 어려움과 결과의 한계를 지적하며 여러 번 내게 합의를 건의했다. 피해 보상이라는 것이 결국 가해자의 ‘미안하다’는 한 마디로는 해결되지 않으며, 금전적인 배상이 피해자인 내게 더 좋은 결과로 작용할 것이라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나는 사건의 종말을 보고 싶었다. 센터장의 몰락보다는 그가 저지른 일에 대한 합당한 조치가 내려지는 과정을 내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1년이 넘는 세월을 굳이 흘려보낼 필요가 없었으니까.

판사를 마주하고 법정 중간의 증인석에 서서 선서를 하던 때가 기억난다. 이런 것까지 경험해봐야 하나 싶어 가슴이 먹먹했지만, 잘못한 게 없으니 당당하게 있는 그대로 진술하면 된다고 다독여주시던 활동가 선생님이 사무치게 고마웠고, 어떻게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나 싶게 순식간에 지나갔던 순간이었다. 그날 가해자와 가해자의 변호인이 내게 쏘아댄 무책임한 화살들과 대충 짐작이 간다는 듯 공명정대한 표정을 지으며 허둥대는 가해자의 변호인을 몰아세웠던 판사의 얼굴도 떠오른다.

마침내 작년 7월, 원심과 항소심을 거쳐 최종 판결이 내려졌다. 집행유예로 풀려나기는 했지만, 결국 그는 2개월 반에 이르는 기간 동안 구치소 생활을 해야만 했고, 이로써 2007년 2월부터 2008년 7월까지 1년 6개월에 걸친 지리멸렬한 싸움이 끝을 맺었다.

대질신문 중간에 잠시 쉬던 사이 울먹거리던 내게 경찰서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사주고 손수 타신 커피를 건네주며 다 잘 될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큰 힘을 실어준 수사관, 갑작스런 소환 요구에 바쁜 일정을 빼기가 여의치 않아 곤혹스러워하던 나를 일부러 한가한 주말에 불러내어 조사하고, 법원으로 사건이 넘어간 후에 벌어질 상황에 대한 주의사항을 세심히 일러준 검사, 내가 겪었던 일을 당사자인 나보다 더 아파하며 나를 버틸 수 있게 한 인권위의 조사관과 상담소의 활동가. 진부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이분들이 아니었다면 결코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 나는 생각한다. 내가 겪은 일이 미미한 고통의 길이었겠지만 그런 작은 상처를 보듬어주던 수많은 이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으니, 이제는 그보다 더 큰 것을 되돌려야 한다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지렛대가 되어준 분들과 그 아팠던 시간 덕택에 나는 긍정적인 변화에 대한 희망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곧 나는 새로운 발걸음을 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