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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모르는 우리들의 진실- 성폭력 생존자가 진정 바라는 것은
  • △△자동차 △△지회 언어성폭력 사건 생존자 지현
기획특집 _ 운동사회 내 성폭력

그들은 모르는 우리들의 진실
- 성폭력 생존자가 진정 바라는 것은

⊙ △△자동차 △△지회 언어성폭력 사건 생존자 지현

성폭력 사건 처리 ‘매뉴얼’ 속에 없는 것

노동운동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어떻게 처리할까? 먼저 대책위나 진상조사단이 꾸려져 진상파악에 나선다. 진상조사가 끝나면 가해자와 조직에 권고사항이 결정되고 가해자는 징계를 받거나 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한다. 권고사항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을 경우 가해자와 조직에 대한 압박, 선전 활동 등이 진행된다.

이러한 도식적인 사건 처리 절차, 소위 ‘매뉴얼’ 속에 피해자 치유에 대한 고민은 빠져있다. 어느 대책위나 피해자 치유를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로 상정하지만, 사실상 치유는 성폭력상담소나 정신과 등 전문기관에 맡겨진 채로 방치되고, 결국 피해자는 자신의 치유를 위한 다양한 방법을 스스로 모색한다.

가해자와 상급단위 압박, 선전전, 피켓팅, 토론회 등은 그 내용이 성폭력이라서 조심스럽긴 하지만 사실 그동안 해온 활동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기에 어렵지 않다. 그러나 피해자 치유는 지금까지 해 보지 않은 낯선 영역이라 감이 잡히지 않는다. 조심스럽게 몇 차례 다가가 보지만 ‘피해자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서’ 고민하다가 결국 피해자에게 위로나 격려의 말 한마디 제대로 전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또 다른 투쟁 일정에 밀려 잊어버리고 결국 피해자에게 미안함만 남는다.

운동사회 내 반성폭력 운동 역사에서 피해자 치유에 관한 고민과 노하우는 축적된 게 별로 없다. 사건 발생 2년이 지나고 6개월 동안 상담을 받아온 지금, 내가 내린 결론은 운동판 내부에는 치유의 언어, 치유의 프로그램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대로 포기하는 것이 맞는가. 피해자 치유는 주변 동지들이나 조직이 아닌 전문가만이 할 수 있는 것인가. 정녕, 피해자를 이대로 떠나보낼 것인가.

토론하며 학습하며, 그러나 변하지 않는 건 감수성

성폭력 사건이 안건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하면 여성주의 학습을 한다고 여성학 책을 읽고, 월례토론을 한다고 ‘우리 결혼했어요’를 주제로, 성매매를 주제로 토론을 한다. 근데 그 토론 열심히 하는 거 나 치유되는 거랑 별로 상관없거든요? 의식은 변해 가는지 몰라도, 언어와 몸짓은 변하지 않는 사람들. 토론 한 번 덜 해도 좋으니까 힘내라고 문자 한 통 보내고, 전화해서 안부를 물어보고, 편지 한 통을 써 주는 게 나한테 훨씬 큰 힘이 될 텐데……. 함께 막걸리 한 잔 하자던 동지는 왜 내가 휴직을 해도 연락이 없을까? 동지에게는 그 약속이 그렇게 우스운 것이었나.

처음 상담소에 와서 상담 선생님을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그저 내 말을 들어주고 고개 끄덕여 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이 참 고맙고 따뜻해서 눈물이 났다. 왜 나는 주변 동지들에게서는 그런 따뜻함을 느끼지 못했을까? 슬프다. 투쟁가에 나오는 ‘동지’, ‘동지애’는 현실에서는 없는 걸까?

한 운동단체에서 피해자가 함께 상근하는 동지들에게 지지의 글을 써달라고 사무실에 종이를 붙여놓았는데, 3일이 지나도록 아무도 글을 쓰지 않았고 2주가 되어서야 거의 썼고 마지막까지 쓰지 않은 동지도 있었다고 한다. 그걸 바라보고 있는 피해자의 마음은 얼마나 타들어갔을까. 민주노총 김**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지모임 카페에 현재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가입했지만, 피해자에게 지지의 글을 쓰는 게시판에는 회원 수만큼의 활발한 글쓰기는 되지 않고, 글 역시 대부분 여성동지들의 것이다.

피해자가 원하는 것을 헤아리지 못하는 운동에서 피해자는 점점 멀어지고, 그렇게 피해자가 이탈해 가는 사이 남성 활동가들은 여성주의 토론을 하면서 더 훌륭한(?) 활동가로 거듭난다. 그래, 감정노동과 돌봄노동은 노동운동판 남성들에게는 익숙한 조직화 방식이 아니었지. 또한 우리는 개인의 아픔을 조직적으로 풀기보다는 당연히 개인이 짊어져야 하는 문화에 길들여지지 않았던가.

빡센 처벌보다는 자기성찰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가해자 징계가 미약하면 분노하면서 주먹을 부르르 떤다. 언어성폭력 사건 발생 2년 만에 금속노조 징계위원회는 최근 가해자들에게 ‘경고’로 징계했다. 그런데 가해자에게 높은 징계가 나왔었다면 내 속이 후련했을까? 최근 실형 3년을 받은 민주노총 김**이 만약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면 피해자의 모든 아픔이 한꺼번에 날아갔을까? 피해자가 진정 원하는 것이 빡센 처벌이라고 생각하는가?

민주노총 관련자들은 이번 김** 성폭력 사건 처리 과정에서 ‘사건에 대해 언급하거나 토론하는 것’ 자체를 2차 가해로 규정하며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사건 발생도 그렇지만 2차 가해에 대한 이런 저열한 인식은 그동안의 수많은 피해생존자들과 여성동지들의 노력을 무색하게 만든다. 2차 가해가 무엇인지 한 번이라도 피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봤는가? 모두 입에 미제 자크를 채우고 징계와 규율 뒤로 자신들의 속마음을 숨기는 것이 피해자가 바라는 것일까? 김** 성폭력 사건은 그동안 노동운동 진영이 해온 형식적인 사건 ‘처리’와 ‘규율’만으로는 결코 성평등한 문화를 정착시킬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조직 문화를 혁신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문화는 어떻게 바뀌는가? 이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었는가? 조직 문화의 혁신은 개인의 자기성찰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평가’에는 익숙하지만 ‘성찰’은 별로 해 본 적이 없다. 선전하고 선동하고 교육하는 글은 수두룩하게 써봤지만 성찰하는 글쓰기는 해 보지 않았다. 나는 가장 가까웠던 남성 동지 3명에게 <오빠는 필요없다>와 <남자의 탄생>을 읽고 자신의 삶과 운동을 여성주의적으로 성찰하는 글을 써 달라고 했다. 고맙게도 2명의 동지가 글을 써 주었고, 쓰지 않은 1명의 동지 때문에 울고불고 난리를 치다가 그 동지에게는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하는 ‘자서전 쓰기’ 참가를 제안했다.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남성 동지들이 자기성찰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내가 했던 운동이 바닥은 아니었구나 싶어 숨통이 조금 트였다. 가족 내에서 자신의 위치, 연애, 운동을 어떻게 시작했는지, 조직 내에서 또 대공장 현장에서 여성동지들을 대했던 자신의 태도에 대해 꾹꾹 눌러 써내려간 글. 그냥 형식적인 반성문, 자비서가 아닌 자기 언어로 쓴 자기 성찰. 나에게는 그러한 자기 성찰의 노력이 가해자 징계보다, 어떤 빡센 규율보다 소중했다. 성찰하며 변화하는 모습 자체도 보기 좋았고, 나에게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힘이 있음을 확인하면서 조금씩 자존감이 회복된 것 같다.

"고소하지 마십시오" 등 문구가 적힌 피해자 지지모임 대자보

피해자가 뿌린 씨앗이 싹을 틔울 수 있도록

피해자의 감정은 상승과 추락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피해자가 피해의식을 갖게 되는 것은 너무도 정당하다.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피해를 경험했다는 이유로 존재 기반을 잃어버린 사람이 어떻게 피해의식을 갖지 않을 수 있는가. 자신이 몸담았던 운동에 대한 회의와 혼란, 동지들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에 몸부림친다. 그렇게 분노하는 것조차 정당한 것인지 검열하면서 죄의식에 시달린다. 차라리 그냥 죽어버리는 것이 가장 확실한 복수일 것 같은 때도 있었다. 피해자의 분노와 배신감이 큰 만큼, 그 뒷면에는 운동에 대한 열정과 조직에 대한 사랑 또한 크다는 것을 동지들은 헤아릴 수 있을까. 동지들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만큼이나 기대와 신뢰 또한 컸음을 동지들은 알까. 지겹게도 떨쳐지지 않는 피해의식.

그러나 피해자는 피해의식에만 사로잡혀 있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피해자가 자신의 경험을 사건화할 때 피해자는 이미 온 몸으로 운동에 메시지를 던지는 투사이다. 피해자의 미친년같은 울부짖음은 어떤 훌륭한 여성학 책보다 동지들의 가슴에 큰 울림을 남기고, 피해자가 매일 밤 흘리는 맑은 눈물은 운동을 정화시킨다.

"2차 가해자들의 조직적 은폐 조장 행위를 인정하라" 대자보

사건 발생 이후, 피해자가 보는 운동과 조직은 이미 예전의 그것이 아니다. 현재 상태는 물론 지난 운동의 역사까지 피해자는 재평가하게 된다. 피해경험을 통해 알아차린 진실을 통해 그녀는 누구보다도 조직의 썩은 부위에 대해 날카로운 메스를 댈 수 있고 건강하고 선진적인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피해자는 새로운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다. 그러나 피해자가 뿌린 씨앗이 싹트고 꽃 피우도록 물과 거름을 주는 것은 동지들의 몫이다. 피해자가 가진 분노의 에너지가 자기 파괴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은 동지들에게 달려있다. 어떻게?

피해자가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왜 분연히 떨쳐 일어나지 않느냐고 피해자를 종용하지 말고 그럴 수밖에 없는 피해자의 상태를 이해해야 한다. 피해자가 울부짖을 수 있도록,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피해자가 이야기할 때는 들어주고 담아두어야 한다. 그리고 피해자 앞에서 무기력하게 고개만 떨구고 있지 말고(그게 제일 싫다), 피해자의 언어를 이해하도록 노력하고 감정이입하고 적극적으로 자기성찰을 해야 한다. 얼마나 잘하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노력하는가가 피해자에게 힘을 준다. 지금까지 노동운동에서 별로 필요로 하지 않았던 이러한 덕목들을 우리는 시도하고 훈련해야 한다. 세심하게 피해자의 감정의 결을 읽고 보살피는 데 쏟는 노력은 결코 무가치한 노동이 아니다. 피해자 대리인 역할에 최선을 다한 동지들은 일상적인 정치활동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을 얻고 성숙한다. 지금 당장 노동운동 판에서는 이런 능력이 인정받을 수 없어 시간이 아까울지 모른다. 하지만 혁명이 일어나면 이런 감수성이 뚝딱 만들어질까? 대안 사회로 가는 길은 적들에 대한 무자비함만큼이나 동지와의 친밀하고 평등한 관계와 감수성을 필요로 하지 않을까?

치유는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필요한 것

치유는 피해자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사실, 치유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쉽게 변하지 않는 세상에 맞서 고군분투해 온 나에게도, 조직에 헌신하느라 자신의 몸과 마음을 돌볼 겨를이 없었던 당신에게도 치유는 필요하다.

또 자기성찰은 단지 여성동지들이 운동판에서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필요한 것만은 아니다. 자기 성찰이 수반되지 않는 운동은 진정 행복할 수 없기에, 궁극적으로는 나와 나의 운동을 위한 자기성찰이 되어야 한다. 나는 왜 운동을 시작했는가? 권력에 탐이 나서 혹은 한몫 챙겨서 편하게 살아보려고 운동을 시작한 사람은 없다. 차별에 대한 분노로부터,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깊은 애정과 평등한 세상에 대한 갈망으로 우리는 운동을 시작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체제 속에서 체제와 싸우지만 내가 속한 조직과 공동체에서 체제와는 다른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권력에 맞서고자 운동을 시작한 내가 또 다른 권력으로 내 옆의 동지를, 가족을 억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수십 년 동안 다른 사람들이 떨어져 나갈 때에도 신념을 지켜온 동지라면,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혹시 곪고 썩은 부위를 직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래 살아남은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자기성찰이 없는 운동, 또 다른 누군가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운동은 행복할 수 없다. 행복하더라도 그건 잠깐의 행복, 반쪽짜리 행복일 뿐이다.

완전한 치유도, 치유의 종착점도 없다. 다만 피해자가 피해경험에 휘둘리면서 자신을 향해 휘두르던 칼을 내려놓을 때, 사건 당시 겪은 무력함에 남은 인생을 종속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할 때,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이 자신에 대한 성찰을 시작하고 지금 용기를 내어 피해자에게 손 내밀 때, 우리 운동은 한 걸음 전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