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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적인 행정전산화 시책, 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를까?
  • 소장 이윤상
쟁점과 입장

일방적인 행정전산화 시책,
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를까?

⊙ 소장 이윤상

집에 강도가 들이닥쳐 재산상의 피해를 입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당장 신고하지 않을까? 물론 애써 신고했는데 강도를 잡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염려도 생기고 보복의 두려움도 따를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문을 제대로 잠그지 않은 거 아니냐?”, “강도가 집안으로 들어오도록 유인한 거 아니냐?”, “아는 사이였다던데 뭔가 다른 목적이 있는 거 아니냐?”라며 말도 안 되는 의심과 비난을 할까봐 신고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며 괴로운 시간을 보낼 이유는 없을 것이다.

비밀보장이 필요한 이유

18년 전, ‘한국성폭력상담소’ 간판을 걸고 반성폭력운동을 시작했던 것은 바로 이런 문제 때문이었다. 피해를 입으면 바로 경찰서를 찾아 신고할 수 있고, 합리적인 절차에 따라 가해자가 처벌받을 수 있는 사회라면, 굳이 ‘상담소’를 열고 따로 피해생존자를 만나고, 의사도 경찰도 아닌 활동가들이 의료적·법적 과정을 함께 지원할 이유는 애당초 없었을 것이다.

사회의 시선과 비난이 두려워 그 어디서도 말하기 어려웠던 이야기를 풀어놓을 곳이 여기밖에 없었기에 ‘상담소’는 필요했다. 함께 사는 가족이 가해자여서 집조차 그녀에게 안전한 공간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주거공간(쉼터)이 필요했다. 심신의 안전을 보장받고, 의심과 비난에서 자유로우며, 주변인과 사회의 곳곳에서 느껴지는 불편함과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는 공간. 이런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우리는 ‘비밀보장’이라는 기본적인 원칙을 세웠고, 지금까지 지켜왔다.

효율성과 인권감수성

사회복지시설정보시스템은 보건복지가족부 소관으로 사회복지기관의 회계, 세무, 인사, 후원금, 서비스 이력 등을 관리하는 온라인 기반 전산 프로그램이다. 우리 정부가 국민에게 제공하는 행정 서비스의 질을 향상시키고, 정부 행정 업무의 효율성과 신뢰성을 크게 증진시키고자 전자정부화 시책이 야심차게 추진되고 있고, 사회복지시설정보시스템 또한 이런 국가 시책의 일환으로 마련된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국민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용도는 아니며, 주로 공무원들의 행정 효율성과 투명성 확보를 위해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전산화를 통해 행정업무가 보다 편리해지는 것은, 여러 가지 정보를 한 곳에 집적함으로써 정보의 관리·가공 및 이용이 훨씬 손쉬워지기 때문이다.

성폭력 피해자 정보 또한 한 곳에 모아놓고 쉼터에 입소한 사람이 누구인지, 기존 수급자인지 아닌지, 어떤 의료 서비스를 받았는지, 피해자 치료비 지원을 받았는지 등을 언제든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면, 아마도 정부가 너무나도 걱정하고 있는 생계비나 치료비 이중수급의 문제는 당장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효율이나 편리만이 세상 모든 일을 처리하는 최우선 기준은 아니다. 비밀보장이 중요해서 경찰이 아니라 상담소를 찾은 이들, 가해자의 눈을 피해 쉼터로 몸을 피한 이들의 정보가 반영구적으로 남고, 그 정보를 무제한적으로 복제하거나 유통할 수 있으며, 유출되기도 쉬운 전자 방식으로 집적되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개인정보를 함부로 공유하거나 전송·복제하기 어렵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폐기하는 문서 방식으로 기록하는 것이 맞을까?

여성폭력피해자지원단체의 국가복지정보시스템 사용 문제점과 대안 검토를 위한 토론회

행정효율화를 통해 시간을 아끼고 서비스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영역이 있다면, 정보를 수집하고 다루는 데 있어서 보다 높은 인권감수성이 필요한 영역이 있다. 모든 것을 무조건 전산화함으로써 행정업무를 효율화하겠다는 편의주의적 발상에 분노를 넘어 등골이 오싹해진다.

재정 투명성을 보장한다는 것 또한 사회복지시설정보시스템을 사용해야 하는 주요한 이유가 되고 있다. 성폭력상담소 및 쉼터 일부는 1년에 5,900여만 원의 운영비를 지원받고 있으며, 쉼터 생활인들은 시설수급자로서 의료비·생계비 등을 지원을 받는다. 이렇게 투입된 국가 재정을 목적에 맞게 사용한 것을 확인하기 위해 정부는 1년에 몇 차례씩 현장 지도점검을 실시하여, 회계서류·운영실적·현장상황 등을 포괄적으로 점검한다. 전산 프로그램에 깔끔하게 입력한 데이터여야 투명성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되려 2~3년 단위로 담당업무가 변경되고 복지나 여성폭력피해에 대한 별도의 교육도 받지 않는 공무원이 민감한 정보를 전산 관리할 수 있는 권한만 갖게 될 때, 정보 유출이나 횡령과 같은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다는 것은 이미 경험하여 알고 있는 사실이다.

쉼터 생활인의 이중수급 문제 또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전국에 성폭력·가정폭력·성매매 등 여성폭력 관련 쉼터는 150여 곳이 있으며, 한 쉼터에 입소할 수 있는 인원이 10여명 안팎이다. 이 입소인 수가 너무 많아 문서로는 이중수급자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인가? 그래서 갖은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민감한 개인정보를 전자적 방식으로 수집하는 것이 정말 불가피한 조치란 말인가?

아직도 처음부터

18년 전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처음 문을 열고 활동을 시작했을 때의 비장함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물론 그동안 성폭력특별법도 만들었고, 국가는 예산을 들여 부분적으로나마 의료적·법적 지원을 하고 있으며 1366, 원스톱지원센터, 해바라기아동센터와 같은 공공 서비스도 마련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신고율은 저조하기 짝이 없고,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의심을 지우지 못하는 수사관과 법조인들의 태도 때문에 피해자들의 고통은 끊이질 않는다. 용기 내어 피해를 얘기하면서 ‘그런 사람은 더 이상 주요 직책을 맡고 있으면 안 되지 않겠냐’고 하면, ‘구만리 같은 사람의 앞길을 막는다’며, ‘너는 왜 행동을 조심하지 않았냐’며, ‘너 때문에 조직에 분란을 만들었다’며 난리다. 결국 그 조직에서 퇴직, 휴직, 휴학, 이사, 유학 등으로 도망가고 피해야 하는 사람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다.

4대강 사업에 허비되는 예산은 22조이고, 향후 5년 간 줄여줄 부자들의 세금은 96조라고 한다. 이런 어마어마한 스케일 앞에서, 여성폭력피해자 지원을 위한 예산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은 해보지도 못했다. 우리는 그저 전산시스템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언제 국가 운영비 지급이 중단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를 견디며, 우리가 이 운동을 왜 시작했는지, 이 일을 위해서는 기본적인 인권감수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래서 전산화 시책이 일률적으로 적용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하는 아주 기초적인 이야기를 계속 하고 있을 뿐이다. 18년의 상담소 역사가 뼈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