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분리된 몸, 욕망 그리고 거리
움직이는 몸 / 변형하는 몸
⊙ 페미니스트 가수/성문화운동 자문위원 지현
확신했던 것들의 균열과 해체
데뷔 초부터 마스터베이션을 불러온 나는, 여자들의 자위에 대해 오랜 시간 생각했습니다.
내 몸이 곧 놀이 공간이자, 늘 탐구하던 연구대상이었으니, 어릴 적부터 내 몸에 대해, 몸이 원하는 것에 대해, 즐거움에 대해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나는 자위도 쉽게 할 수 있었고, 백과사전 탐독을 통해 몸 곳곳의 구조와 기능, 역할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습니다. 내 몸이 갖고 있는 원초적인 욕망, 본질적인 욕망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잘 존중하고 있다고 자신했습니다. 또한 내 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비롯해,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좋아하는 음악은 무엇인지, 경우에 따른 나의 입장과 견해는 무엇인지 비교적 명확하게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들은 온전히 나의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푸코나 버틀러와 같이, 성, 몸에 대해 어려운 얘기들을 풀어놓는 이론가들을 알게 되면서, 그들이 내가 알고 있던 몸과 성에 대한 이분법적인 사고에 균열을 내기 시작하면서 나는 점점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자연적인 범주에 너무도 확실하게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몸, 근육, 몸의 형태 등이 시선의 권력에 의해 구성되고 훈육된다고 주장한 프랑스의 학자 미셸 푸코, 태어날 때부터 주어져 확고하게 나뉘어져 변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겼던 생물학적 성 역시 "구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페미니스트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의 주장은 그 동안 잘 알고 있다고 자신했던 나의 몸의 욕망, 성적 욕망, 여성으로서 찾고 권리를 주장해야 하는 갖가지 욕망들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혼돈은 나의 욕망은 구성되고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 는 생각을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현재의 나의 몸이 만들어지기까지 나는 어떤 여정을 거쳤으며, 거기에는 나의 어떤 욕망이 작용하였으며, 그리고 몸의 변화와 욕망의 변화는 서로 관계가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습니다.
# 첫 번째 장면. 보아가 되기를 원하는 대머리 가수, 섹시댄스 훈련을 견디지 못하다.
2002년 즈음 어느 날. 압구정동 유명 재즈댄스 학원.
음반을 내고 한참 활동을 열심히 하던 시절, 나는 여성문화운동계의 보아가 되겠다며 재즈댄스를 배우러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재즈댄스 강습은 한 시간 정도 진행되었는데, 30분은 근력운동과 스트레칭을, 나머지 30분은 안무를 익히고 재즈댄스를 훈련하는 구성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근력운동과 스트레칭은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는데, 진행하는 강사는 날씬한 배와 허벅지, 탄력 있는 엉덩이를 언급하면서 고통을 참고 견디기를 요구하였습니다. 재즈댄스 학원의 수강생은 90% 이상이 여성이었고, 강사 역시 여성이었습니다. 강좌의 목적은 공연을 하는 배우들을 준비시키거나, 몸매 가꾸기를 위해 운동하는 20-30대 여성들을 훈련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는 배우 지망생이나 모델 지망생, 현재 배우나 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왔습니다. 수강생들은 거의 다들 긴 생머리에, 배꼽이 드러나는 상의에, 딱 붙는 스판 재질의 바지를 입고 운동을 했고, 나처럼 빡빡 밀어버린 대머리에 헐렁한 운동복을 입고 강좌를 듣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나는 즐겁게 춤을 추고 싶었지만, 과정은 혹독했고, 안무는 어려워 따라가기 힘들었고, 멋진 몸매와 잘 빠진 근육, 길어 보이는 다리 타령을 하는 강사는 지겨웠습니다. 내가 끊임없이 느껴야 하는 이질감도 견딜 수 없었습니다. 탈의실에서 느껴야 하는 대머리를 불편해하는 시선도 견딜 수 없었습니다.
나는 재즈댄스 강좌를 통해 나의 신체를 역동적이며, 자유로운 형태로 변형하고 싶었으나, 강좌와 공간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은 여성적인 섹시함과 태도, 그리고 “정상성”. 나는 이곳과 맞지 않아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 두 번째 장면. 몸을 치유하러 갔다가, 마음을 치유하다.
2002년 즈음 어느 날. 약수동 요가 강습소.
재즈 댄스를 그만 두고 허리가 아픈 친구가 함께 강습을 듣기를 원해, 친구 따라 요가를 시작했습니다. 나에게 요가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때까지 내가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재즈댄스, 헬스 등의 격렬하면서 칼로리 소모가 높고, 신체의 제어와 훈육, 단련을 목적으로 하는 움직임이었습니다.
몇 달간의 요가 강습을 받고, 요가가 의외로 참 마음에 들었던 것은, 몸뿐 아니라, 마음을 살피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강사가 수강생들에게 가장 처음 했던 이야기는 자신의 심장에 무리가 되지 않는 수준에서 움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난이도가 제법 높은 동작을 하더라도 꼭 송장자세 - 팔과 다리는 적당히 벌리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휴식하는 자세 - 를 취하도록 하였고, 뭐든 억지로 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기를 쓰고 다리를 찢고, 근육을 훈련하는 재즈댄스와는 다른 방식이었고, 속도를 내며 스스로와 경쟁하듯 앞만 보고 달리는 러닝머신과도 달랐습니다. 요가는 본격적인 동작을 시작하기 전, 호흡과 명상의 시간을 가집니다. 그러면서 가장 작은, 몸에서 가장 먼 부분, 손가락, 발가락 관절과 근육을 움직이고 느낍니다. 요가는 다른 이들이 보기 좋은 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몸과 꼼꼼하게 대화하고, 무심하게 대했던 신체의 부분에 관심을 기울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나는 요가를 통해 몸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몸은 더 이상 나에게 제어하고, 훈육해야 하는 대상이 아닌, 관심을 기울이고 대화해야 하는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 세 번째 장면. 어슬렁거리며 게으르게 걷기, 몸을 열다.
2008년 3월 어느 날. 한강 둔치.
어렸을 적에는 잘 걸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걷는 일은 일상을 벗어난 일이 되었습니다. 등산이나 가야 걷고, 쇼핑을 할 때나 걷고, 차가 들어갈 수 없으면 그제야 걷고. 차가 생기고, 웬만한 거리는 걷는 대신 차를 이용해 이동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싫어해 거리를 걷는 것은 두려운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나의 걷기 능력은 점점 퇴화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걷는 즐거움을 잊었습니다. 오래된 차를 팔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서야 나는 대중교통에 적응하고, 보행에 적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작년 봄 한강둔치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하고, 일터에 걸어 다니기를 시작하면서, 동네를 배회하던 때의 즐거움을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집에 가는 길, 시장을 지나가며 이것저것 다 살피고, 10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한 시간, 두 시간을 걸려 집에 오던 것처럼, 최대한 느리게 걸었습니다. 길바닥을 기어가는 벌레를 밟지 않기 위해, 바닥을 꼼꼼히 살피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개미와 지렁이의 속도로 걸었습니다. 많이 걸으면 당연히 몸이 달라집니다. 대중교통 안에서 스트레스 받던 몸이 아닌, 자동차 안에서 누군가 나의 사적인 영역 안으로 들어올까 전전긍긍하는 그런 몸이 아닌, 바람이 지나고, 햇빛이 지나고, 다른 걷는 사람들의 시선과 호기심이 지나는, 그런 열린 몸이 되는 것입니다. 몸을 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걷는 행위는 그러한 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낯선 사람과 말을 하고, 대화를 나누고, 소통하고, 경계를 허무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 네 번째 장면. 허파에서 아가미로, 외계에 적응하다.
2009년 7월. 용산 수영장.
사람은 허파로 숨을 쉬니 물에서는 잘 지낼 수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물속은 미지의 대상, 알 수 없기 때문에 두려운, 물은 나에게 그런 곳이었습니다.
최근에 다시 수영을 시작했을 때, 나에게는 “평형(개구리헤엄)주의자”인 한계를 벗어나, 자유형과 배영을 잘 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중학생 때까지 수영을 배웠으면서도 자유형과 배영은 평형 실력에 전혀 못 미쳤습니다. 매번 물을 먹고, 멀리 가지도 못했습니다. 늘 고개를 내놓고 물살을 가르는 평형만을 고집했습니다. 수영강습이 시작되던 첫 날, 오디션을 보듯이 자유형, 배영, 평형으로 수영장을 몇 번이고 오가다 몸살이 났습니다. 자유형, 배영은 잘 못하니, 평형을 주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목이 탈이 났습니다. 평형이 목 통증에 좋지 않다고 하여 제일 잘하는 평형을 당분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수영을 하며 내 몸이 보이는 반응은 나에게는 어떤 상징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익숙해진 땅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물의 세상에서는 적응하지 못하고 몸살이 나고야 마는, 익숙한 태도로만 외계에서 생존하려는 나에게 새로운 도전을 요구하는 몸. 나의 몸살은 나의 의식과 무의식, 나의 머리와 몸이 불일치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몸 / 욕망 / 만들어지는 것들
욕망 찾기를 처음 기획했을 당시, 함께 기획하던 우리의 목표는 분명했습니다.
여자들 몸의 욕망을 찾고, 증폭시키자. 그 첫 단추를 『몸의 욕망 찾기/자위 워크숍』을 통해 끼워보자! 그런 과정을 통해 여자들이 몸에 대해, 성에 대해 갖고 있는 두려움과 낯섦을 없애보자! 그래서 늘 성폭력의 예비 피해자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힘 있는 마음과 몸을 가진 능동적이고, 유쾌한 여자들이 되자! 는 것이었습니다.
프로그램을 시작하고, 참여자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면서, 욕망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자신의 "사회적 욕망"을 찾고, 그것을 현실화하고 싶어서, 어떤 이는 자신의 "성적 욕망"을 찾고 증폭시키고 싶어서 우리 프로그램을 찾아왔지요. 이런 참가자들을 만나면서 나의 몸의 욕망과 나의 욕망은 어떻게 구분되고, 어떻게 연결되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욕망과 몸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몸의 변형을 욕망해 움직임을 시작하기도 하고, 몸의 변형이 욕망을 끌어오기도 하고, 의도 없는 움직임이 몸의 변형, 욕망을 재구성하기도 합니다. 나의 의지와 별개로 몸은 움직이기도 하며, 변형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당황하는 순간입니다. 몸을 의지로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살아있는” 몸을 만날 때, 우리는 당황하고, 몸을 두려워하고, 몸을 멀리하고, 결국은 몸을 혐오하게 됩니다. 그럴 땐 조금만 속도를 늦추고, 몸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는 요가를 하거나, 그저 걷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합니다. 혹은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지 않고, 물에 그저 자신을 띄워놓고 여유 있게 송장자세를 취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그런 시간을 통해서 나와 분리된 듯한 몸과의 거리를 좁힐 때 우리는 몸이 주는 두려움과 혐오감을 없앨 수도 있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