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의 진술을 ‘듣게’한다는 것
전국성폭력상담소·피해자보호시설협의회 시민감시단 간사 예지
진술이란 발화자 스스로 자기의 경험을 기억해내고, 해석하고, 말하는 서사적 작업이다. 법정처럼 서로 상이한 각자의 사실이 경합하는 곳에서는, 진술은 하나의 사실을 확정하기 위해, 혹은 개인적 의미로서의 진실을 밝히는 데 있어서도 상당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성폭력 사건의 경우에는 그 특성상 피해자의 진술이 유일한 증거인 경우가 많고, 법은 이러한 진술을 ‘일관성’으로 가늠하며 신빙성을 부여하는 제도이다. 따라서 성폭력 피해자의 진술에 신빙성을 부여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언제나 사건의 범죄 사실의 확정 유무에 대한 판단과 맞닿아 있다. 즉, 재판부가 일관성을 문제 삼아 피해자의 진술을 ‘신빙성 없음’으로 판단하면, 성폭력은 ‘없었던’ 일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지금까지 많은 판결이 성폭력 피해자의 ‘진술이 일관되지 못하다’ 또는 ‘구체적인 정황에 대한 진술이 전후 모순된다’는 점을 들어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성폭력과 그 피해자의 특성을 고려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지난 ‘2009년 성폭력 수사·재판상의 여성인권보장 디딤돌·걸림돌’을 선정하는 작업을 하면서도 ‘진술 일관성’에 대한 법원의 결정이 눈에 띄었다. 비슷한 사건 정황을 가진 두 개의 사례에서, ‘진술일관성’이라는 것은 하나의 객관적 ‘사실이 아니’며 (누군가의) ‘판단’이라는 점을 더욱 절실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각기 디딤돌, 걸림돌로 선정된 다음 판례들은, 지적장애인 성추행 사건으로 여타의 증거가 부족하여 진술이 관건이 되는 사건들이다. 각 재판부는 피해자의 진술에 대하여 비슷하게 서술하면서도, 상이한 법적판단에 의해 결론이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증거에 의하여 나타나는 다음과 같은 사정들, 즉 ①피해자는 경찰 수사과정부터 당심에 이르기까지 피고인으로부터 추행을 당하였다고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는바, 이 사건 범행 이전에는 피고인과의 사이가 원만하였고, 달리 피해자가 피고인을 모함하거나 피고인을 처벌받게 하기 위하여 허위진술을 할 이유가 없는 점. ②피해자가 주장하는 범행시간과 장소가 고소장 제출 당시, 경찰 및 검찰 조사과정, 원심 법정에 이르기까지 어느 정도의 차이를 보이고는 있으나, 고소 이후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으면서 피해자가 이를 기억해 내는 과정에서 다소 혼동했거나 착오로 잘못 진술하였을 가능성이 높고 ……(중략)…… 단지 피해자가 당시 상황을 다소 혼동하거나 또는 과장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이유만으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쉽게 배척할 수는 없는 점……’
이 판결은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를 진술함에 있어 전후 다른 진술을 하고 있음에도, 피해 당사자가 추행을 당하였다고 일관되게 진술하는 점을 근거로 성추행 범죄의 사실을 확정하고 피고인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그런가 하면 아래의 판결은 위처럼 무고의 가능성이 낮다고 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판시하고 있다.
‘⑨원심은 ……(중략)…… 말을 기계적으로 반복할 뿐이고, 그 주변사실 등은 별로 인지 또는 기억하지 못하는 반면, 일정한 부분에서는 일반인과 별로 다르지 아니한 인지능력을 보이는 점을 근거로 위와 같은 피해자의 진술을 그대로 믿기는 심히 어렵다고 판단하였으나, 피해자는 정신지체 장애인으로서 낮은 지적수준과 인지력으로 인해 시간이나 장소 개념이 희박하고, 언어구사력의 부족으로 자신의 의사를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하며, 때로는 강한 집착력과 고집이 있음에도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상황에서는 스스로 위축되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종종 상대의 질문 의도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등의 장애특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함에 있어서는 일반인과 동일한 기준을 적용할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특수성을 충분히 고려하여야 할 것인 점……(중략)…… 종합하면, 피해자의 진술은 그 신빙성을 쉽사리 배척할 수 없기에……’
즉, 이 판결에서는 피해자가 대부분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정황(입을 막았는지 아닌지)에 대한 기억이 차이가 난다는 점’이 진술이 일관되지 못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결과적으로 본 사건에서 피고인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위 판례들의 논리를 따져보면 이렇다.
= 진술 일관성 있음 (=범죄사실 유)
두 번째 판결 : 대부분일관 + ‘구체적 정황의 차이’
= 진술 일관성 없음 (=범죄사실 무)
이렇듯 범죄사실의 유무가 판단되는 중요한 문제에서 방점을 어디에 찍느냐에 따라 법적 결정이 확연히 달라지는 이유는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신지체가 있는 성추행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함에 있어서는, 정신지체 장애인의 경우 질문자에 의한 피암시성이 강하고, 상상과 현실을 혼동하거나 기억내용의 출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는 점 등을 고려하여, 그 진술이 사건 발생시로부터 얼마나 지난 후에 이루어진 것인지, 사건 발생 후 그러한 진술이 이루어지기까지의 과정에서 최초로 피해 사실을 청취한 보호자나 수사관들이 편파적인 예단을 가지고 피해자에게 사실이 아닌 정보를 주거나 반복적인 신문 등을 통하여 특정한 답변을 유도하는 등으로 피해자의 기억에 변형을 가져 올 여지는 없었는지, 그 진술 당시 질문자에 의하여 오도될 수 있는 암시적인 질문이 반복된 것은 아닌지, 면담자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은 피해자 자신의 진술이 이루어진 것인지 등을 살펴보아야 하며, 또한 진술내용에 있어서도 일관성이 있고 명확한지, 세부내용의 묘사가 풍부한지, 사건·사물·가해자에 대한 특징적인 부분에 관한 묘사가 있는지, 정형화된 사건 이상의 정보를 포함하고 있는지 등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야……’
이는 첫 번째 판결의 전술 부분이다. 위 재판부는 피해자의 진술일관성을 판단함에 있어 지적장애인인 피해자의 특성이 잘 고려되어야 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때문에 진술의 일부가 전후 모순되는 사실은, 두 번째 판결과는 달리 피해자의 특성에 의해 여과되어 일관성 있는 진술이 되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전후 진술이 모순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법적 안정성을 목적으로 객관성을 지향하기에 ‘분명’한 포섭과 배제의 경계를 원하는 법제도의 특성상, 이는 기술적으로 탈락된다.)
‘진술’이란 발화자의 기억과 해석의 과정이지만, 동시에 그 순간의 청자의 시각과 해석이 섞여드는 과정이 포함되는 작업이다. 마찬가지로 성폭력 사건에서의 ‘진술 일관성’의 문제란 법적 사실을 확정짓는 데 있어서, ‘피해자가 기억하고, 해석하며, 말하는 것’을 재판부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살펴본 바처럼 ‘진술이 일관되다, 혹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성폭력 사건에서 ‘관건’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성폭력을 어디까지나 비장애/남성중심적인 언어에 기대어 설명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한계에 있기도 하다. ‘객관적’이라고 믿어지며 좀처럼 의심받지 않는 가부장제적 체계 속에서 피해자의 말은 지금까지 철저히 부인되어 왔기에, 여성의 말이, 경험이, ‘피해’라고 하는 것을 들으라(!)고 외치는 것은 피해자의 진술을 심판대에 놓이게 하는 취약함을 지적 받음에도 불구하고 반성폭력운동의 전략으로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성폭력 사건에 있어서의 객관성은 재판부의 태도에 따라 달라지며, 진술의 일관성과 그에 따른 진실 여부란 양자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느냐에 달린 구성의 문제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양날이다. 피해자의 이야기를 ‘듣게’ 한다는 것. ‘누가’, ‘어떻게’ 이야기하는지에 방점을 찍을 수 있게 만드는 것으로 최소한으로나마 그 이야기를 제대로 들을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앞서 두 판결에서 알 수 있지 않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