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임신중절 예방을 위한
사회협의체 활동을 접어야만 했던 이유
소장 이윤상
정부가 낙태 이슈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
법과 현실의 괴리 등 낙태 이슈에 관심을 가지고 보건복지부는 몇 해 전부터 모자보건법(제14조1) 개정을 위한 연구 발주, 생명포럼 운영 등의 활동을 이어왔다. 내가 낙태 이슈로 보건복지부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연세대학교 의료법윤리학 연구소(이하 연구소)에서 모자보건법 개정을 위한 연구 용역을 한창 수행 중이던 20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전문가회의에 자문을 주는 역할로 참석했다. 이때는 현실적인 모자보건법 개정 방안에 관한 토론이 활발했던 시기다. 2008년 2월에 열린 모자보건법 제14조 개정(안) 마련을 위한 공청회에서 연구소 측은 인공임신중절 사유에 사회적 적응 사유로 인하여 산모가 요청하는 경우를 신설하는 안을 제안한 바 있다2.
정부 태도의 변화 뒤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그러나 2009년도에는 상황이 많이 달라진다. 2009년 2월 보건복지부 전재희 장관은, 한 시사지와의 인터뷰에서 “낙태율을 반으로만 줄여도 출산율 증가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같은 해 11월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가 주최한 ‘제1차 저출산 대응 전략회의’에서 낙태방지 등 태아를 포함한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 사회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저출산 대책의 일부로 발표됐다. 대통령도 참석한 이 날 회의에서 전 장관은 “앞으로는 낙태를 단속할 수밖에 없다”고 입장을 표명했다.
당시 보건복지부에서 운영하는 생명포럼에 참석하고 있었던 나는 복지부가 낙태 이슈에 접근하는 양상이 크게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보건교과 내용이나 법률개정방향에 대한 토론이 갑자기 불법 낙태근절 운동 활성화 방안을 토론하는 자리로 바뀌고 종교계의 발언권도 대폭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2009년 10월~11월은 진오비(진정으로 산부인과를 걱정하는 모임)의 ‘불법 낙태 근절 대국민 성명서’ 발표와 ‘낙태 근절 운동 선포식’이 있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인공임신중절 예방을 위한 사회협의체’를 만들기까지
진오비는 ‘프로라이프 의사회’로 이름을 바꾸고, 올 2월 불법 낙태 시술을 행한 병・의원 3곳을 검찰에 고발했다. 이들의 고발이 여론의 뜨거운 주목을 받고 있던 즈음 보건복지부는 인공임신중절 예방을 위한 사회협의체를 만들겠다며 장관이 참석한 간담회를 비롯, 몇 차례의 실무회의를 거쳐 지난 6월 4일 〈인공임신중절 예방 사회협의체〉 협약식을 개최하였다.
2년 전, 현실적으로 대부분 사회적 사유에 의해 낙태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현상에 주목했던 주무부처의 목소리는 이제 잘 들리지 않는다. ‘어떤 입장에 서있던 누구나 낙태를 줄이자는 것에 동의하지 않느냐’며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은 사회협의체 단체 중 1/3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종교계3, 종교 언론계4, 여기에 교회가 중심이 되고 있는 낙태운동반대연합 등이다.
여성인권운동단체가 사회협의체에서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
낙태를 줄일 수 있다면 그건 마땅히 찬성할 일이고, 여성인권운동을 하는 단체에서 큰 관심을 가지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몇 차례의 사회협의체 실무회의에서 토론을 거친 후에 결국 사회협의체에 함께 할 수 없다고 철수의 뜻을 밝힌 것은 우리 상담소를 포함한 여성인권운동단체들이다5. 무슨 까닭일까?
보건복지부 건강정책국장이 “오늘 협약식을 통해 모처럼 모아진 생명존중 기운을 살려 생명을 귀히 여기는 따뜻한 사회문화를 조성하고……”라며 협의체의 거창한 취지를 밝혔듯, ‘범국민 생명존중 사회분위기 조성’을 기본 취지로 하고 있는 협의체에서 왜 활동을 함께 할 수 없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생명을 존중하겠다는데’ 어떤 이견이 있을 수 있냐는 반문의 눈초리만 따갑게 남아있다. 하지만 나도 반문하고 싶다. ‘출산친화적 사회환경’을 만들어서 누구나 적극적으로 출산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자는 내용이나, 일・가정을 양립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서 양육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강화하자는 내용을 협약서에 포함시키자고 제안했지만, 그건 ‘저출산 대책’이지 ‘낙태예방 대책’이 아니라며 거절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모든 이의 출산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위해서 여성계가 무상보육 및 교육, 무상급식 등 사회 인프라를 확보하려 오랫동안 투쟁해 온 역사가 풍성하다. 상담소를 운영하고, 새로운 공간이 필요한 이들의 쉼터를 만들고, 공동육아를 실험하고, 대안학교를 만들어서 희망을 일구는 일은 ‘사람’에 대한 깊은 존중감에서 시작된 일이다. (태아) 생명존중을 내건 소란스러운 캠페인으로 사람에 대한 존중감이 지켜지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면 나도 당장 그걸 하겠다.
생명존중이 다 말하지 않는 것
실제로 출산과 양육에 대한 사회의 책임을 어떻게 함께 나눌 것인지 깊이 고민하고 실험하며, 정상가족에 대한 뿌리깊은 고정관념 때문에 배제되는 수많은 타자들의 목소리가 이 사회에 들리도록 하기 위한 오랜 노력의 역사. 이 역사야말로 낙태를 줄이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생명 존중’을 골간으로 하는 사회협의체의 취지는 마치 국민들이 생명을 경시해서 지금까지 낙태가 이루어진 양 낙인찍는 결과를 불러온다는 점에서 그릇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 삶에 대한 깊은 존중감에서 비롯된 투쟁과 노력의 역사를 무화한다는 점에서 더욱 나쁘다.
낙태시술 사진이나 태아사진을 협박하듯 전시하며 생명 존중 운운하는 것은 낙태를 선택하는 개인에게 죄책감과 책임을 전가하는 지금까지의 과오를 반복하는 것일 뿐, 어느 누구의 생명도 존중하지 않는 행동이다. 인간의 삶에 대한 공동 책임 의식, 이에서 시작되는 고민, 실험과 시행착오. 이것이야 말로 낙태는 줄어들고, 권리가 지켜지기 위한 사회를 위해 우리가, 사회협의체가 꼭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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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조(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 ① 의사는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되는 경우에만 본인과 배우자(사실상의 혼인관계에 있는 사람을 포함한다. 이하 같다)의 동의를 받아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할 수 있다.
1.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우생학적(優生學的)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2.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3. 강간 또는 준강간(準强姦)에 의하여 임신된 경우
4.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 간에 임신된 경우
5. 임신의 지속이 보건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
② 제1항의 경우에 배우자의 사망・실종・행방불명, 그 밖에 부득이한 사유로 동의를 받을 수 없으면 본인의 동의만으로 그 수술을 할 수 있다.
③ 제1항의 경우 본인이나 배우자가 심신장애로 의사표시를 할 수 없을 때에는 그 친권자나 후견인의 동의로, 친권자나 후견인이 없을 때에는 부양의무자의 동의로 각각 그 동의를 갈음할 수 있다.
2 「모자보건법 제14조 개정(안) 마련」을 위한 공청회, 2008, 연세대학교 의료법윤리학연구소
3 기독교, 천주교, 조계종, 원불교
4 평화방송, CTS기독교 TV, 불교방송
5 보건복지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사회협의체에 ‘여성계’가 참여했다고 발표했지만,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인력개발센터연합 등 여성계를 대표하여 실무회의에 참여했던 단체는 모두 사퇴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