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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의 이야기 - 연재 마지막회(17th)
  • 水 (성폭력 피해생존자)
생존자 말하기_水의 이야기(17th) · 마지막회

수, 작별을 고하다.

[편집자주] '생존자 말하기'는 성폭력피해생존자의 투고로 채워지며, 연재 혹은 단회로 독자 여러분과 만남을 갖습니다. 글 보내주실 곳은 ksvrc@chol.com 입니다. 이번 호에는 '水'의 연재수기 열일곱 번째 이야기입니다.

水

# 수, 안녕!

'수'를 떠나보내기로 했다.

4년이 넘는 시간동안 나눔터를 통해 '수'라는 이름으로 나의 이야기들을 타인과 공유하며 '수' 잘난 맛에 살았다. '수'의 글을 잘 읽고 있다는 친구들의 격려와 나눔터를 받는 상담소 회원들이 '수'의 글부터 읽게 된다는 말을 들으면 왠지 내가 뭔가 잘 하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지곤 했었다. 쉽게 잘 읽힌다는 내 글, 하지만 나는 이 글을 쓰는 게 참 어렵다. 밤도 새우고, 바쁜 틈바구니에서 휴가를 내어 쓰고, 다듬고, 뽑아낸다.

그런 '수의 이야기'를 이제 마무리한다. '수'와의 작별을 준비하며 생각했던 것들을 좀 정리해보기로 했다. '수'를 떠나보내고 나의 밍밍하고, 지리할 수도 있는 30대 후반의 일상을 조금은 게으르고, 편안하게 살게 될 것 같다. 100만원 조금 넘는 월급을 받고, 한 평 반짜리 옥탑방에 살며, 단독세대주라는 이유로 아파트 청약조차 되지 않는 도시의 평범한 저소득 비혼여성의 삶에 충실해보려 한다.

이번 마무리 글은 수의 입장에서는 완전 쪽팔릴 수도 있고, 읽는 이들에게 '수처럼 살기 별 거 아니네' 하며 힘이 날지도 모르겠다 싶다. 힘이 빠지고, 나 잘난 맛이 없는 '수'를 만나는 게 별로라면 아래글을 읽지 않는 게 좋을 듯.

# 수, 겁먹다.

"꾸액 꾸액"

너무도 익숙한 거위울음소리와 똥냄새에 잠이 깼다. 온몸이 곤두선다. 왜 내가 여기 있지? 여긴 예전에 살던 그 집이잖아. 거위랑 오리랑 울고, 똥냄새 진하다. 마당에서는 그 사람의 목소리까지 들린다. 어떻게 이곳에 다시 들어왔을까, 어디로 도망가나 걱정하다 잠이 깼다. 깨어났는데 또 어두컴컴한 꿈속이다. 다시 꿈에서 깨어나야 했다. 그렇게 해서 겨우 나의 방으로 돌아왔다. 내가 지독히도 무서워하는 꿈속의 꿈을 꾸었다. 15년 가까이 지난 옛집의 기억이 그때 그 집에서 키우던 거위소리와 똥냄새로 나를 찾아 온 건 처음이다. 너무도 생생해서 닭이랑 거위, 오리에게서 나던 똥냄새, 깃털냄새가 내 코를 자극하는 것 같다. 그 사람이 살던 집은 나에게 그 사람만큼이나 끔찍하게 무섭고, 지워버리고 싶은 곳이다. 그 집은 항상 나를 가둬두기 좋았고, 우리 가족들이 아빠란 사람에게 매를 맞을 때도 그 비명소리를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는 그 사람만을 위한 성 같은 곳이었다. 평안한 집에서 혼자 생활하면서 느끼는 행복을 깨고 가끔 이런 식으로 옛 기억들이 나에게 스멀스멀 기어오곤 한다, 아직까지도.

그런 내가 두려움을 잠시 누르고, 글들이 쌓여가는 것을 보며 책을 내고 싶다는 욕심을 냈었다. 그런데, 출판사와 책으로 만들기 위한 이야기를 진행하다 갑자기 그만두었다. 실명으로 책을 내자니 그 이후 나의 일상생활이 염려스러웠고, 가명을 쓰자니 내 속에서 시비가 붙었다.

'왜? 뭐가 쪽팔려? 왜? 가명을 써? 내가 처음 세상에 내놓는 내 책인데, 왜 당당하게 내가 썼다고 말을 못해? 수, 너 니가 당한 일 아직도 니가 쪽팔려하는 거니?' 내 속의 전쟁이 심했다. 그러다 다른 핑계로 출판하는 것을 접었다. 이것만 해도 벌써 3년 전 일이다. 사실 내가 겁이 났었는데, 내 남자친구를 핑계거리로 삼았다.

내 글 속의 '수'는 안 그래 보여도, 나는 겁을 먹었다. 내가 쓴 책을 보고 이런 저런 말을 쏟아낼 인터넷 속의 세상 사람들, 나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 내가 다니고 있는 교회의 수많은 사람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 주인 아주머니. 그들이 나를 어떻게 대할지, 어떤 생각들을 할지 겁이 났다. 남자친구의 가족들도 '수의 이야기'를 알게 되면 어떨까, 내 동생들과 결혼해 사는 올케들은 어떨까……. 먼 미래의 나의 아이들은 어떨까? 엄마가 책을 보게 된다면, 내 아이의 친구들이 보게 된다면……. 그 상상은 끝을 알 수 없었다. 내 주변을 넓게, 좁게, 깊게, 얕게 살펴보며 나는 더더욱 겁쟁이가 되었다. 그들이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아도, 설사 그들이 내가 염려하는 식으로 나를 쳐다보거나 말하지 않아도, 내가 혼자 그들의 눈빛, 생각, 태도를 곡해해서 받아들이고, 미리 편견을 가지고 예상해서 겁을 먹은 것일 수도 있다.

예전에 나는 그런 나를 보며 '겁쟁이'라고 비난하고, 어떻게든 무조건 극복해야 하는 나의 약함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더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은 겁을 먹은 나를 편안하게 놔두고, 시간을 좀 가질 생각이다. 이 시간을 통해 내가 먹고 있는 겁을 소화를 시키든지 아니면 토해버리든지.

그런데 더 깊이 생각해보니 나는 아빠란 사람이 내 글을 볼까봐 제일 두렵고 무서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타인의 반응도 두려운데, 그것과 비교도 안 되게 나를 겁먹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이었다. 내가 처음 집을 나와 외부에 도움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를 기절할 때까지 때렸던 그 사람. 어디 가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며, 엄마에게 말하면 죽여 버린다던 그 사람. 내가 말만 하고 다니는 게 아니라 글로 써서, 책으로 낸다면 그 사람은 과연 나를 어떻게 할까? 초등학교 5학년 딸아이의 입을 피가 날 때까지 주먹으로 패가며 막아왔던 그 비밀이 세상에 폭로된 것을 알면 그 사람은 어떻게 할까? 책이 나오면 그 사람이 나를 찾아내려 하지 않을까? 그건 그냥 어느 날 문득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꿈속의 꿈에서' 거위소리와 역겨운 거위똥냄새를 타고 나를 찾아온 두려움과 비슷하다. 외부에서 밀고 들어오는 두려움이 아니라 내 뼈 속에서, 살 속에서, 피 속에서 베어 나오는 두려움인 것이다.

그 사람이 여전히 두렵다는 느낌은 나를 참 슬프고 무기력하게 한다. 그 사람이 내 기억들을 보고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내가 언제 그랬어?' 라고 물으면 어떻게 할지 두렵다. 나는 너무도 또렷하게 기억하는 것들을 그 사람은 대부분 기억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고, 정말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아, 재수 없어. 이런 건 가해자들이 더 또렷이 기억해서,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까지,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무슨 개념을 가지고 그 짓거리를 했는지 쓰도록 의무화해도 좋을 것 같은데……. 피해를 입은 내가 이걸 써야하다니 참.

아무튼 나는 겁을 집어먹고, 책도 못 내고, '수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수'를 편안한 마음으로 떠나보내려 한다.

'겁나? 그래 겁나는 구나, 겁먹을 만 해' 공감 해주고, 곁에 있어줄 생각이다.

# 수, 낯선 편안함 속으로

볕이 좋은 아침이다. 하늘색이 저런 거구나 싶은, 물감이나 크레파스에는 없는 그런 하늘색이 가득한 하늘. 이런 날은 밤마다 나를 포근히 감싸주는 이부자리를 내다 넌다. 먼지 앉은 빨랫줄을 깨끗이 닦고, 이부자리를 햇볕에 굽는다. 사실 내 이부자리는 외할머니께서 선물로 받으셨던 것이다. 어르신 덮으시라고 최고급 목화솜에 분홍과 황금색으로 곱게 만든 것을 외할머니께서는 당신께서 쓰기 아깝다고 내게 주셨다. 확실히 내 좁은 옥탑방에 황금색 이부자리는 과분하다. 그래서 볕 좋은 날은 내가 이부자리에게 호사를 시켜준다. 하루 종일 햇볕을 잘 받은 내 이부자리는 햇살 내음이 가득하다. 볕에 목화솜 익은 고소한 향기 가득한 이부자리에 누우면 구름위에 누운 것 같다. 이렇게 잘 수 있는 건 정말 축복이다. 지금의 삶은 평안 그 자체다. 아직은 낯선 이 평안함이 마냥 좋다.

언제 또 거위의 울음소리와 똥냄새가 나의 이 평안함을 깨고 들어올지 모른다. 예전에는 그런 것에 민감했다. 상담을 받으러 가야했고,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달을 괴로워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것들이 내 속에 부대끼면 가끔씩 감기가 나를 찾아왔다 지나치듯, 담담히 스치고 지나가도록 지켜봐주고 싶다. 그렇게 낯선 평안함 속에 머물며 익숙해지고 싶다.

# 수, 어느 날 '툭' 터지다.

이전 직장에서 옆자리에 앉은 직장동료가 신문에 난 성폭력관련 기사를 보며 한마디 던진다.

"난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이야"
"어떤 사람들이요?"
"어린이 성폭력 당한 아이들,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 제가 상담소에서 일했었잖아요. 거기서 보니까 적절한 지원만 해주면 잘 살아요"

남일 이야기하듯 그렇게 말했지만 속이 불편했다. 서로 남일이니 편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난 성폭력 중에 어린이 성폭력이 제일 나쁜 거 같아."
"왜 그런 일도 있다면서, 아빠가 딸을 그렇게 하는 거. 정말 그런 일이 있을까?"
'네, 있어요, 저도 아빠한테 당했는걸요. 근데 보세요. 멀쩡하게 잘 살고 있잖아요.'

아찔했다. '툭' 하고 터질 뻔 했다. 내 머릿속에서만 이 말이 맴돌았던 것이다.

"있대, 그 뭐야, 어린애들하고만 성관계 맺고 싶어서 그러는 사람들도 있다면서, 그게 뭐더라 그거 이름이 있는데."

아무 말 안하고 듣기만 하던 나는 조금씩 심기가 불편해졌다.

"로리타 콤플렉스? 그거 아저씨들이 어린 여자애랑 그런 거 하고 싶은 거라면서, 징그러워."
"맞아, 그거, 정말 싫어, 애 낳으면 어떻게 키운대, 이제는 성폭력을 예방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가정하고 애들을 키워야한다는 게 더 속상해."

나는 다른 볼 일이 있는 것처럼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나와는 관계없고, 별관심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만약 위의 대화에서 내 생각이 소리가 되어 나왔다면 어땠을까?

잠시 침묵이 흐르고, 깜짝 놀라고, 아니, 그런 심각한 이야기를 왜 저리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 싶어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다. 암튼 그 이상한 분위기 몇 번 겪어봐서 아는데, 달갑지 않다.

그러나 지금의 시간을 여유롭게 보낸 후, 그 어느 날 수가 '툭' 털어놔도 서로 놀라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수'의 과욕일까? 아무튼 난 정말 어느 날 자연스럽게 당신 앞에서 '툭' 터놓을 거다. 세상의 수많은 '수'들이 터놓을 수 있게 좀 놀라지 말아줬으면 한다. 그리고, 성폭력 당했다고, 그녀들의 인생이 끝장난 건 아니니 너무 불쌍히 여기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또 하나, 당신에게 부담주려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니 절대 부담 갖지 마시길.

# 수, 나뿐인 나쁜 놈을 보내다.

"누나, 내가 집에서 이야기하는 거 들어본 기억 있어? 나는 집에서 존재하지 않았어. 나는 내가 학교 다녀와서 책가방은 내려놓고 있었는지 조차 기억이 나지 않아. 우리 집에는 누나랑 아빠만 존재하는 거 같았어. 누나는 누나만 힘들었다고 생각하지? 다른 가족들은 어땠을 거 같은지 생각 안 해봤지? 그걸 몰랐을 거 같아? 우리는 편했을 거 같냐구."

내가 힘들다고 짜증을 부렸더니 늘 들어주기만 하던 남동생이 갑자기 안 하던 속이야기를 했다.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랬구나, 그랬구나, 맞아. 그때 다른 가족들의 말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구나. 그 집구석에는 늘 그 사람과 나만 있었던 것 같아'

다른 가족들은 가족 1, 2, 3 같이 내 삶에 존재감이 없었다. 늘 나만 힘든데, 모두들 모르쇠로 일관하고 그들의 삶을 편안히 살아가는 것 같았다. 그런 그들도 나처럼 힘든 삶을 지탱했구나. 그 지옥 같은 집구석에서 나만 힘들었던 게 아니구나. 처음으로 느끼는 낯선 느낌이었다, 다른 이들도 "나"처럼 힘든 그 순간을 함께 지나왔다는 것을 깨달은 그것은. 나 혼자만 알고, 나 혼자만 느꼈다고 생각했는데 동생도, 그리고 다른 가족들도 알고, 느끼고 있었구나…….

이외수씨의 책에서 봤다. 나뿐인 놈이 나쁜 놈이라는 표현. 내가 그랬던 것 같다. 나만 힘들다고 생각하고, 내가 제일 힘들다고 생각하고, 남들이 힘들다고 하면, 내가 이렇게나 많이 힘들었는데, 너 겨우 그 정도가지고 지금 힘들다고 하는 거야? 라고 반문하며 날선 칼을 휘둘렀다. '어디 감히 나보다 힘들다고 지랄이야' 하는 유치한 비교의식이 있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니 내가 가장 힘들다고 하는 고통의 기준은 내가 경험한 것 안에 한정되어 있었다. 내가 경험한 것처럼 다른 이들도 자신만의 경험치 안에서는 자신의 것이 가장 힘들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서 보니, 내 경험치를 넘어서는 고통이나 아픔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넘어갔다. '수'를 떠나보내며 나는 내 경험치를 넘어서는 아픔이나 고통을 찾아보는 시도를 시작한다. 그래서 올 여름에는 교회에서 나의 문제나 상처 때문이 아닌 북한의 어린이들과 주민들, 탈북자를 위해 기도하고, 지원하는 모임에 참여하기로 했다. 알면 알수록 '수'의 아픔을 넘어서는 아픔들도 있고, 단순하게 아픔의 크기와 무게를 비교했던 것이 부끄럽단 생각도 든다.

끝까지 함께 해준 그대들에게 '힘과 용기의 차이'를 선물하며 '수의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힘과 용기의 차이

데이비드 그리피스

강해지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고
부드러워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힘이
방어자세를 버리기 위해서는 용기가
이기기 위해서는 힘이
져주기 위해서는 용기가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고
의문을 갖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힘이
전체의 뜻에 따르지 않기 위해서는 용기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느끼기 위해서는 힘이
자신의 고통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학대를 견디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고
그것을 중단시키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홀로서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고
누군가에게 기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힘이
사랑받기 위해서는 용기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힘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수, 이제 '용기'를 내기 위해 떠난다.

4년이 넘는 시간동안 '수'의 글을 읽어준 그대들이 있어 고맙다. 덕분에 '용기'를 낼 용기를 얻었다. 새로운 길을 떠나는 '수'에게 격려와 힘을 주는 한마디 전하고 싶은 그대들이 있다면 '수'에게 메일을 보내주면 좋겠다. (수_bodraoo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