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이 이끄는 변화
성문화운동팀 두나
운동하는 엄마, 농구선수 김혜경 씨
1967년 중학교 때 농구를 시작해 서울여상 농구부를 거쳐 코오롱 여자실업농구팀에서 농구선수로 활약했던 우리 엄마, 김혜경 씨는 다른 엄마들과 외모나 말투, 행동도 다른 엄마입니다. 웬만한 남자만큼 큰 키에 짧은 머리를 한 엄마는 공중 화장실이나 목욕탕에서 남자로 오해받아 쫓겨났던 경험이 수차례나 되는 ‘여자 같지 않은 여자’입니다. 옷장에는 정장이나 치마보다 색색별 종류별 운동복을 갖추고 있고, 드라마보다 스포츠 중계를 시청할 때 눈을 더욱 반짝이는 남다른 엄마이기도 하고요. 딸을 둔 보통 엄마들처럼 피부나 몸매관리, 여자다운 몸가짐에 대해 잔소리하는 대신, 밖으로 나가 운동할 것을 끊임없이 권유하는 엄마입니다. 덕분에 언니와 저는 엄마가 우리에게 운동에 소질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포기할 때까지 온갖 종류의 운동을 배워야 했지요!
남다른 엄마에게는 특별한 모임이 하나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여고동창모임입니다. 그 모임은 우리 엄마같이 ‘다른’ 엄마들이 잔뜩 모여 있는 곳이지요. 보통 여고동창모임이라고 하면 잘 차려입은 동창생들이 모여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는 장면을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엄마의 모임은 다릅니다. 그곳은 엄마처럼 짧은 머리에 키가 엄청 큰 여자들이 노란색 반바지에 반팔 티셔츠 유니폼을 입고 농구코트에 모여 농구경기를 하는 특별한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선수생활을 은퇴한 여고 동창생들이 서로 몸을 부딪치고 소리 지르며 농구코트를 누비는 모습은 동창모임에 종종 따라갔던 제가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장면입니다.
운동하는 엄마를 보고 자라서 그런 것이겠지요? 저는 운동하는 여자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운동에 소질이 없어서 운동을 잘하는 엄마가 신기하고 부러웠던 적은 있었지만 그런 엄마가 이상하거나 남다르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빠보다 훨씬 운동을 좋아하고 잘하는 엄마, 스포츠 중계에 열광하는 엄마, 운동 후 땀 냄새를 풍기며 집에 돌아오는 엄마를 보면서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운동이 여성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은 별로 해보지 않았습니다.
농구는 여자와 어울리지 않아?
그런데 우리 집 담장을 넘어 밖으로 나가보니, ‘여자가 운동을 (잘)한다는 것’은 저의 경험과 달리 그리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운동은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것이지요. 특히 외모를 가꾸는 운동이 아니라 농구나 축구처럼 격한 몸싸움이 있거나 빠른 속도를 필요로 하는 운동은 더욱 그렇습니다. 운동의 공격성이나 격렬함, 활동성, 경쟁, 위계적 성격은 남성의 몸과 특성에는 잘 어울리지만 여성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운동은 늘 남성의 영역으로 존재해왔던 것이지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운동에 참여하도록 독려 받으며 자연스럽게 운동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남성들과 달리, 여성들은 ‘격렬하고 빠른 움직임이 요구되는 운동은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다’는 규범 속에서 운동에 대한 접근부터 차단당하게 되는 겁니다.
엄마가 선수생활을 했던 6·70년대에는 지금보다 여성들이 운동할 수 있는 기회가 훨씬 적었습니다.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운동에 소질을 보이고 몸을 움직이는 것을 재미있어 했지만 대부분의 여자 아이들이 그렇듯이 전문 운동선수가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여성이 ‘운동을 한다’는 것은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러다 당시 한국여자농구가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인기를 끌면서 여성들에게도 운동할 기회가 조금 늘어났습니다. 덕분에 달리기를 잘해 학교 농구팀 감독의 눈에 띄었던 엄마는 운동을 시작할 수 있었지만, 사실 당시 여성들이 운동을 할 수 있는 방법은 그렇게 전문 선수가 되는 방법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운동을 남성들이 전유하는 분위기는 운동하는 여자들을 사회규범을 벗어난 ‘남자 같은 몸과 특성을 가진 여자’로 평가하며 여성성이 결핍된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엄마도 농구코트 안에서는 목청껏 소리 지르고 격렬하게 몸싸움하는 운동선수의 모습을 요구받고, 역동적인 움직임에 관중과 동료들의 환호를 받았지만, 농구코트를 떠나면 단지 남자같이 ‘괄괄하고 센’ 여자로만 취급받아 혼란스러웠다고 이야기합니다. 엄마의 동료선수들 중에는 운동선수를 ‘여자답지 못하다’고 보는 편견과 낙인을 피하려고 선수생활을 그만둔 후 운동을 멀리하거나 선수였던 경력을 드러내지 않는 경우도 여럿 있습니다. 또 동료들 가운데 몇몇은 운동선수를 아내나 며느리로 삼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보는 시선 때문에 결혼 상대와 그 가족들에게 운동선수였던 사실을 숨겨야 했던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고 하고요.
안타깝게도 이런 경험 때문에 운동하는 여자들은 운동을 잘하는 자신을 긍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운동장 밖에서 살아가야하는 여성들에게 운동을 좋아하고 잘한다는 것은 별로 유용하거나 필요한 자원이 아니며, 때문에 여성들은 운동하는 자신을 부정하고 운동에서 멀어지는 삶을 택하는 것입니다.
움직여봐, 달라질 거야!
‘운동은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성별규범은 운동하는 여자들의 몸과 삶을 제한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여성들은 사회가 부정하고 무시하는 바로 그 여성의 운동의 경험을 통해 성별규범을 훌쩍 뛰어넘기도 합니다.
적극적으로 내 몸의 움직임과 주변 공간을 통제해야 하는 운동은 수동적이고 얌전해야 하는 여자다운 몸과 마음가짐을 갖는 것과는 정반대의 경험입니다. 그래서 빠르고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며 땀을 흘려본 여성들은 ‘여자들이 운동을 싫어한다’거나, ‘여자에게 어울리는 운동이 따로 있다’는 규범이 허구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팀 내 포인트 가드로 신속하게 경기의 흐름을 읽고 농구코트를 적절히 활용하며 선수들 사이를 재빠르게 뛰어다녀야 했던 엄마도 농구경기에서 필요로 하는 빠른 움직임이나 격렬한 몸싸움이 여성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오랜 상식처럼 ‘여성에게 운동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여성의 운동을 제한해온 성별규범이 여성들의 실제 몸 경험에 밀려 힘을 잃게 되는 겁니다. 엄마는 자신의 오랜 운동 경험에 비추어볼 때 “못한다고 생각하는 건 안 해봐서 그렇다”며 여성의 운동에 대한 사회의 편견을 가볍게 패스해버립니다.
이뿐 아닙니다. 여성의 운동에 대한 사회규범이 편견에 불과하다는 것을 운동을 통해 몸소 체험한 여성들은 답답하고 좁은 여성다움의 테두리를 넘어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몸의 움직임과 삶을 상상하고 시도합니다. 운동 현장에서 여성들은 조신하고 얌전해야 한다는 규범 따위는 무시해버리고 보다 빠르고 힘차게 자신의 몸을 움직이는 데 온힘을 기울입니다. 또 나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돌봐야하는 엄마, 아내, 딸의 역할을 내려놓고 온전히 나와 상대편의 몸의 움직임에 집중합니다. 여성들은 이런 운동의 경험을 통해 여성다움의 경계를 넘어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존재가 되며, 그런 서로를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엄마와 운동 동료들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엄마는 동료들과 서로 몸을 부딪치고 땀 흘리며 함께 경기에 몰입하는 즐거움 때문에 운동을 멈출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 순간만큼은 이런저런 해야 할 일들이나 스트레스를 모두 잊고 나 자신과 동료들의 움직임에 집중할 수 있다면서요. 이들은 입원할 정도가 아니면 아파도 운동하러 나가고, 남편과 아이들을 챙기고 돌보는 일은 제쳐두고 경기출전을 위해 멀리 떠날 정도로 운동에 집중하고 운동을 즐거워합니다. 그리고 동료들은 그런 서로를 응원하고요.
이런 운동의 경험은 여성들이 이제까지와 다른 삶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기반이 됩니다. 여자는, 엄마는, 아내는 어떠해야 한다는 규범에 얽매이기보다 나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운동을 통해 만난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여성들은 세상을 더 넓고 깊게 바라보고 상상하며 자신만의 자유로운 삶을 만들어갈 가능성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 엄마는 무릎 연골 수술을 받았습니다. 무릎의 방향을 급하게 바꾸는 운동을 피해야 하는 수술은 엄마의 운동 생활에 치명적이었지만 엄마는 운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더 이상 격렬한 운동을 할 수 없다고 절망하는 대신, 운동에 대한 강한 의지로 무릎에 무리가 덜 가는 운동을 찾아내 운동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엄마는 전보다 훨씬 많이 걷고, 자전거 타기도 즐기게 되었습니다. 아마 엄마의 삶은 운동을 멈추지 않는 한, 앞으로도 활기차고 자유로울 겁니다.
엄마처럼 운동을 통해 여자다움에 갇히지 않는 다른 몸을 경험하고 다른 삶을 살아내며 변화를 체험하는 여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고 싶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여자들로 이 세상이 가득 채워졌으면 좋겠습니다.
운동하는 여자들의 힘차고 자유로운 삶. 그녀들의 삶을 응원합니다! 파이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