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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하는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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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다시 하는 숙제

하나 | 본 상담소 회원

서점에는 ‘20대에 하지 않으면 안 될 50가지’, ‘30대에 꼭 갖춰야할 필수조건 45가지’ 등 나이와 성별에 따라 해야 할 일을 정해주는 지침서가 넘친다. 금융회사는 연금보험과 생명보험을 권유하며 특정 나이까지 해야 할 경제적 숙제를 알려주고, 미디어는 결혼과 출산의 적령기를 반복해서 가르쳐 준다. 누군가 출생 후부터 사망 전까지 한 사람이 평생 해야 할 일과 그 시기를 이미 다 정해 놓은 것만 같다. 그리고 우리는 치밀하게 짜인 계획표에 따라 주어진 숙제를 완수하며 살아간다. 만약 운 좋게 모든 과제를 마친다면 ‘잘 살고 있다’는 평가가 따르고, 소홀히 하거나 완료하지 못하면 어딘가 모자라고 부족한 ‘루저’가 된다. 우리는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인생의 과제와 지침, 평가를 수시로 점검하며 조급하고 불안하게 살아간다.

숙제가 제일 쉬웠어요

나는 숙제는 꼭 하는 성실한 학생이었다. 빈 연습장에 영어 단어를 반복해서 채우는 숙제나 교과서 삽화를 똑같이 베끼는 이상한 숙제, 어려운 수학 문제도 일단 주어지면 무엇이든 곧잘 해냈다. 나에게 주어진 인생의 숙제들 역시 차곡차곡 마쳤다. 대학 입학과 졸업도 시간에 맞춰 성실히 해내고 졸업 후에는 유학을 떠나 학위도 받았다. 방학 때는 인턴 활동이나 토익점수 취득 등 취직에 필요한 ‘스펙’을 차근차근 쌓았고, 이런 노력의 결과로 어렵지 않게 대기업에 취직했다. 회사에서도 나는 착실한 직원이었다. 회사는 내 의사와 상관없이 몇 차례씩 소속 부서와 업무를 바꿨지만, 여전히 나는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 회사가 내준 숙제를 성실히 하다 보면 원하던 사람이 되어 바라던 삶을 살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수많은 인생 지침서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듯, 해야 한다는 많은 것을 정해진 시간 안에 마치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숙제의 끝

연차가 쌓이고 연봉도 오르면서 내 삶은 점차 안정되어 갔다. 주변에는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고 부모님도 안심하는 눈치였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 지침서대로라면 지금쯤 내 삶은 어느 정도 만족스러워야 했다. 그런데 정작 나는 이만큼 숙제를 해낸 내가 뿌듯하거나, 원하는 삶에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았다. 마음 한 구석에서 자꾸 떠오르는 불편하고 불안한 마음이 지워지지 않았다. 전보다 더 성실히 숙제를 마쳐도 나아지지 않았다. 내 인생이 뭔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주어진 숙제를 하다 보면 계획대로 살게 될 거라 믿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계획하고 결정할 수 있는 것들은 점점 줄어갔다. 업무에 대해 결정 할 수 있는 부분은 전보다 늘었지만 그것이 내 삶에 대한 결정권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어느새 내 인생의 스케줄은 회사에 달려 있었다. 부서 이동이나 승진, 퇴사 같은 회사에서의 진로는 물론이고 퇴근 후의 생활도 회사의 일정에 좌우되었다.

삶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지만 좀처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제까지 해왔던 것들을 부정하고 무언가 새로 시작한다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았을 뿐더러 대출금 상환이나 보험금, 생활비 부담 등 늘어가는 경제적 책임은 내 발목을 잡았다. 이미 회사를 중심으로 꽉 짜인 스케줄에 익숙한 5년 차 직장인인 나에게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인생이란 원래 뜻대로 되지 않기 마련인데 투정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고 이 정도면 잘 살고 있다고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무기력하게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점점 사라져 가는 내 삶을 목격하면서 지금이 정말 내가 원했던 삶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성공과 행복의 길이라고 의심 없이 선택하고 해냈던 것들이 사실은 나보다 주변에서 말하고 원하는 것이 아니었는지 물었다. 그동안 이루고 싶다고 믿었던 삶의 내용을 냉정하게 들여다보고,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집중했다.

한동안 나는 이제까지 최선을 다했던 많은 과제들이 사실은 다른 이들이 만들어 놓은 시간표를 착실히 따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동안의 노력과 성과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인정하는 것 같았다. 꽤 긴 시간이 흐른 후에서야 삶에 대한 치열한 고민 없이 누군가 정해준대로만 살아온 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동안 참 열심히도 했던 숙제를 멈췄다. 나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내 의지와 속도대로 인생을 꾸려가기 위한 첫 번째 시도였다.

숙제 다시 하기

얼마 전 나는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다. 뒤늦게 다시 학생이 되어 시작한 도전을 과연 잘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질 때도 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찾는 숙제는 어떤 기준이나 가이드라인도 없어서 여태껏 해왔던 어떤 것보다 어렵다. 가끔은 회사가 꼬박꼬박 주던 월급이 그립기도 하다.

사실 나는 여전히 사회가 정해주는 숙제와 시간표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고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미래가 불안하다. 그렇지만 이번엔 보기에 그럴 듯한 일이 아니라 내가 진심으로 행복한 결정을 하려고, 시간을 두고 고민하고 있다. 다양한 삶의 방법을 내 인생에 대입해 보기도 하고, 나와 같은 선택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인다. 내 인생이 회사나 다른 사람이 아닌 온전히 나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 즐겁다. 그리고 나만의 숙제로 채워갈 앞으로가 진심으로 기대된다.

※ 하나 리얼리스트 & 로맨티스트. 오랜만에 맞이한 겨울방학을 맘껏 즐기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