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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어마한 프로젝트의 깔대기, 다이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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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어마어마한 프로젝트의 깔대기, 다이어리

여름 | 본 상담소 회원

결혼을 하지 않고, 가족들과도 떨어져 독립적인 생계를 꾸리고 싶었다. 그래서 어떻게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살림을 꾸릴지가 늘 주요 화두다.

협동조합에서 만난 ‘중년여성’들

처음으로 뭔가 가능성을 본 것은 한국성폭력상담소 다른몸되기 프로그램에서였다. 지리산 종주 후에 홍성으로 가서 귀농해서 살고 있는 언니들을 만났다. 둘러앉아서 농사 지으면서 사는 이야기, 귀농한 사연, 미래에 대한 계획들을 들었다. 서울 지역에서 시민운동을 하다가 홍성으로 귀농하신 분이 60대에는 아프리카로 가서 봉사를 하고 싶다는 얘기를 하셨는데, 아직도 그 얘기가 생생할 정도로 꿈을 갖고 있는 사람의 생기를 느꼈다. 홍성에서 홍성 지역 유기농 생산자들의 유통창구인 ‘협동조합’과 지역 공동체 가게 등도 소개를 받고 둘러보았다. 짧은 체험이었지만 구성원들에게 경제적인 지원이 될 수 있고, 사회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협동조합’이라는 것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흩어져 있는 개인들이 모여서 ‘지속가능’한 경제적 대안을 만들어가는 것이 좋아보였다. 나 또한 그 안에서 대안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로부터 6개월 정도 후에 서울에 있는 도시 소비자들이 만든 생활협동조합(이하 생협)에 취직을 했다. 약간 ‘듣보잡’이어서 주변에서는 약간 의아해 했지만, 나는 맘에 들었다. 무엇보다 오랜 자취생활에 지친 내 몸과 마음이 유기농 농산물 섭취와 월급으로 안정을 찾아갔다.

업무가 안정을 찾아가면서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여성, 그 중에서 특히 ‘중년여성’이었다. 나의 중년여성에 대한 감수성은 항상 ‘엄마’에 딱 머물러 있었다. 다른 상이 없었다. 그 나이 또래를 떠올리고 그 특징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면 그냥 ‘엄마’를 떠올리고 ‘엄마’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집안일을 해놓고 사무실에 나와서 자원 활동을 하고, 광우병 소 수입 반대 집회 현장 등에서 피켓을 들고, 자신의 취미를 즐기고, 또한 생협을 직접 경영해가는 주부들, 중년여성들의 파워에 나는 좀 ‘깜놀’했고, 대단하고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마어마한 프로젝트의 깔대기, 다이어리

친구 M과 서로의 일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재미있는 프로젝트들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 했었다. 생협에 취직한 후에는 ‘중년’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이야기가 진행이 되면서 재미있는 프로젝트들에 대한 구상이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에서 중년여성들의 문화적인 욕구, 특히 여행이나 쉼을 주선하면 좋겠다는 것과 여행에서 자신의 기록을 남길 수 있도록 함께하면 더 좋겠다는 얘기를 많이 했다.

문제는 돈. 사회초년생인 우리가 모아놓은 돈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강좌를 열려면 교육장이 필요하고, 여행을 가려면 경비가 필요하고, 책을 내려면 인쇄비 등의 출판비가 들었다. 사실 참여하려는 의지가 있는 수강생들에게 돈을 받아서 진행을 하면 되지만, 그럼 돈 있는 사람만이 자신의 역사를 기록할 수 있단 말인가 앞에서 주춤했다.

‘누구나’ 쓸 수는 없을까. 누구에게나 자극이 될 수는 없을까. 그 통로를 찾고자 고심을 했고, 그 끝에 나온 것이 ‘다이어리’였다. 다이어리라면 누구나 구입할 수 있을 정도의 가격이고, 지속적으로 자신의 곁에 두고 글쓰기가 가능하다. 우리도 묻고 싶은 질문, 기록되었으면 하는 부분을 다이어리 안에 넣을 수가 있었다. M과 나는 직장을 다니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틈틈이 시간을 내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2009년 중년여성을 위한 ‘인생의 화려한 오후 2시 레드 다이어리’를 만들었다.

다이어리는 어마어마했던 프로젝트의 깔대기 같은 존재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만들어보고 싶었다. 더 해보고 싶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다이어리를 선택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남겨서 훗날까지 소중히 간직한다면 얼마나 멋진가. 누군가 책장에서 꺼내 한 장 한 장 들춰보는 것은 자신의 글이겠지만, 빛바랜 디자인은 우리가 만든 그 다이어리였으면 좋겠다는 상상.

본격 ‘자’영업자로 살기

그 사이 M과 나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다이어리 작업실을 냈다. 월급을 받던 처지에서 월급을 직접 벌어야 하는 ‘자’영업자가 된 것이다. 사무실을 얻는 것, 제작비를 끌어오는 것, 같이 작업할 사람들을 구하는 일, 다이어리를 만들고 판매하고, 세금을 신고하고 어느 절차 하나도 ‘공’으로 되는 일이 없이 온전히 ‘노력’을 요한다. 그래서 힘들지만 그래서 보람차다. 스스로 일구고 그 수확의 기쁨을 만끽하는 것이 꼭 요행 없는 농부 같다.

아직은 걸음마 단계. 손익분기점을 넘지도 못했고 널리 이름을 알리지도 못했지만 ‘시작은 순풍’이라며 소문을 내고 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고, 처음이 힘들면 끝이 순탄하다고들 하니까. 이 길 끝에는 뭐가 있을지 모르지만 이 길 중에는 분명 재미있고 진귀한 경험들을 듬뿍할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든다.

※ 여름 상담소 회원, 소설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다. 기초 생활 수준 이상의 돈을 벌어, 사회에까지 공헌하는 것이 꿈인 비혼여성이다.